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한국의 섬 기행<완도, 노화도와 보길도를 가다>

산중산담 2017. 4. 10. 13:10

 

 

한국의 섬 기행<완도, 노화도와 보길도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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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의 마지막 달인 12,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한국의 섬 기행을 떠납니다. 겨울바다가 더 없이 아름다운 섬이며, 조선 중기의 문장가인 윤선도가 만든 정원이 있는 전남 완도의 노화도와 보길도를 찾아갑니다. 노화읍 등산리에서 노록도까지 신비의 바닷길을 걷고, 노화도의 구석구석을 거닐다가 다리를 건너 보길도로 갑니다. 고산 윤선도 유적지와 예송리 해변을 거닐 예정입니다. 그리고 공룡알 해변과 우암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 가던 길에 글을 남긴 글쓴바우와 땅끝 전망대를 돌아볼 예정입니다.

전복의 주산지인 완도에서 맛보는 김, 그리고 따뜻한 남해바다의 진수를 맛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보길도는 완도군의 서남부에 위치하여 완도항에서 31.5떨어져 있다. 동경 126°40, 북위 34°10에 위치한다. 보길도·소안도 등과 함께 소안군도(所安群島)를 형성한다. 면적은 25.02, 해안선 길이는 41이다. 노화읍 신리에는 바로 앞의 노록도와 연결되는 신비의 바다길이 1에 걸쳐 펼쳐져 있다.

 

노화도의 명칭 유래는 염등리 앞 300ha에 달하는 갯벌에 갈대꽃이 피면 장관을 이룬다고 하여 노화도라 하였다고 한다. 또는 윤선도가 이 섬으로 올 때 어린 종을 데리고 왔다 하여 노아도(奴兒島)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섬의 북쪽과 서쪽은 비교적 험준한 산지로 되어 있으나 동남쪽은 구릉성산지를 이룬다. 암석은 주로 중성화산암류·반암류이다.

온난한 해양성기후로 연평균기온은 14.5이고, 1월 평균기온은 0.1, 8월 평균기온은 25.3, 연강수량은 1,285이다. 동백나무·후박나무·곰솔·팽나무 등의 상록활엽수 250여 종이 자란다.

노화도는 조선 중기까지 무인도였으나, 1864(고종 1) 이후 영암군의 관할에 속하여 궁감(宮監)이 매년 조세를 징수하여 왔으며, 1870년에 면민들의 청원으로 방진(防鎭)을 설치하여 삼도진(三島鎭)이라 하였다. 1896년완도군이 설치되어 노화면, 보길면, 넙도면으로 분리되었으나 1916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3개 면이 노하면으로 통합되었고, 1980년노화읍으로 승격되었다.

수산물로는 연안 일대에서 도미·멸치가 잡히며 특히 전복. ··톳 양식을 통해 소득을 올리고 있다.

대당리에는 1884년에 세워진 관찰사 조강하송덕비(趙康夏頌德碑) 등과 7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이포리에는 조개더미가 있다. 염등 마을은 노화도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알려져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보길도는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고산(孤山) 윤선도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윤선도는 1587년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후사가 없었던 윤씨 종가에 입양되어 내려간 윤선도는 특별한 스승 없이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경사백가(經史百家)를 두루 읽고, 의약복서(卜筮)지리까지 광범위하게 공부한 그는 진사시에 합격했다. 서른이 되던 해에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반대파들의 반격을 받아 함경도 경천으로 유배의 길을 떠났으며, 1년 뒤에는 귀양지를 기장으로 옮겼다. 인조반정 이후 윤선도는 송시열과 함께 봉림대군인평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병자호란이 끝나면서였다. 해남에 있던 윤선도는,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왕손을 비롯한 왕가사람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는 소식에 배를 타고 강화도로 가는데, 그때는 이미 강화도마저 함락된 뒤였다. 하는 수없이 배를 돌려 귀향하는 길에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실의에 차 있는 그에게 서인들로부터 남한산성에서 임금이 고생하고 있을 적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비난까지 빗발치듯 들려왔다. 그는 세상을 다시 보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고 제주도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풍랑으로 인해 보길도에 온 윤선도는 섬의 아름다운 경치와 아늑한 분위기에 매혹되어 제주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기암절벽과 동백나무가 어우러진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정착한 곳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하고, 정치 싸움에서 찌들고 멍든 마음을 이곳에서 풍류로써 달랬던 듯하다. 바위틈에서 솟는 물을 막아 연못을 만들고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큰 바위와 소나무들을 옮겨놓았으며, 그 둘레에 정자를 세우고 세연정(洗然亭)이라 이름 지었다.

윤선도의 5대 손인 윤위가 보길도를 방문한 뒤 쓴 <보길도지>에 윤선도가 보길도의 세연정에서 지냈던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일기가 청화淸和하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향했다. 학관(고산의 서자)의 어머니는 오찬을 갖추어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당도하면 자제들은 시립侍立하고 기희妓姬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중앙에 작은 배를 띄웠다. 그리고 남자 아이에게 채색 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공이 지은 어부시시사 등의 가사로 완만한 음절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당 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여러 명에게 동. 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혹은 옥소암玉簫岩에서 춤을 추게도 했다. 이렇게 너울너울 춤추는 것은 음절에 맞았거니와 그 몸놀림을 못 속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칠암七岩(세연지에 잠긴 바위들>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 서도(양쪽 연못 안에 있는 섬)에서 연밥을 따기도 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무민당에 돌아왔다. 그 후에는 촛불을 밝히고 밤놀이를 했다. 이러한 일과는 고산이 아프거나 걱정할 일이 없으면 거룬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하루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을 수양하며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일지라도 감히 꿈꿀 수조차 없는 초호화 행렬을 이루어 가서 지은 그의 작품에는 다산 정약용의 ?애절양(哀絶陽)?과 같은 민중의 애환은 단 한 줄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의 후손 중의 한 사람이 남긴 <가장유사家藏遺事>를 한 편 보자.

 

고산은 낙서재에서 아침이면 닭울음 소리에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한 후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후 네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악공들을 거느리고 석실이나 세연정에 나가 자연과 벗하며 놀았다. 술과 안주를 충분히 싣고 고산은 그 뒤를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세연정에 이르면 연못에 조그만 배를 띄워 아름다운 미희들을 줄지어 앉혀놓고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 비치는 것을 감상했다. 때로는 정자 위로 악공들을 불러 올려 풍악을 울리게 했다.

 

그는 낙서재에서 마주 보이는 앞산 기슭에 있는 동천석실을 자주 찾았는데, 이곳에 오르면 부용동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주변의 산자락이 낙서재터를 둘러 연꽃잎처럼 피어나 있어서 부용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동천석실이라는 이름은 신선이 사는 곳을 동천복지라고 부르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동천석실 근처의 반석에서 차를 달이면서 세월을 보낸 윤선도의 그 당시 풍경을 한 편 더 보자.

 

(중략)

공은 이곳을 몹시 사랑하여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고 하고서 그 위에 집을 짓고 수시로 찾아와 놀았다. 이곳에 앉으면 온 골짜기가 내려다보이고 격자봉과는 나란히 마주하게 되며, 낙서재 건물이 환하게 펼쳐진다. 대체로 사건이 있으면 무민당과 기를 들어 서로 호응하기도 했다.

공은 때때로 암석을 더위잡고 산행하기도 했는데, 발걸음이 매우 경쾌하여 나이가 젊은 건각들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용동 정원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가 정원의 정취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이곳에서 윤선도는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의 빼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벼슬자리에 나간 적도 있으나 금세 당파 싸움에 휘말려 그때마다 해남과 보길도에 숨어 지냈는데, 그 기간이 19년이나 되었다. 그를 아끼던 효종이 죽자 윤선도는 효종의 무덤을 쓰는 문제와 조대비의 복상(服喪)문제를 두고 서인의 송시열 등과 치열하게 싸우다 마침내는 함경남도의 북쪽에 있는 삼수로 귀양을 갔다.

그 당시로는 유례가 없는 85세의 장수를 누렸던 윤선도였지만 세 차례의 유배 기간이 20년을 넘었으니 그의 삶이 순탄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완도의 명물로는 한방에서 강장제로 쓰는 삼지구엽초와 온갖 잡풀을 먹고 자란 약산 흑염소완도 김, 전복등 을 들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김은 이곳에 살고 있던 김씨가 해태를 제일 먼저 양식하기 시작하여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