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부산 오륙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해파랑길>을 걷다. 일광리에서 울산까지_

산중산담 2017. 4. 10. 14:57

 

부산 오륙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해파랑길>을 걷다.-그 두 번째 일광리에서 울산까지_

-그 두 번째 일광리에서 울산까지_

2017년에 진행하는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의 정기답사인 해파랑 길 그 첫 번째 행사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함께 그 길을 걸은 도반들께 감사드립니다. 두 번째 행사가 324일부터 26일까지 넷째 주말에 실시됩니다. 임랑 해수욕장에서 나라에서 제일 먼저 해가 뜨는 간절곶과 처용암, 그리고 울산의 십리대숲, 울산의 대왕암을 거쳐 박제상의 설화를 안고 있는 치술령까지 이어질 이번 답사에 참여를 바랍니다.

동해는 염도가 다른 바닷물이 해류를 따라 서로 엇걸리고 섞이는 특징을 보인다. 그런 연유로 강원도 연안은 바닷물의 온도, 염도, 맑기가 다양하여 그 만큼 다양한 생태군, 어종들이 존재하는 어장이다. 동해에서 잡어들이 철 따라서 잡히는 것도 이러한 해류의 특수성 때문이다.

일광면 소재지가 있는 삼성리에는 포은선생 유촉비가 세워져 있는데, 고려 말의 문장가이자 충신인 포은 정몽주鄭夢周 선생께서 다녀가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31번 일반도로를 따라 이천교를 지나 서북쪽에서 화전리로 가다보면 망할곡이라는 고개를 만나는데, 이곳에서 살다가는 망한다는 유래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니……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의 소리가 들린다.”

바닷가 길을 따라가는 도보답사는 전혀 지루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청량한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파도 소리, 멀리 수평선 너머로 오고가는 배들을 바라보노라면 평소 잊고 있던 시문마저 떠올라 마음을 흔들어대니 그 설레임이란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고리 원자력 부근 바다 위로 해가 떠오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햇살이 눈부시다. 신동엽 시인은 누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고 하였는데......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 그 아래 파도가 드세다. 끓어오르듯 넘치는 바다, 다시 출발인데 슬그머니 걱정이 앞선다. 매일 매순간 동쪽 바다를 향해 시선을 두고 걷다보면, 어쩌면 동해트레일을 마칠 즈음이면 우리 눈도 우측으로 돌아가 있지는 않을까? 쓸데없는 내 생각과 관계없이 일행들은 설레임의 열기가 설풋 오른 상기된 표정들로 밝은 얼굴이다. 아침 도보답사를 시작하기 전, 우리의 설레임을 영국의 소설가이며, 여행작가인 스티븐슨의 <도보여행>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도보여행 중의 경치란 한낱 악세사리에 불과하다. 여행의 참된 멋은 경치를 찾아나서는 게 아니라, 즐거운 기분 아침 출발할 때의 희망과 의욕, 저녁에 휴식할 때의 평화와 정신적 충만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다. 배낭을 어깨에 멜때, 혹은 벗을 때, 그 어느 쪽이 더 기쁜지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떠날 때의 마음 설레임이 곧 도착할 때의 흥분의 열쇠가 된다. 여행 중 하는 일은 무엇이건 보람이 있지만, 그 보람은 다시 다른 보람을 낳게 하여, 기쁨은 기쁨으로만 이어져서 끝이 없다.

월내리로 접어든다. 무릉골 북쪽에 칼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칼돌비알산이라 부르는 산이, 그리고 마당듬 서쪽으로 갈매기가 똥을 싸서 하얗게 보인다는 힌골머리 또는 신덜머리바위가 있다.“

나사 등대를 지나는 길에 바다 바람이 드세다. 날아갈 듯한 바람을 맞으며 걷다, 문득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떠돈다.(風打浪打)”는 옛 속담이 마치 지금의 우리 모습을 예측하고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실소를 터트린다. 평동마을 지나 간절곳 등대가 있는 울산시 서생면 대송大松리에 도착한다.

동해안에서 몇 곳 안에 드는 돌출지로 알려진 이곳 간절곶은 우리나라에서 일출 시간이 가장 빠르다고 알려지면서 새해 해맞이를 하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비는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무섭게 부는 바람 탓인지 한적하다.“

진하해수욕장을 지나다

울산 서생포영 아래쪽에 위치한 진하리鎭下里의 진하해수욕장, 거세게 일어났던 파도가 부서지며 토해 내는 겨울 바다의 포효, 그 소리에 귀도 가슴도 먹먹해진 우리 일행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 성난 파도에 괴테의 <파우스트> 한 부분이 실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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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은 먼 바다 쪽으로 향해 있었다. 먼 바다는 자기 자신 위에 겹겹이 쌓이려 부풀어 오르고, 이어서 체념을 하고, 넓은 해변 가를 괴롭히기 위해 출렁이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열광케 하는 피의 움직임에 의해서 오만함이 모든 권리를 어떻게 자극하는가를 보며 나는 노여워하고 있었다. 나는 우연처럼, 눈길을 날카롭게 했다. 밀물은 멈춰서고, 뒤쪽으로 굴러 떨어지며, 뽐내듯이 그것이 닿아있던 대상(해변가)에서 멀어져 가는 것이었다.....불모不毛, 그 자체인 밀물은 모든 해변에 불모를 퍼뜨리기 위해, 기면서 다가와 부풀어 오르고 커지며 굴러 떨어져, 황량한 바닷가의 거대한 넓이를 덮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공해의 온상이라는 별칭마저 받으며, 한 때 온 나라를 공포로 술렁이게 만들었던 온산공단의 공해는 이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져 가고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기억하는 나그네에게 그 길을 걷기란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쉽게 떨치지 못해 주저하게 하는 일이어서 결국 잰걸음질로 내달리듯 통과하였다.

처용암이 있는 처용리

온산공단을 지나자 신라 향가인 <처용가>의 고장, 처용리이다. 신라 시대 바다 가운데서 처용이 올라왔다는 처용암이 있는 곳. 보내 처용은 바다를 건너온 서역 사람이라고 한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앞선 문명을 자랑하던 서역과 신라 사이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들어오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한 예로 흥덕왕릉이나 괘릉의 무인석을 들기도 하는데, 무인석의 눈이 깊숙하고 코가 우뚝한데다 곱슬머리까지 생동감있게 조각하여 마치 서역인의 형상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장생포 고래 ; 고래사냥을 꿈꾸는 자, 떠나라

장생포는 조선후기까지만 해도 한적한 어촌이었으나, 일본 사람들이 고래 등 동해 고기잡이 전진기지로 활용하면서 사람들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고래잡이가 시작된 것은 1899. 구한말 조정에서 러시아 사람이 포경 특허권을 얻어 시작하여, 고래 고기를 즐기는 일본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해방 뒤에는 지역 사람들에게 넘어가 지역 경제에 큰 기여를 하였다. 칠십 년대 말만 해도 3월부터 11월말까지 한 해에 밍크고래 천 마리와 참 고래 40마리를 잡았다는데, 지금은 포경조약으로 고래잡이를 금하고 있다.

부위에 따라 열두 가지 서로 다른 맛이 난다는 고래 고기. 그 맛을 제대로 즐기려는 사람들은 육회를 즐겨 먹는데, 그 빛깔이 소고기 육회와 비슷하여 먹는 방법까지 같다고 한다. 다만 육질이 너무 부드러워 입에서 슬슬 녹을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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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를 배경으로 <백경>을 지은 허만 멜빌은 책을 쓰기 위해 4년 동안 포경선을 탔다. 그렇듯 오랜 인고의 세월을 거쳐 탈고한 그의 소설은 오늘도 여전히 소설의 고전이라는 명예를 누리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소설에서 우리는 고래의 생리에서부터 고래 고기 맛에 대해서까지 읽을 수 있는데, 그는 고래 고기 가운데 맛의 백미로 혓바닥 고기를 꼽았다. 그 당시는 고기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향유를 채취하기 위하여 고래를 잡았기 때문에, 향유고래에서 기름과 혀만 채취하고는 모두 버렸다고 한다. 소설의 내용을 보면 큰 향유고래 한 마리에서 채취할 수 있는 기름의 양이 50드럼 정도에 이른다고 하니, 고래의 크기는 우리의 상상을 벗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라의 동력 울산공업단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공업단지로 지정되어 개발된 도시 울산, 그곳이 산업 물류비 절감효과가 뛰어나기도 하고, 근처 태화강에서 공업용수를 조달하기가 용이하다는 것이 이유가 되었다. 뿐만아니라 울산은 휴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여 유사시를 대비할 수 있다는 것도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울산은 현대 현대조선과 현대 자동차, 정유 화학. 합섬 같은 기업이 밀집되어 있는, 말 그대로 현대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현대 영향력이 큰 지역이다.

“4천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 숙원의 부귀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여기에 신 공업단지를 마련하기로 하였습니다. (중략)이것은 민족중흥의 터전을 닦는 것이며, 국가 백년대계의 보고를 마련하려는 것이니 자손만대의 번영을 약속하는 민족적 궐기인 것입니다.“

19622월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에서 박정희대통령이 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전후 대한민국 어느 지역이 그렇지 않겠냐마는 울산은 특히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실감나는 지역이다.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상징적인 투자 사업으로 한적한 작은 소도시였던 울산은 대대적인 변화를 맞은 것이다.“

박제상에 얽힌 이야기

이제 우리의 발길은 울산광역시의 마지막 마을인 북구 신명동에 이른다. 이 지역은 신라 시대 박제상朴堤上에 관한 전설이 남아있다.

신라 눌지왕에게는 두 동생이 있었는데, 하나는 고구려에 하나는 일본에 볼모로 붙잡혀 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임금은 지모가 뛰어난 신하 박제상에게 볼모로 잡혀간 동생을 구해오도록 명령하였다. 박제상은 먼저 고구려로 건너가 고구려 임금과 담판을 지어 임금 동생을 귀환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고구려와 달랐다. 일본을 갔다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박제상은 아내와 두 딸에게 알리지 않고 율포 바닷가인 강동면 구류리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그의 아내가 울며불며 율포 백사장으로 달려갔으나 그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와 딸들은 율포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산마루(치술령(765.4))에 올라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렸으나, 그가 끝내 돌아오지 않자 높은 바위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렇게 뛰어내린 그들은 전설의 새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의 아내는 치조라는 새가 되고 딸은 술조라는 새가 되어 날아갔다고 한다. 그들이 매일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박제상을 기다렸다는 경북 경주시 외동읍 내남면과 경상남도의 경계지점에 있는 산마루가 치술령이다. 그리고 모녀가 서서 기다렸다고 알려져있는 망부석이 있다. 그리고 치술조, 새들이 날아가 숨은 바위가 은을암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재상이 떠나갈 때에 그 부인이 이 말을 듣고 좇아갔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만덕사 대문 남쪽 모래밭 위에 이르자 나가 넘어져 목을 길게 놓고 울었으니, 이 때문에 이 모래밭을 장사(長沙. 긴 모래밭)라고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그의 양쪽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돌아오려는데, 부인이 다리를 퍼뜨리고 앉아 일어서지 않으므로 그 땅 이름을 벌지지伐知旨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부인이 못 견딜 만큼 그 남편을 사모하여 딸 셋을 데리고 치술령鴙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다보고 통곡을 하다가 죽었다. 이래서 치술신모鴙述神母가 되었으니 지금도 이곳에는 당집이 있다.”(삼국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