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동해 해파랑길 - 울진 망양정 옛터에서 나곡리까지

산중산담 2017. 7. 24. 16:40

 

부산 오륙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해파랑길>을 걷다.-그 일곱 번째 울진 망양정 옛터에서 울진군 북면

부산 오륙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해파랑길>을 걷다.

-그 일곱 번째 울진 망양정 옛터에서 나곡리까지

<!--[if !supportEmptyParas]--> <!--[endif]-->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2017년의 정기기행 그 일곱 번째가 여름 휴가가 끝난 8월 넷째 주인 825()일에서 27()일까지 23일간에 걸쳐 실시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기성면과 원남면 사이에 위치하여 바다 전망이 좋은 망양정휴게소에서 커피 한잔을 마신다. 도로 변에 위치하여 집을 떠나온 노객들이 잠시 쉬어가는 휴게소나 슈퍼마켓, 마치 그 옛날 주막을 찾던 길손의 마음으로 들어섰으나 지친 심신을 위로하던 주모도 없고 군불로 달군 뜨끈한 아랫목도 없으니 쓸쓸함이 더욱 깊어진다.

길은 덕신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경주 154키로, 포항은 104키로, 평해 24키로 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조선시대에 역이 있던 덕신리

해가 부상扶桑에서 떠서 두 장대나 올라왔는데, 한쪽에는 북두칠성이 아직도 비꼈네.

바람에 갈리고 비에 씻겼으니, 털끝도 깨끗하고, 안개 흩어지고 구름 걷혔으니 안계眼界도 넓구나.

혼자 생각해도 우스운 일, 세상물정은 바닷 속처럼 알길 없는데, 학술을 가르침은 물결 볼 줄 알겠네.

분분하게 남쪽 북쪽에 오가는 사신 많은데, 이곳은 보통 역사驛舍로 보지 말게나.”

이곡李穀이 시로 노래한 덕신역이 있던 지역, 덕신리이다.

덕신리에서 917번 지방도를 따라가니 선박 몇 척이 정박되어 있는 오산항이 보인다. 이곳에서 산포리로 이어지는 바닷길은 차량소통이 적고 한가로워 여유로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한창 때는 다시 오지 않고, 하루 새벽을 두 번 맞기는 어려워라盛年不重來, 一日難再晨

맞는 말이다. 그런데도 지난해에 이어 오늘 또 이곳에서 아침을 맞이했으니 특별한 인연이리라. 일행과 오늘 걷게 될 경로를 상의 한다. “아침에 고치고 저녁에 바꾼다.”는 한서漢書 구절이 일상에 들어맞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미리 점검하고 떠난다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른 아침을 먹고 다시 바다를 바라보며 길 위에 선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신포리에서 신 망양정에 오르다

산포리 바닷가 후리마을 북쪽으로 두 개의 산 봉우리가 솟아 있고 그 아래로 왕피천王避川이 흘러 동해바다로 들어가는 곳, 그곳 산모퉁이에 현재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는 망양정이 있다.

원래 기성면 망양리에 있던 망양정이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세워지기는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고종 19년인 1883년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임학영林鶴英과 더불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으나, 곧 바로 허물어져 주춧돌만 남게 되었는데 19598월 강원도와 울진교육청이 협력하여 다시 세웠다. 그러나 숙종 임금 친필 편액은 울진군 읍내리 객사客舍 동대청에 보관하다가 분실하였다하니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말머리 관동關東땅에 길이 다하려 하는데, 기이한 경치 눈을 스치고는 이어 없어지네. 한 등불 옛 여관에, 강에 잇따른 비 뿌리고, 9월 달 황량한 성에 낙엽 지는 바람이네. 적막한 옛 친구 피리소리 듣고 어긋나는 세상 일 누대에 의지해 섰네. 몇 사람이 세상에서 맑은 놀이 그리워 고기는 깊은 못에 있고 학은 장에 있다네.”

고려 말 문장가 이곡李穀이 이렇게 노래한 울진을 통일신라 시대 김유신은 산림이 울창하고 바다에 이어져 진귀한 물산이 풍부하다고 감탄하였다. 그래서 지어진 이름이 울진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연꽃 연못을 이룬 고성 늪

내봉골에 연호蓮湖라는 그리 크지 않은 연못이 있다. 원래는 둘레가 10리를 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메워진 상태이다. 원래 옛날 고씨들의 집성촌이 늪으로 변화된 곳이라 고성 늪이라 불리웠던 이곳은 둘레가 10리를 넘어설 정도였다고 한다. 이제는 늪도 상당히 메워진데다 연꽃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어 연호 또는 연지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연호 북쪽 송림사이에 있는 정자, 연호정蓮湖亭조선 고종 27년인 1890년에 울진현감 박영朴永善이 처음 세우고 향원정香遠亭이라고 불렀으나 세월이 흐르며 정자가 허물어지자 19227월에 임경필林敬弼이라는 사람이 울진군수 이기원李起遠의 협조를 받아 읍내리에 있던 객사 건물을 옮겨 정자로 개축하고 연호정이라고 개칭하였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죽진동과 대나리는 바다는 이어져 있으나 그 바다를 따라 걸을 길은 없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양정동에서 죽변방향으로 해변을 따라 걸을 수 있다. 온양 마을을 지나니 양정해수욕장이 펼쳐지고 곧바로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리고 이곳 죽변면 봉평리에 울진 봉평신라비 (蔚珍鳳坪新羅碑)가 있다. 1988114일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어 봉평비라고 불리는 이 비는 신라 법흥왕 11년인 524년에 세워졌던 것이나,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다 세상 빛을 본지 얼마 되지 않는다.

19881월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2리 논에서 객토(客土)작업을 하던 중에 장대석 하나가 발굴되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포크레인으로 옮겨서 밑에 버렸다. 그것을 봉평마을 이장 권대선씨가 지나다가 돌모양이 보기 좋아 정원석으로 쓸 요량으로 자세히 살펴보다가 장대석 한쪽으로 희미하게 새겨진 글씨를 발견하였다. 뭔가 심상치 않?鳴? 생각한 그는 마을 노인들에게 물어보고 군 공보실에 연락했다. 하지만 누군가 낙서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그 뒤 군 문화계장과 향토사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단순한 장대석이 아니라 신라 법흥왕 11년에 세워진 비석임이 밝혀졌다.

변성화강암(變成花崗岩)으로 만들어진 이 비도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나 신라 진흥왕 순수비처럼 자연석을 거의 그대로 이용하였다. 비록 그 재질이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보니 비교적 원래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시누대 사이로 풍경이 아름다운 죽변

대나무가 많은 바닷가 또는 대숲 끄트머리 마을이라 하여 죽빈이라고 하였던 곳, 울릉도와 가장 직선거리에 놓여 한 때는 포경선들이 줄을 섰던 곳, 지금도 동해안에서 제법 규모가 큰 항구로 울진대게와 오징어, 정어리 꽁치. 명태잡이로 유명한 곳, 죽변이다.

과거 포경지임을 알리듯 죽변초등학교 교문은 고래 턱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죽변 동쪽 바닷가에 해방 뒤에 개장되었다는 죽변장이 있어 3일과 8일이면 해산물 거래가 활발했다 한다.

죽변 동쪽 바닷가 산 위에 죽변등대가 있다. 등대 아래로는 송윤아가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2004년에 방영되었던 <폭풍 속으로>라는 드라마 세트장을 알리는 표지들이 서있다. 푸른 시누대가 흔들대는 풍경 속으로 드라마 제작지였던 작은 교회와 하얀 집 한 채 그리고 한적한 바다가 그림처럼 시야에 들어온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울진군 죽변면 죽변항에서 울릉도 도동항까지는 약 140킬로미터 거리에 있어, 맑은 날에는 울릉도에서 죽변항을 아슴푸레하게나마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지역은 현재 울진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 있어 더 이상 바닷가를 따라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동해트레일을 위해선 원전 관계자들과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송시열을 모신 옥계서원

해변을 벗어나 내륙으로 들어가는 길을 걷기란 팍팍하다. 파도소리도 들리지 않고 흰 모래사장도 없는 길. 죽변면 고목리 점성골 북쪽에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석당 김상정金相定을 모신 옥계서원玉溪書院의 유허비가 있다. 화성리 용장동에 있던 옥계서원이 철폐되자, 1941년 고목리에 살던 선비 전재유田在楢와 남상호南相鎬가 옥계서원의 뜻을 받들어 옥계강당을 짓고 글을 가르쳤는데, 그곳에 서원의 유허비를 세웠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곳에서 서쪽으로 8떨어진 곳에 수질이 좋기로 소문난 덕구온천 (德邱溫泉)이 있다.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北面) 덕구리(德邱里)에 있는 이 온천은 국내 유일의 약 알카리성 자연용출온천이다.

고려 말기에 활과 창을 잘 쓰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사냥꾼 수 십 명을 데리고 사냥을 하다가 발견하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때부터 인근 주민들이 온천 용출지에 석축을 쌓고 통나무로 집을 지어 간이욕장을 만들고 온천욕을 하였다고 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열두고개가 있는 십이령

덕구 온천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 만나는 울진군 북면 두천리는 십이령을 지나 소천 거쳐 서울로 가던 중요 길목이었다. 그 들목 마을 건너편에 <울진내성행상불망비蔚珍乃城行商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1890년 경 울진과 봉화를 왕래하며 어염해조류를 물물교환하는 방식으로 상행위를 하던 선질꾼들이 당시 봉화 내성에 살며 자신들의 최고 지위 격인 봉화출신 접장 정한조鄭韓祚와 안동출신 반수班首인 권재만權在萬의 도움에 감사하며 그 은공을 기리고자 세운 비이다. 그러한 연유로 이 지역 사람들은 이 비를 선질꾼비라고도 부른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고포리를 향해 돌아가는 길목에서 만난 고포리 휴게소, 그 앞으로는 차조차도 가뭄에 콩 나듯 지나갔다. 길이 어떻게 나는가에 따라 집안의 흥망이 결정되는 모습이다. 나곡 북쪽에 자리한 갈령葛嶺,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월천리로 이어지는 그 큰 고개를 사이에 두고 강원도와 경상북도가 나뉜다. 고개 밑으로 4차선이 뚫리면서 강원도와 경상도를 잇던 2차선 길은 그 기능을 잃었다. 이제는 30분에 차 한 대 지나갈까 하는 그 길에서 주유소를 만난다. 한 때는 성업을 이루었을 그 가게의 주인은 속마음이 오죽할까 싶다.

이곳 갈령재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태봉산에 161911월 광해군이 딸의 태를 묻고 세웠다는 비가 남아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경북의 마지막 마을 고포

숨 가쁘게 산길을 올랐다가 협곡처럼 휘도는 내리막 길을 따라가니 고포리姑浦里이다. 옛날 할머니 한분이 큰 난리를 피하여 아기를 업고 이곳에 들어왔다가 다시 떠나려 하였으나 배가 없어 떠나지 못하고 이곳을 개척하여 정착하였다고 하여 고포리라고 부른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을사년 음력 425일 러시아 배 두 척이 일본 배에 포위되어 쫓기다 한 척은 강원도 원덕읍 월천 앞바다에서 침몰되고 한 척은 동쪽으로 도망쳤는데, 그 무렵 이 마을로 어뢰가 떠내려 왔다고 한다. 그 어뢰를 구경하던 마을 주민들이 뇌관을 때려 폭파하면서 40여명이 몰살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바닷가에 자리 잡은 이곳 고포리는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도랑을 사이에 두고 경북과 강원도로 행정구역이 나뉜다. 그러다보니 각종 선거 때마다 경상도 울진 고포와 강원도 삼척 고포의 서로 다른 투표함을 두고 언론에 자주 회자되기도 하는 지역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아름다운 동해와 울울창창하게 우거진 울진의 비경을 따라 펼쳐지는 이번 행사는 여름이 지나간 바닷가를 바라보면서 걷는 행복한 답사로 진행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