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내포의 용봉산 둘레길과 홍성 지방의 길 위의 인문학,

산중산담 2017. 4. 10. 14:09

 

내포의 용봉산 둘레길과 홍성 지방의 길 위의 인문학,

 

 

답사나 산행의 묘미를 들라면 여러 가지를 얘기 하지만 가서 보고 온 경치나 맛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과 같이 갔느냐가 좋은 답사나 산행의 첩경이 될 것이다. 단양군수로 재직 했던 퇴계 이황이 소백산을 답사한 뒤에 지은유소백산록에서 산수를 유람할 때는 사는 것과 체험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떠나라라고 하였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소설 속에서 나는 내 키 높이를 열심히 재고 있네. 사람의 키 높이란 늘 같은 것이 아니라서 말일세. 인간의 영혼이란 기후, 침묵, 고독, 그리고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눈부시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네.”고 말하며,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될 수 있음을 설파하였다. 철학자인 데카르트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부딪치게 된 사람들이 아닌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사람들과 사는 것그렇다. 사람이 살만한 곳에서 내가 선택한,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일까? 중요한 것은 여행이나 답사도 어떤 사람과 함께 가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고 삶의 변화도 여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때 오늘 같이한 도반道伴들은 나에게 어떤 사람들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홍주는 호서의 거읍(巨邑)이다. 그 땅이 기름지고 넓으며 그 백성이 번성하고 많아서 난치(難治)의 고을로 일컬어 왔다라고 하였던 홍주가 결성과 이름을 합하여 홍성이 된 것은 1914년이었다. “관청 많은 홍성에 가서 아는 체 하지 말고 알부자 많은 광천에 가서 돈 있는 체 하지 말아라.”라는 말이 있었던 광천 지나 홍성에 접어든 것은 열시쯤이었다.

홍성 읍내를 가로질러 덕산 방면으로 향하는 609번 도로에 접어들자. 눈앞에 보이는 용봉산(龍鳳山)은 나무는 별로 없고 바위로 덮혀 있다. 용봉사(龍鳳寺) 상가 단지를 지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용봉사 입구에 접어든다.

용봉사 가는 길 역시 다른 절들과 다르지 않다. 천천히 거시멘트 포장이 된 가파른 길을 조금 오르자 길 왼쪽 바위에 용봉사 마애불입상이 나타난다. 경주 남산의 감실 부처처럼 바위 면에 감실을 파듯이 파 들어가 불상을 조각한 용봉사 마애불 입상은 높이가 2.1m이며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118호로 지정되었다. 얼굴이 긴 타원형으로 풍만한 편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입 좌우가 움푹 들어가 수줍게 웃는 듯한 이 불상은 얼굴 표정에 비해 신체는 밋밋하게 조각되어 있는 편이다. 특기할 점은 이 불상 오른쪽 어깨 옆 바위 면에 331자로 불상 조성기가 새겨져 있어 불상을 새긴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마애불상은 통일신라 소성왕 1(799) 4월에 장전대사가 발원하여 원오법사가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입술에다 빨갛게 루즈를 칠한 듯한 마애불을 뒤로하고 조금 오르면 작고 아담한 규모의 용봉사가 나타난다.

절 뒤편에 병풍을 두른 듯 한 암벽과 암봉을 배경 삼아 자리 잡고 있는 대웅전 안에서 지장보살 지장보살을 간절히 부르는 독경소리가 흘러나오고 배롱나무 아래 우물가에는 자그마한 부처님이 앉아 물을 마시는 사람들을 굽어보고 있다. 겨울 햇살아래 한가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고 있는 용봉사의 정확한 창건연대와 중수 시기는 알 수 없다. 현존하는 유물로 볼 때 백제 말기에 창건된 사찰로 추정되고 있는 용봉사는 원래 현재의 자리 서쪽 높은 곳에 있었다고 한다.

번성했던 절에는 유물들이 남아

용봉사터가 명당임을 알게 된 평양 조 씨 일가가 절을 황폐화시키고 그 자리에 묘를 썼으나 그 후손들은 쇠락하여 지금은 제사조차 못 지낼 형편이라고 하는데...

용봉사는 그뒤 1906년쯤에 다시 세운 것으로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 채뿐이다. 그러나 옛터에는 보물 제 365호로 지정된 마애석불을 비롯 석조와 절구 맷돌들이 남아 옛 절터가 번성했음을 알려주고 있고 홍성 읍내에도 절터에서 가져갔다는 유물들이 여러 점 있다. 절에서 200m쯤 올라간 용봉산 정상 부근에 신경리 마애석불이 있다. 높이가 4m에 보물 355호로 지정된 마애불은 이 지역 사람들이 노각시 바위라고 불리는 바위 표면을 불상의 윤곽을 따라 타원형의 감실 모양으로 파내고 부조한 불상이다. 불신에 비하면 머리는 크고 넓적하며 소발의 머리에 육계가 크게 솟았다. 크고 비대한 얼굴에 비하여 가늘게 뜬눈과 입은 작게 묘사되어있고, 눈과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풍만한 얼굴과 함께 퍽 온화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귀는 길게 어깨까지 내려오고 목은 매우짧아 삼도가 목 아래까지 내려왔다. 신체는 직선적이고 좁은 어깨 너비가 발까지 이어져 머리에 비해 매우 약화되어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옷 주름의 조각선은 얕게 음각되었고 좌우대칭으로 묘사되어 힘이 없어 보이며 머리 부분이 깊게 새겨져 얼굴은 매우 풍만한 편이나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조각이 소홀해 지고 각선미도 약해지고 있다.

머리 위에 방형의 별석(別石)을 얹어 놓은 이 마애불상은 전체적으로 우람한 편이지만 고려시대의 큰 불상에서 보이는 괴체(怪體)화는 보이지 않는다.

이 불상은 넓게 조성된 공터에서 우러러보는 맛도 일품이지만 불상의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맛이 더없이 좋다. 멀리 펼쳐진 홍성 읍내를 내려다보다가 병풍바위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용 바위를 지나 병풍바위에서 바라보는 홍성의 아득히 펼쳐진 들녘에서는 여기저기서 연기가 오르고 다시 바라보는 용봉산은 비석바위, 악귀봉 등 수많은 비석 형태의 바위들이 우뚝 우뚝 솟아있다. 이제야 용봉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상하리로 향한다. 용봉초등학교에서 400m쯤 산길을 올랐을까? 헐벗은 겨울 나무숲 사이로 민가와 다름없는 작은 암자가 나타나고 그 뒤로 거대한 몸체의 상하리 미륵불이 우람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전체 높이 7m에 이르는 상하리 미륵불은 부여군 임천면 성흥산 자락에 있는 대조사 미륵불이나 논산 관촉사의 미륵불과 흡사한 모습이지만 그보다 더 서민적이라고 해야 할까? 위압적인 모습을 띄기보다는 누구든지 다가가면 다정스런 이야기를 들려줄 듯싶다. 벙글벙글 웃고 있는 듯한 상하리 미륵불(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87)을 바라보는 사이 문득 겨울나무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어느덧 봄이 왔음을 깨닫는다. 이곳 흥북면 상하리에 있는 용봉산 자락에서는 매년 올리는 용봉 산신제가 있고 서부면 남당리의 당산제가 있는데 용봉 산신제나 남당의 산신제를 잘못 지내면 호랑이가 내려와 주민을 해한다는 말이 전해오고 제를 지내지 않으면 마을에 홍역이 돌아 사람이 죽는다는 말이 전해 와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산제를 성대하게 지냈다고 한다.

용봉산 자락을 벗어나 홍주성(사적 제 231)에 접어든다. 부안 변산의 개암사 일대와 더불어 백제 부흥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주류성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는 이 홍주성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천둥이 땅에 떨어지는 형세라고 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 지역에선 싸움이 많이 치러졌다. 왜구들이 열여섯 번에 걸쳐 침입하였고 최향의 반란, 이몽학의 반란, 동학혁명과 의병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수많은 전란 속에서 36채에 이르렀던 홍주성의 관아도 현재 남아있는 것은 810m 정도의 홍주성벽과 홍주아문, 그리고 동문이었던 조양문 등 불과 몇 가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옛 시절 홍주 목이었던 곳을 홍성 군청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홍주 동헌 외삼문이었던 홍주아문이 먼저 눈에 띈다.

1870년에 홍주 목사 한응필이 고쳐지은 것이라는 홍주 아문은 정면 3칸으로 가운데에 솟을대문이 우뚝 솟아있어 당시의 권위를 그대로 들어내 주는데 홍주아문이라고 쓰여 진 현판 글씨는 대원군의 친필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있고, 사람들은 새로 만든 홍성군청 정문으로 들락거린다. 꼭 필요한 차량만 그 문으로 드나들게 하고 홍성군수를 비롯한 모든 내방객들이 홍주아문을 사용한다면 얼마나 운치가 있을까? 그러한 아쉬움은 조양문에서도 마한가지다. 전주의 풍남문이 항상 굳게 닫혀있는 것처럼 이곳의 조양문도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김지하 시인이 말했던 경원 즉 멀리서 바라본다.”가 아니라 가까이서 서로 호흡할 때 사람과 사람이 자연과 사람이 서로가 동일화되는 것은 아닐까?

용봉산 자락에 있는 홍성의 문화유산을 보고, 김좌진 장군의 사적지와 만해 한용운선생의 옛집을 답사할 이번 여정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