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운주사에서 담양 금성산성을 지나 순창 강천산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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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셋째 주인 7월 14일에서 16일까지 화순 운주사와 나주 불회사. 그리고 세계문화유산인 화순 고인돌을 지나고, 담양의 배롱나무 꽃이 만발한 명옥한을 비롯 소쇄원을 답사합니다.
그리고 조용필의 노래 <간양록>의 무대인 담양의 금성산성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순창의 강천산으로 이어지는 답사를 실시합니다.“
휴가 철 이전에 답사하는 이번 여정은 길 위의 인문학의 정수를 맛보는 귀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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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천탑이 있는 화순의 운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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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 기슭에 위치한 운주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의 제 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서 나지막한 산속에 들어 앉아있다. 이 절 이름을 배(舟)자로 삼은 것은 중생은 물(水)이요 세계는 배(船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물방울 같은 중생이 모여 바다를 만들고 세계라는 배가 그 중생의 바다위에 비로소 뜨는 것이며 역사는 중생의 바다에 의해 떠밀려가는 것이라는 깊은 뜻이 운주사의 배(舟)자에는 숨겨져 있다고 한다. 창건당시 운주사의 명칭은 동국여지승람에는 운주사(雲住寺)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후 중생과 배의 관계를 의미하는 운주사(澐舟寺)로 바뀌었다가 다시 훗날에 그 두 가지를 섞어서 운주사(雲舟寺)로 전해왔다. 그러한 이름 탓이었는지 이절을 처음 지을 때 해남의 대둔산이며 영남의 월출산 그리고 진도와 완도, 보성만 일대의 수없이 많은 바위들이 우뚝우뚝 일어나 스스로 미륵불이 되기 위하여 이 천불산계곡으로 몰려왔다고 한다.
이 절의 창건 설화는 신라 때의 고승인 운주화상이 돌을 날라다 주는 신령스런 거북이의 도움을 받아 창건하였다는 설과 중국설화에 나오는 선녀인 마고할미가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운주화상이 천일기도를 하여 흙 같은 것으로 탑을 쌓았는데 탑이 천개가 완성된 다음 천동선녀로 변하여 불상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거의 똑같은 솜씨로 만든 돌부처들의 모습을 보아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만들었을 것이라는 설들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석공들이 석탑과 석불을 만들었던 연습장이었을 것이라는 허황한 설도 전해진다. 운주사를 지나 화순 고인돌을 걸어서 답사하고 담양에 이른다.
『택리지』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살만하고 경치가 빼어난 곳이 무등산 자락에 자리잡은 원효계곡 일대이다. 여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이룬 광주호 변에는 16세기 사림문화가 꽃을 피웠던 곳으로 식영정(息影亭), 소쇄원(瀟灑園), 환벽당(環碧堂), 취가정(醉歌亭), 독수정(獨守亭), 풍암정(풍암정楓巖亭) 등의 정자들이 있다.
기름진 들이 널따랗게 펼쳐진 담양에는 큰 지주가 많았고 그 경제력에 힘입어 봉건시대의 지식인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 그들은 중앙정계로 진출했다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이 곳에 터를 잡고 말년을 보내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광주호 상류 자미탄(紫薇灘)을 중심으로 호남가단(湖南歌壇)이 형성되었는데, 그들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16세기 조선사회를 뒤흔들었던 사화(士禍) 때문이었다.
전남 담양군 남면 지석리 광주댐 상류에 위치해 있는 소쇄원은 남쪽으로는 무등산이 바라보이고 뒤로는 장원봉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데 이 터를 처음 가꾸었던 사람은 양산보(梁山甫)였다. 그는 15세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간 뒤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수학, 신진사류의 등용문이었던 현량과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받지는 못했다. 그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조광조는 화순의 능주로 유배된 뒤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세상에 환멸을 느낀 양산보는 고향으로 돌아와 별서정원 소쇄원을 일구면서 55세로 죽을 때까지 자연에 묻혀 살았다. 흐르는 폭포와 시냇물을 가운데 두고 대봉대에서 외나무다리를 지나 그 주위를 한바퀴 돌면서 감상하도록 만들어진 소쇄원에는 열채쯤의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봉대待鳳臺, 광풍각光風閣, 제월당霽月堂만이 남아있다. 소쇄원은 자연의 풍치를 그대로 살리면서 계곡, 담벼락, 연못, 폭포, 계단, 다리 등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자연스러움을 연출하고 있어 우리나라 정원문화의 최고봉 또는 ‘건축문화의 백미’라고 일컫는다.
명옥헌에는 눈부신 배롱나무 꽃이 피고
담양군 고서면 선덕리에 자리잡은 명옥헌(鳴玉軒)을 조성한 사람은 오명중(1619-1655吳明仲)이었다. 광해군 때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외가가 있는 이곳에 내려와 망재(忘齋)라는 조촐한 서재를 짓고 살았던 아버지 오희도吳希道의 뜻을 이어받고자 1652년 그는 명옥헌을 짓고 연못을 판 뒤 배롱나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배롱나무 꽃이 피어나는 명옥헌이라는 정자이름은 정자 곁을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옥이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담양군 남면 연천리에 있는 독수정은 이백의 시 구절인 “백이숙제는 누구인가 / 홀로 서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었네”라는 구절에서 따온 이름으로서 고려 공민왕 때 병부상서를 지낸 전신민全新民이 처음 세웠다.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있는 송강정은, 정철이 1584년 동인들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을 그만두고 돌아와 초막을 지어 살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우의정이 되어 조정에 나가기까지 4년 동안을 머물면서「사미인곡」과「속미인곡」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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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산성을 넘어 강천산에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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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산성(金城山城)은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율현리, 금성리와 용면 신성리 그리고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과의 경계지점인 산성산의 약 500m 고지에 위치하고 있는 석축산성이다.
금성산성이 있기 때문에 산성산이라 불리어온 이 산은 담양벌판의 배후를 이루는 병풍산, 추월산, 산성산 등 산악지대의 외곽을 이루고 있다. 이 산 안에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금성산성이 자리잡게 된 것은 물이 흔하고 산성을 쌓기에 적당한 규모의 계곡을 끼고 있고 산성 안쪽의 지형은 유순한데 외곽을 이루는 사면에는 절벽이 길게 형성되어 있어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좋은 입지조건 때문이었다. 금성산성의 총 둘레는 약 2.7km에 이르고 내성은 약 800m쯤 되며 외성이 약 2km쯤 되는데 북쪽으로 연결된 북문은 순창 강천사(剛泉寺) 계곡으로 연결되어 있다. 확실한 축조연대는 알 수 없으나《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성이 있었고 고려시대에 다시 쌓은 성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410년과 1653년에 수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산성의 형태는 천혜의 절벽과 자연의 산세를 이용한 포곡식(包谷式) 성으로서 입구에 남문지를 두고, 주봉인 철마봉이 강천사로 뻗은 등고선을 따라 순창과의 경계선에서 그쳤는데 여기에 북문이 있다. 또, 내성 안으로는 1개 마을을 형성할만한 넓은 평야지대가 있는데, 1688년 당시만 해도 성내 주민호수가 136호수이며 담양․순창․창평․옥과․동복 등지에서 거두어들인 군량미가 1만 2천석이나 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성산성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물 29개가 동문과 남문 안팎에 있고 내성 남문은 서북으로 두문이요. 동, 서, 남의 세문은 적의 침입을 받을만한 곳이 된다. 담양(潭陽) 이상으로부터 길이 산등으로 났는데, 한 길(一線)이 1백 번 구불고 돌기를 6~7리나 해서 비로소 남문에 도달하게 되고, 남문 밖 양쪽 겉은 모두 절벽이다. 동문 밖 6~70보에 돌이 있는데, 비스듬하게 서서 성문을 엿보니, 서문 양쪽 곁에는 산이 모두 절벽이요, 동북 정남(正南)에는 1천 길이나 벽같이 섰고, 성의 모양이 기장(奇壯)하고 활원(濶遠)하여 사방이 높고 가운데는 음푹하고 밖에는 준봉(峻峯)이 없어서 성문을 엿보기가 어렵다.”
이 성을 조선시대에는 담양부, 송창부, 창평현, 옥과현, 동북현 등 2부 3현이 관할하였는데 상주군이 600~800명이 있었다고 한다. 난이 발생하면 대개 성안에는 병사들과 양반 그리고 관속들만이 들어가 피했는데 이 성은 7천여 명이 상주할 수 있을만큼 규모가 컸기 때문에 평민들도 들어가 난을 피했다고 한다.
이 산성을 두고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강항(姜沆 1567~1618)은 포로생활을 하면서 적어보냈던 ‘적중봉소’에서 “정유년 싸움에 적들이 호남을 여러 성들을 보고 저게 성이냐고 비웃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담양의 금성과 나주의 금성을 보고는 조선 사람들이 한사코 지켰더라면 우리가 함락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더이다. 이 애기는 전쟁에 따라갔던 왜인 통역에게서 들었습니다.”라고 기록하였다. 조용필이 노래한 <간양록>의 저자인 강항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영광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진주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사숙재(私淑齋)라고 하였다. 그는 좌찬성 희맹(希孟)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극검(克儉)으로 우계 성혼(成渾)에게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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