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꽃 피는 봄날 청산도와 완도를 거닐다

산중산담 2017. 4. 10. 14:05

 

꽃 피는 봄날 청산도와 완도를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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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4월 섬 기행이 3월의 두 번째 주말인 10일부터 12일까지 청산도와 완도를 갑니다. 판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 <서편제>의 무대이자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한 완도에서도 배를 타고 들어가는 청산도의 고즈넉한 길을 걷고, 신지도 해수욕장과 국가 명승 제 3호로 지정되어 있는 구계등의 해변가를 걷게 도리 이번 여정에 참여 바랍니다.

 

완도의 역사를 짚어보는 사이에 배는 청산항에 닿았다.

이른 점심을 먹고 걷기를 시작하는 이 청산도는 예전부터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영화 <서편제>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청산도가 사람들에게 더 각인이 된 것은 몇 년 전 정부에서 나라 안의 '가고 싶은 섬'네 곳중 하나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통영의 매물도와 신안의 홍도, 보령의 외연도, 그리고 청산도가 우리나라 섬 중 대표로 뽑힌 것이다.

다도해에선 드물게 300m가 넘는 산봉우리가 3개나 있는 청산도에는 고분과 지석묘, 옛 성터 등 문화재가 많은 섬인데 이곳을 슬로시티로 지정한 것이다.

슬로시티(Slow-city)199910월 이탈리아의 몇몇 시장들이 모여 위협받는 라 돌체 비타’, 즉 달콤한 인생의 미래를 염려해 슬로시티 운동을 출범시켰다. 슬로시티의 출발은 느리게 먹기인 슬로푸드와 느리게 살기운동으로 시작되었는데, 느리게 걷고 느리게 생각하고, 느리게 생활하기에 이곳보다 더 적정한 곳은 없을 듯 싶다.

일행은 자연스레 두 패로 나뉘었고, 도락 마을로 가는 길은 한가하다. 마을 고샅길에 접어들자 돌담이 이어지고, 담벼락에 빛바랜 사진들이 걸려 있고 그 중 <졸업을 앞두고>라는 사진 앞에 발길이 머문다. 검정치마에 저고리를 입은 처녀들, 머리가 다 단발머리다. 저렇듯 검은 머리가 하얗게 변했을 저 누이들은 세월의 틈바구니에서 어떤 형태의 삶을 살았을까?

구부러지고 구부러진 고샅길을 벗어나자, 해안이고, 해안을 따라 늘어선 해송나무숲이 한 폭의 그림이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나 멀리 보이는 능선에 서 있는 일행들도 역시 그림이다.

영화 서편제의 배경이 됐던 청보리 밭과 유채꽃, 을 감싸고 있는 낮은 돌담길을 지나자 마치 우리들이 한 편의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이렇게 행복하게 걷는 것을 두고 레베카 솔닛은 아무런 장애 없이 풍경 속을 이동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던 것은 아닐까.

어느 사이 발길은 영화 <서편제>의 완장에 이른다. “아리 아리랑 아리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에헤, 문경새재는 웬 고개인 고,” 문득 <진도 아리랑> 한 소절을 부르며 누군가가 춤을 출 것 같아 바라보니 바다도 하늘도 춤을 추고 있다. 능선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대모도. 소모도가 아스라하다. <봄의 왈츠>의 세트장을 지나 푸른 보리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고개를 넘자, 돌담 사이로 난길, 억새들이 사열하듯 서 있는 길은 동화 속 풍경 같고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아련히 들리는듯 하다.

 

이 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 사 쓸 데 없다.“

잘 다듬어진 바다가 보이는 산길을 지나자 작은 해수욕장이 있는 읍리 마을이다. 더러는 앉아서 먼 바다를 바라보고, 더러는 자갈밭 해수욕장을 거닐다가 구장리를 향해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을 숲이 아름다운 구장리에서 차길을 따라 오르자 보이는 산성 청산산성이다. 청산면 당락리와 읍리에 걸쳐 있는 성터아래 올망졸망하게 펼쳐진 논이 청산도에 있는 구들장논’(논 아래 돌을 깔아 물빠짐을 줄이는 방식)이다. 계단식 논농사를 지으며 오랜 세월 인고의 삶을 살았던 청산도 사람들의 피와 땀이 얽히고 서린 산성을 내려와 다시 마늘밭과 보리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도락리에 이른다.“

 

장보고와 청해진

완도군이 지금의 강진군에 소속돼 있던 때는 100여 년 전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청해진은 완도에 있다. ?당보역간(唐寶歷間)?에서 말하길, “당나라 사람이 신라의 변방 백성을 많이 약탈하여 노비로 삼으니 흥덕왕이 장보고(張保皐)로서 대사를 삼아 1만 명의 군사를 일으켜 청해에서 중국의 약탈하는 사람을 방어하였다. 문성왕 8년에 장보고가 원수를 갚았으나 왕은 여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마침내 이 청해진을 근거로 하여 반란하니 13년에 파진(罷鎭)하였다라고 한 완도가 하나의 군이 된 것은 조선 말기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 때에 이조판서로 재직하고 있던 이도재(李道栽)가 완도군 고금도에 귀양을 왔다가 여덟 해 만인 1894년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동학농민혁명의 3대 지도자였던 김개남을 체포한 뒤 즉시 효수시켰던 사람이다. 그 뒤 곧바로 학부대신의 자리에 오른 그는 189641일에 완도를 군으로 승격시켰다. 완도 사람들은 이도재의 은혜를 기려 완도읍 죽청리에 그의 송덕비를 세웠다.

이처럼 완도가 강진에 딸린 지역으로 남게 된 것은 앞서 언급한 해상왕 장보고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완도읍 장좌리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진 장보고는 당나라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 자리에 올랐으나 당나라 사람들이 서해 연산을 침범하여 신라 사람들을 납치한 뒤 노예로 판다는 사실을 알고 분개하여 벼슬을 내놓고 신라로 되돌아왔다. 그는 임금의 허락을 얻어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청해진, 즉 지금의 완도읍 장좌리에 진을 친 뒤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들을 소탕했다. 장보고는 그 뒤 당과 일본의 무역문화교류 등을 독점하게 되면서 해상왕국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의 성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곧이어 장보고는 현실정치에 휘말리게 된다.

청해진이 중국과 일본의 중간지점에 자리 잡은 점을 이용하여 일본에 무역사절을 파견하는가 하면, 당나라에도 무역사절인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어 이른바 삼각무역을 일으켰다. 이처럼 큰 힘을 갖게 된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아내로 삼게 하려다 조정과 군신들의 반대로 실패하자 불만을 품고 반란을 꾀하다가 도리어 문성왕 8(846)에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의 칼에 맞아 죽었다.

워낙 세력을 떨치던 사람을 죽인 뒤라 신라 조정에서는 그 부하들이 난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완도에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막았다. 851년에는 이곳에 살던 모든 사람들을 전라도 북쪽 벽골군(지금의 김제군)으로 옮겨 살도록 명령하였다. 그때부터 500년에 걸쳐 완도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섬에는 동백나무황칠나무비자나무후박나무가 울창하게 자라났고 그 사이로는 사슴노루고라멧돼지 같은 야생동물들이 마음껏 뛰어다녔다.

지금도 이곳 완도에는 장보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장좌리 서쪽에는 장보고가 돌을 던져 맞추었다는 복바위가 있으며, 장보고의 가족들의 무덤이라는 장보네 묘’, 장보고가 지었다는 법화사터등이 지금도 남아 있다.

다시 완도에 사람이 들어와 살게 된 것은 고려 공민왕 때인 1351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지금의 완도군에 드는 완도와 그 밖의 여러 섬은 갈래갈래 나뉘어 강진군이나 장흥군해남군영암군 같은 뭍 지방에 들어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완도는 남쪽 바다에 자리 잡고 있어 조정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여 이 섬의 사람들은 당연히 ?結?지방 사람들의 간섭과 구속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완도라는 이름에 대해 풀과 나무가 무성한 것이 왕골풀과 같다고 하여 완도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한편 우리들이 즐겨먹는 김(해태)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완도에서 처음 재배를 한 뒤 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