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새로 세워진 망양정에서 망양정의 역사를 회고하다.

산중산담 2017. 7. 24. 16:41

 

새로 세워진 망양정에서 망양정의 역사를 회고하다.

 

이박 삼일 간 정기기행 해파랑 길을 답사하고 돌아오는 길,

보은에서부터 억수처럼 비가 퍼부었다.

문의에서 서울로 가는 도반들을 내려주고,

대전 거쳐 논산으로 오던 길에 유리창을 덮을 듯 내리던 비가

논산 지나며 멎었다.

비를 맞으며 잠시 걸었던 여정. 더 내리길 기원했던 비가

답사 끝내고 가는 길에 내리다니, 이것은 신기한 일인가,

노상 일어나는 일인가, 모두가 날씨 탓이고,

인간은 그 자연의 섭리에 따를 뿐인데 가끔씩 신기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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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팔경 중의 한 곳인 망양정이 조선 시대 옛터에 세워져 있었고,

나는 그 정자에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었다.

그 때 8.9년 전에 경북도와 이런 저런 일들을 할 때,

19세기에 지금의 근남면 산포리로 옮겨지으면서 사라진

망양정을 옛날 그 터에 복원해 줄 것을 건의했었고,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 자리에 날아갈 듯한 망양정이 복원되었으니, 이 얼마나

신기하고도 고마운 일인가?

나는 2010년에 펴낸 <둥해 바닷가 길을 걷다>의 책에

망양정 부근을 다음과 같이 썼었다.

빈터만 남은 관동팔경 그 복원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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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면 망양리 망양정, 이제 정자는 사라진 빈터에 망양적 표적으로 세운 비석과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 그곳에서 바다를 본다. 거세게 일어났다 스러지는 파도소리가 가슴을 후려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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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이곳 망양정에 올랐던 이산해의 시문으로 그 아쉬움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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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양정

바다를 낀 높은 전정자 전망이 탁 트여

올라가 보면 가슴 속이 후련히 씻기지

긴 바람이 환혼의 달을 불어 올리면

황금 궁궐이 옥거울 속에 영롱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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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자취가 서린 이곳 평해군 기성면 망양리 앞 모래사장 가에 있던 망양정은 조선 세종 시절에 이르러 평해군수 채신보가 오래되어 스러져가는 정자를 고을 남쪽 현종산 기슭로 옮겨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중종 시대에 안렴사 윤희인이 평해군수 김세우에게 명하여 중수하였으나 그 또한 오래되어 쇠락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근남면 산포리로 망양정이 옮겨가면서 이곳에는 표적으로 세운 비석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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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번 보는 것이 한번 걷는 것보다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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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곳에 있던 망양정을 두고 조선시대 정국공신이었던 채수는 우리나라를 봉래 방장과 같은 산수 좋은 신선의 고장이라 하는데, 그 중에서 관동이 제일이며 이곳의 누대를 백으로 헤아리지만 망양정이 으뜸.’이라고 극찬하였다. 아마도 망양정이 이름 그대로 바다를 전망하기 좋은 승지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리라.

옛말에 백번 보는 것이 한번 걷는 것보다 못하다(百見不如一步)”라는 말이 있다. 그 곳을 가보지 않고 가본 사람에게 그 경치를 전해 듣거나 또는 그림을 보고 그곳의 경치를 감상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언변이 좋은 사람이 백번 설명해도 한 번 걸어서 가본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먼 곳을 아무나 가볼 수는 없었고 마찬가지로 임금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임금들은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를 시켜서 그 그림을 그려가지고 오게 하였다.

조선 후기 들어서는 숙종 임금이 강원도 관찰사에게 관동팔경을 그림으로 그려 오라고 명한 뒤 그 그림을 두루 감상하였다. 그 뒤 관동의 여덟가지 경치 중 망양정이 가장 아름답다며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친필 편액을 내렸다고 한다.

그 또한 그려온 그림이 좋았던 탓도 있겠지만 탁 트인 망양정 앞으로 펼쳐진 풍광이 그만큼 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정조임금도 시를 읊어 그 경치를 찬양하였고, 매월당 김시습도 이곳을 찾아 시를 지었다. 조선 초기 학자 서거정도 평해 팔영의 하나로 망양정을 꼽았다.

선조 시대 송강 정철이 노래한 시문을 통해 망양정의 풍취를 가슴에 담아보자.

하늘 끝을 끝내 보지 못해 망양정에 오른 말이,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 인고,

가득 노한 고래 누가 놀래기에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이 구는 지고.

온 산을 깎아내어 천지사방에 내리는 듯 오월 장천에 백설은 무슨 일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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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망양정 아래 임의대臨狋臺가 있어 바닷물이 출렁대는 암석에 수십 명이 앉아 놀았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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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연을 지닌 망양정을 바라보며 수많은 옛 성인들을 떠올렸지만 이미 가고 없는 사람들이고, 파도는 그 자리에서 철썩, 철썩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있었다.

생겨나는 것은 무엇이며, 사라져 가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그 망양정 터 아래 세워진 작은 정자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가고 오는 세월을 회고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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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 누구이며, 훗날 이 자리를 찾아 지나가며

그 옛 사람들을 회고할 사람은 또 누구일지,

돌아오는 길에 내가 걸었던 길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그 또한 이미 추억이 되어 가슴 속에 남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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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10일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