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고창으로 가서 봄날을 노래하며 고창의 문화유산에 취하다.

산중산담 2017. 7. 24. 14:38

 

고창으로 가서 봄날을 노래하며 고창의 문화유산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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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아침이었네. 그가 와서 가자고 했네.

이마에는 해와 달이 부딪쳐 울고 안개 사이로

나무들의 연한 발목이 끊어질 것 같았네. 그가 가자고

가자고 졸랐네.“

이성복 시인의 시가 문득 떠올라, 하루기행을 준비합니다.

봄날, 무르익은 봄날, 고창을 안가면 한 해가 제대로 가지 않을 것 같은 조바심,

그래서 고창으로 갑니다.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 중의 하나인

고창읍성과 무장읍성, 그리고 판소리 다섯마당을 집대성한 신재효의 생가,

도산리의 북방식 고인돌, 그리고 10만평의 너른 곳에 펼쳐진 유채꽃과

보리밭의 향연, 고인돌 무리와 운곡 습지,

그리고 서정주 시인의 시의 무대인 질마재가 우리가 가야할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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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학자이며 전라감사를 지냈던 이서구가 지었다고 전해지는호남가??/span>고창성 높이 앉아 나주 풍경을 바라보니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고창성을 이 고장 사람들은 모양성이라고 부른다. 해미읍성, 낙안읍성과 더불어 나라 안에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모양성은 단종 1(1453)에 세워졌다고도 하고 숙종 때에 이항이 주민의 힘을 빌려 8년간에 걸쳐 쌓았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성벽에 새겨진 글자 가운데 계유년에 쌓았다는 글자가 남아있으며동국여지승람둘레가 3008척 높이가 12척이고 성내에 3개의 연못과 세 개의 하청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이 성종 17년에 발간되었기 때문에 그 전에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고창성은 여자들의 성벽 밟기로 유명한데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의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게 되며 세 바퀴를 돌면 저승길이 환히 보며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윤삼월이 가장 효험이 좋고 초엿새 열엿새 그물엿새 등에 성 밟기를 하기 위해 도처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지금은 가을에 열리는 고창 모양성 축제 때에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의 높이가 만만치 않아 떨어지면 불상사를 입는다. 그 예가 오래 전에산골소녀 옥진이 시집이라는 시집을 펴냈던 김옥진씨는 고창여고 재학 중 성 밟기 중에 떨어져 반신불수가 되어 시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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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성에는 봄 햇살만 남아있고

모양성 바로 입구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초가집 한 채가 있다. 그 집이 판소리 여섯 마당 중춘향가,심청가,흥보가,적벽가,변강쇠가등의 판소리 이론을 정립한 신재효의 집이다. 그 자신이동리가에서 시내 위에 정자 짓고 / 정자 곁에 포도 시렁 포도 곁에 연못이라........”했던 것처럼 그는 본래 광대 노릇을 한 사람이 아니었고 재산이 넉넉한 양반이었는데 풍류를 즐기는 성품을 타고나서 판소리와 함께 민속음악들은 연구하고 체계화시키는데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신재효는 집안에 노래 청을 만든 다음 수많은 명창들과 교류를 나누었고 김세종, 정춘풍, 진채선, 허금과 같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신재효와 진채선 사이에는 애틋한 이야기가 한 토막 전해진다.

고종 4년에 경복궁景福宮이 세워지자 경회루慶會樓에서 축하잔치가 벌어졌다. 그 자리에서 진채선이방아타령을 불러 이름을 날리게 되자 대원군大院君은 진채선을 포함한 기생 두 명을 운현궁으로 데려간 다음 대령 기생으로 묵어 두었다. 갔다가 금세 돌아올 줄 알았던 진채선이 돌아오지를 않자 외로움을 느낀 신재효는 그 외로움을도리화가라는 노래로 엮어 진채선에게 보냈다.

그때 신재효의 나이는 59세였고 진채선의 나이는 스물넷이었다. 진채선의 추천으로 대원군에게 오위장이라는 벼슬을 받은 그는 1876년에는 흉년이 들어 사람들을 도와준 공으로 통정대부를 받기도 하였다. 신재효는 판소리 여섯 마당의 사설뿐만이 아니라도리화가,광대가,오십가,어부사,방아타령,괘씸한 양국 놈가같은 풍부한 표현력으로 분명하고 완벽한 사설을 정리한 한국의 세익스피어라고도 하고 한편에서는 그가 정리한 판소리 사설이 지나치게 한 문투로 만들어져 민중적이고 토속적인 판소리의 맛을 크게 줄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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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은 올망졸망 끝없이 펼쳐지고 차는 도산리에 도착한다. 북방식 고인돌 가운데에 가장 남쪽에 있는 도선리 고인돌은 민가몸채 뒤에 홀로 서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대나무 숲이 둘러싸인 장독대 한 켠에 또 다른 장식물처럼 서있었는데 장독대는 사라지고 그 자리엔 잔디밭이 깔려서 왠지 모를 어색한 풍경으로 변해 버려 쓸쓸함을 금할 수 없다. 그대로 두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이고 올바른 보존법인 것을 행정관료 들이 언제쯤 알게 될까? 원래는 4면을 판석을 세워 막은 뒤 그 위에 뚜껑을 얹었을 것이지만 두 개의 막은 벽은 없어지고 2매의 판석 위에 뚜껑들이 얹힌 도선리 고인돌의 뚜껑돌의 길이는 3.5m이고 폭은 3.1m, 두께는 3038cm쯤 되며 밑을 받치고 서있는 두 개의 받침돌은 높이가 1.8m쯤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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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에 고창성이 있고, 또 하나 남아 있는 성이 무장성이다.

갑오년 당시에는 무장도 고창처럼 독립된 현이었고, 무장국민학교 역시 고부와 마찬가지로 무장관아였다. 옛 모습 그대로의 객사와 동헌이 부조화를 이룬 채 학교건물 속에 끼어 있다가 몇 년 전에 옮겨 가고 지금은 옛 모습을 되찾았다.

아이들이 아침저녁 오고갔던 운동장 옆에는 무장을 거쳐간 현감 군수들의 가짜 선정비가 스무 개쯤 줄지어 서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며 느티나무들은 그날의 역사를 가감없이 지켜보았으리라. 무장국민학교의 정문 역할을 하는 진무루에서 동학년의 역사를 찍었다.

무장은 금구 원평과 더불어 동학의 세력이 가장 강한 지역이었다. 그것은 인근의 여러 고을에서 까지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손화중이라는 접주가 거기에 있었던 까닭이다. 프랑스의 한 선교사가 사진을 보고 만들었다는 판화 속에서 손화중은 팔짱을 낀 채 넌지시 웃고 있다. 그를 감시하는 병사도 아랫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웃고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과 그를 지켜보고 있는 각기 ?摸?두사람의 웃음 속에 우리 민족의 비극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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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름다운 읍성 두 곳과, 청 보리밭, 도산리 고인돌, 그리고 서정주 시인의 문학에 취하게 될 기행에 참여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