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청평사와 춘천지역의 옛길을 걷다.
더위가 한 풀 꺾인 8월 19일, 토요일. 춘천지역을 답사합니다. 호반의 도시 춘천에서 소양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만나는 산이 오봉산이라고 불리는 청평산이고. 그 청평산에 청평사라는 옛 절이 있습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청평사를 답사 한 뒤 의암호, 그리고 <동백꽃>의 작가인 김유정의 생가를 거닐다 돌아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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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호가 완공되고서 사람들에게 관광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된 청평사는 소양강 댐의 초입북쪽에 솟아있는 오봉산 남쪽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춘천시 동북쪽 동면 월곡리와 신북면 천전리 사이를 흐르는 북한강 지류를 막고 소양계곡을 가로질러 만든 소양강 댐은 높이가 무려 123m, 길이가 530m나 되어 동양 최대의 다목적 댐으로서의 위용을 자랑하며 년간 61,000Kw의 발전을 하는 한편 홍수를 조정하면서 농공업 용수를 공급한다. 이 댐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호수 소양호는 연간 일백만 명쯤의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눈 코 뜰 새가 없다. 상류까지 64km에 이르는 뱃길도 뱃길이지만 춘천에서 인제까지의 43.2km의 아름다운 계곡 사이를 헤집고 가는 뱃길은 가을단풍이 들 무렵이면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인 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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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청평산(淸平山))은 전라도 순창출신 여암 신경준이 쓴 산경표에서 보면 백두대간이 금강산에서 설악산으로 내려오다 향로봉쪽으로 뻗어내려 양구의 사명산을 세우고 소양강과 화천강이 한 몸이 되어 북한강으로 합류하는 그 들목에 있는 산이다. 이름이 아름다운 청평산을 70년대에 이고장의 산악인들이 다섯 봉우리가 열 지어 섰다는 이유로 오봉산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어떤 지도나 문헌들을 다 찾아보아도 한결 같이 청평산으로 나와 있다.
동국여지지도, 대동여지전도,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산경표 또는 작자가 불분명한 여러 지도들에도 청평산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단하나 동국여지승람에는 청평산이란 이름 이외에 경원산으로로도 부른다고 하였다.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도 있듯이 지금이라도 아름다운 옛 이름인 청평산으로 되찾아 주어야 할 것인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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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지나자 내리막길이다. 조선 소나무들이 제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듯 여기저기 솟아있고 바위들의 숲길이 연이어 나타난다. 좁은 바위 틈새를 비집고 내려간다. 이곳 역시 달마산 처럼 뚱뚱한 사람은 도저히 지나지 못할 것 같은데도 중년의 뚱뚱한 등산객들이 잘도 지나간다. 길은 항상 여러 갈래다. 청평사 천단과 청평사 해탈문의 갈림길에서 오르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을 선택한다. 밧줄을 꼭 잡고 바윗길을 내려서면서 길은 더욱 가파르다. 한 걸음 한걸음 내디딜 다 행여 바위가 굴러 내릴세라. 비탈진 길을 조심조심 내려가 바위 위를 흐르는 물에 얼굴 씻고 물을 마신다. 오봉산 오백년 묵은 산삼이 썩어서 흐르는 물인 듯 물맛이 여간 맛있는 물이 아니다. 개울물은 수풀 우거진 숲속을 졸졸졸 흐른다. 골짜기 하나가 더 합쳐질 때마다 물소리는 더욱 요란해지고 그 합창 소리가 하늘을 뚫을 듯 커지면 어느새 강물이 되고 강물은 도도히 바다로 빠져들 것이다. 개울을 따라 내려가서 첫 번 째 만나게 되는 청평사 해탈문 앞의 바위에 앉아 아직 내려오지 않은 일행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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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현이 은거한 절
이름이 아름다운 절 청평사는 소양강댐의 북쪽에 솟은 청평산(오봉산) 자락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 진덕여왕 때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대체로는 고려광종 24년 (973)승현선사가 개창하면서 백암선원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산선문이 한창이던 시절의 참선도량이었을 이절은 그 뒤 폐사가 되었다가 고려 문종 22(1068)년에 춘주감창사春州監倉使로 있던 이의李顗가 경운산慶雲山의 빼어난 경치에 감탄하고 폐사지에 절을 지어 보현원이라 하였다. 그 뒤 이의의 장남 이자현李資玄이 1089년(선종9)에 벼슬을 버리고 이절에 은거하자 이산에 들끓던 호랑이와 이리떼들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산 이름을 “맑게 평정되었다”는 뜻의 청평산淸平山이라 하고 절 이름 역시 이자현이 두 번이나 친견하였다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이름을 따 문수원文殊院이라 하였다. 이자현은 전각과 견성見性, 양신養神 등 여러 암자를 만들며 청평산 골짜기 전체를 포괄하는 고려식의 정원을 만들었다. 원나라 태정왕후는 성징性澄, 윤견允堅등이 바친 경전을 이절에 보냈고 공민왕 16년에는 그 시대의 고승 나옹화상이 머물렀으며 조선 세조 때에는 매월당 김시습이 청평사에 서향원瑞香院을 짓고 오랫동안을 머물렀다.
아침 해 돋으려 새벽빛이 갈라지니
숲 안개 개이는 곳에 새들이 벗 부르네.
먼 산 푸른 빛 창을 열고 바라보니
이웃 절 종소리 산 너머 은은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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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이자현이 이산에 들어 문수원을 일구고 살면서 선열을 즐겼다. 골짜기 안이 그윽하기 짝이 없어 식암을 엮고, 그는 거기 둥글기가 따오기 알 같아 두 무릎을 갖다 넣기 알맞은 곳에 말없이 앉아 수개월을 드나들지 않았다.”고 적혀있고, 또한 성해응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도 이 절 안 팍 정경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절 앞의 서비西碑는 송나라 건염建炎 4년 김부식金富軾이 이자현의 일을 적은 탄연坦然스님이 글씨로 썼다. 동비東碑는 원나라 태정왕후가 그 태자를 위하여 이산에 불경을 소장하게 하여 복을 빌었으니, 그 일을 이익재가 글로 짓고 이행촌李杏村이 글씨를 썼다. 절 남쪽 골짜기에 세향원細香院이 있으니 청한자淸寒子가 살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없다. 절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서천西川이 있으니, 굳고 매끄러운 반석에 맑은 시냇물이 띠를 드리운 듯 흐른다. 우러러 부용대芙蓉臺와 경운봉慶雲峯을 바라면 기이하기 짝이 없고, 바른편으로 6, 7리를 돌아들면 선동에 이르는데, 거기 작은 암자가 있다. 그 뒤 바위벼랑에 ‘청평식암淸平息庵’이라는 커다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더러 이자현의 글씨라 한다. 암자 뒤로 깎아지른 암벽이 아스라이 솟고 그 위를 송단松壇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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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산은 말이 없으나 만고에 전해진 책이요, 흐르는 물은 줄이 없으나 천년을 이어온 거문고라”
옛 한시(漢詩) 한 구절이 들려오는 듯한 길이 바로 청평산 길이다.
<신정일의 <사찰기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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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사 회전문을 바라보며 인생이 돌아가고 또 돌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싶은 분들의 참여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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