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을 걸으며 이른 봄꽃에 취하다.
“매화는 사람을 고상하게 하고, 난초는 사람을 그윽하게 하며, 국화는 사람을 소박하게 하고, 연꽃은 사람을 담백하게 한다. 봄 해당화는 사람을 요염하게 하고, 모란은 사람을 호방하게 한다. 파초와 대나무는 사람을 운치 있게 하고, 가을 해당화는 사람을 어여쁘게 한다. 소나무는 사람을 빼어나게 하고, 오동은 사람을 해맑게 하며, 버들은 사람에게 느낌을 갖도록 한다.” <유몽영> 속에 실린 여러 가지 풀과 나무를 칭한 글이다.
봄이 사뿐히 내려앉은 아름다운 섬진강, 그 중에서도 섬진강의 물줄기가 가장 아름다운 섬진강의 중류를 일찍 핀 매화꽃을 보며 걷습니다.
“여러 산이 줄지어 있고, 물 한 줄기 둘러 흐른다.”「동국여지승람」의 ‘산천‘조에 실린 임실의 풍경이다. “산과 산이 첩첩이 둘러싸여 있어 병풍을 두른 것처럼 아름다운 곳이다”라고 표현 된 임실은 “살 제 남원 죽어 임실”이라는 말도 있다.
조선시대 이곳 임실을 찾았던 신숙주申叔舟는 객관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말을 타고 유유히 가니 만리의 정(萬里情)이요. 저녁에 외로운 객관에 드니, 온 천지가 맑구나. 뜰 앞에 작약芍藥은 붉은 것이 시들려는 듯, 담장 밖 멧부리는 푸르게 멀리 연하였네. 10묘의 볏모는 흐르는 물이 어둡고 몇 집 되는 마을에는 엷은 연기 일어나네. 객창客窓이 적막헌데 오직 달만이 밝고, 꿈을 깨니 뭇 개구리 한바탕 노래 소리로구나.”,
산중에 바위로 된 천연의 문이 있어 회문(回門)이라고도 부르는 회문산(回門山)은 반석 같은 웅장한 바위들이 4km에 걸쳐 뻗어있고 높고 우뚝 솟은 봉우리는 항상 구름에 잠겨있다. 순창, 임실, 정읍 등 삼개 군에 걸쳐있는 이 산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다섯 선인이 바둑을 두는 모양의 오선 위기에 명혈이라는 명당을 비롯한 명당자리가 많기로 소문이나 풍수 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오선위기의 명당자리는 발견되지 않고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강증산 선생의 말을 해석하여 사대 강국이 우리나라를 에워싸고 있다가 다 물러가는 형국이라고도 한다. 또한 옛날 이곳에는 백룡이라는 산적두목이 무리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웅거했다고 전해지는데 산봉우리에 그들이 살았다는 것이 남아있고 장군봉 일대에는 크고 작은 묘소들이 여기저기 쓰여 져 있다. 회문산(837m)은 북쪽으로 투구봉이 있고 남쪽 능선에는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 만일 기도를 올렸다는 만일사가 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옛말에 “논두렁 정기라도 받고 태어나야 면장이라도 한다.”고 했으니, 이산은 그 후로도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동학교도들이 은신처로 삼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남부군 전북도당 사령부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 회문산이기도 하다.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낙강간 전선까지 승승장구하던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서 갈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다.
내가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가 86년 이 때쯤이었을 것이다. 황토현문화연구소가 제 이름을 달기 전 시인과의 만남을 준비했는데 첫 번째 초대 손님이 김용택시인이었다.
순창 가는 버스를 타고 와서 덕치국민학교에서 만난 김용택 시인은 순수 그 자체였다. 그런 인연으로 우리들은 형님 동생하는 사이가 되었고 92년이던가 섬진강을 따라가는 답사 길에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었다. 용택이 형님네 작은 집에서 지금은 전남대학교에 자리를 잡은 소리꾼 전인삼 명창을 초대 흥보가 박타는 장면을 들으며 배꼽이 빠지게 웃다보니 나중에는 웃을 힘이 없었던 그 때가 아물아물 떠오른다. 뒤에도 얼마나 여러 번 이곳을 찾아왔던가. 가을이면 용택이 형님이 감을 따러 오라고 해서 식구들은 다 데리고 감을 몇 포대씩 따가기도 했고 좀 늦으면 이른 저녁까지 먹고 갔던 그 기억들이 내 발길을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십 육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 마을도 다른 마을과 별로 다를 게 없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낯선 사람들이라 선지 집집마다 개장에 갇힌 개들이 열을 내며 짓고 있으니...
용택이 형님은 학교에 계실 것이라 짐작했지만 어머님마저도 마실을 가셨는지 보이지 않고 지붕 위에 내린 눈이 녹아 흐르는 낙수 물소리만 요란했다
다시 용택이 형님네 집에 갔을 때는 두 주일이 지난 3월 24일 섬진강의 마무리 답사 길이었다. 안 계시리라 믿었었는데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열고 용택이 형님이 나오는 게 아닌가.
토요일이라 전주에 갈 일이 있었지만 신문에서 우리 답사가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우리를 보기 위해 집에 왔다고 하는 게 아닌가.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강 건너 앞산에 용택이 형님네 감나무는 아직 을씨년스럽게 헐벗었지만 돌로 만든 징검다리는 옛날이나 다름없다. 그래 원래 저 다리는 저 모습이 아니었다. 수십 년 수백 년을 두고 아무리 큰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돌다리가 사라진 것은 용택이 형님이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있던 시절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시멘트 다리를 만들며 그 돌다리를 없애버린 것이다. 병원에서 나온 용택이 형님의 아쉬움을 무어라고 표현하랴. 그 뒤 마을사람들이 다시 만든 징검다리는 옛 모습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옛 정취를 일깨워 준다고 할까 군산대 김덕수 선생의 말대로 저 징검다리 밑에다 나무다리 즉 섭다리를 만들어 놓고 용택이 다리라고 부르는 것도 괜찮을 성싶다고 생각하며 용택이 형님이 30여 년 전에 심었다는 느티나무에 앉아서 강의에 귀를 기울인다.
“여그가 동네 사람들이 삼을 삶던 곳이 예요. 삼을 째서 벗기던 이곳을 다른 동네 사람들이 지나갈 때는 담배도 안 피워야 하고 술 먹고 가다가는 얻어맞기가 일쑤였어요 나그네가 지나갈 때는 느티나무를 돌아가야 했어요...
저 강가가 얼마나 고기가 많던지 고기 반 물 반 했어요 우리 어머니가 “용택아 다슬기 잡아 가지고 올텡개, 불 때고 있어라”하고 나간 뒤 불 때고 있으면 금방 가서 한바가지 잡아가지고 오는디, 바가지만 가지고 가서 손으로 이렇게 더듬으면 한 주먹 되고 이렇게 하면 또 한 주먹 되고 그래서 금방 한바가지를 잡아 가지고 왔어요....
도시의 나무들은 전봇대 때문에 나무들이 잘 크지를 못하잖아요 고기들도 잠을 자고 나무들도 잡을 자거든요 풀도 밤에는 잠을 자는데 도시의 배미들은 새벽에도 잠을 자지 않고 우는디 그게 정상이 아니에요. 그래서 예전엔 밤고기를 많이 잡았어요.
멍쳉이라고 부르는 고기가 있는디 얼마나 멍창한가. 손바닥보다 큰 고기가 두손으로 잡을 때까지는 가만히 있다가 밖으로 나온 담에야 부르르 몸을 떨었거든요.
“고기 잡는 방법이 많이도 있어,요 그중 재미있는 것이 큰 메로 바위를 때리면 고기들이 기절해서 쑥쑥 나오거든요 그래서 진메마을 앞에 상처 없는 바위가 없다라는 말이 생겨난거예요” 말씀이 끝이 없지만 어쩌겠는가, 갈 길이 멀다.
이곳 내령內靈리는 본래 임실군 영계면의 지역으로 영계면에서 가장 안쪽이 되므로 안영계 또는 내령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장군목, 장구목, 장군항, 물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산(345m)과 용골산 사이 산자락 밑에 위치한 이 마을에는 장군대좌형의 명당이었다고 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 내룡마을 부근이 섬진강 중에서도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저마다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수많은 바위들이 강을 수놓은 가운데 바라보면 볼수록 기기묘묘한 바위가 요강바위이다. 큰 마을 사람들이 저녁 내내 싸도 채워질 것 같지 않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요강처럼 뻥 뚫린 이 바위를 한때 잃어버렸던 적이 있었다. 박준열부장이 남원 KBS에 근무하던 때였다니까 94년쯤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이 마을에 와서 골재채취업자라고 한후 한참을 지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막걸리도 사주고 밤을 새워 이야기도 하면서 한 두어 달 지냈다든가 밤마다 포크레인으로 골재채취를 한다고 드르륵 드르륵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 사람도 사라지고 요강바위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발칵 뒤집힌 마을 사람들이 남원 KBS에 연락을 해서 전국방송으로 내보낸 뒤 마을 사람의 인상착의를 알려주어 몽타주를 만들어 보냈다. 그런 뒤 두어 달 지났을까 경기도 지역에서 신고가 들어온 것이다. 언젠가 방송에서 보았던 그 바위가 모모지역에 있더라 그래서 경찰들을 급파해보니 자기 집에는 두지 못하고 외딴 곳에 숨겨놓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은 붙잡혀 감옥에 가고 요강바위는 약간의 상처를 입은 뒤에 이 고향에 되돌아 올 수 있었다고 한다.
봄날에 일찍 피어 바람에 휘날리는 매화꽃을 바라보며 거닐고 싶은 분은 놓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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