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가을 단풍놀이에 취해서 한강의 절경 동강을 걷는다.

산중산담 2017. 11. 22. 17:34

 

가을 단풍놀이에 취해서 한강의 절경 동강을 걷는다.

가을이구나. 빌어먹을 가을, 우리의 정신을 고문하는, 우리를 무한 쓸쓸함으로 고문하는 가을, 원수 같은, 나는 너에게 살의를 느낀다. 가을 원수 같은

정현 종 시인이 노래한 가을, 단풍이 가장 고운 시절에 한강의 절경 동강을 걷습니다. 고성리에서 출발하여 연포마을을 지나고 연포 마을에서 그 아름다운 고개를 지나 문희마을을 지나고 진탄 거쳐 문산나루터로 이어지는 길은 동강을 진수라고 일컬어지는 아름다운 길입니다. 그 길을 걷고자 하시는 분의 참여를 바랍니다.

그 멀고 먼 고갯길을 넘어서자 마을이 나타나고 밭을 매는 아주머니에게 마을 이름을 물어보고서야 이 마을이 소사임을 안다. 우리가 지나온 것으로 착각했던 소사마을인 것이다. 그 아래쪽에는 연포로 건너가는 소사나루가 있는데 다행히 찻길이 나 있다. 강가에는 두 마리의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고 문득 바람이 분다. 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리며 강변에 누워 두둥실 흘러가는 흰구름을 바라다본다. 뒤따라온 김성규 씨는 배낭을 내려놓으며 '아이고고고'를 연발하고 진재언 씨와 김형곤 씨는 상이군인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다리가 아픈 표정이 역력하다.

연포마을 앞 동강에는 세 개의 뼝대(뼝창이라고도 불리는데 깎아지른듯한 선돌을 일컫는다)가 연달아 서 있는데 흡사 작은 마이산을 보고 있는 듯하다. 이곳 연포에는 열 집 정도가 살았다는데 지금은 이해동(44) 씨 한 집만 살고 있다. 푸른 나무숲 사이로 작은 동굴이 보이고 운동장과 교실 세 개가 있는 연포초등학교가 있다. 69년 마을사람들이 손수 지었다는 연포초등학교는 99년에 폐교가 되었다. 학교를 마을에서 공동관리하고자 했지만 일 년 임대료 3백만원을 낼 수가 없어 타지역 사람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한국동굴탐험학교라고 씌어진 간판이 있지만 개점휴업 상태인 듯 사람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가정까지 5km, 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곳에 가면 우리가 하룻밤을 신세져야 할 민박집은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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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걸어가는 산은 참으로 깊고 깊다. 이렇게 깊은 산골이라서 성현은 그의 시에서 "피곤한 말이 실 같은 가는 길을 뚫고 가기를 근심하니 어지러운 산봉우리들이 높고 깎아지른 듯하여 겹으로 된 성과 같구나. 바람이 바위틈에서 나오니 대포의 수레가 구르는 것 같고, 물이 마을을 안고 흘러 한 필 흰 비단 가로놓은 것 같다. 몸은 이 세상 백 년에 두 귀밑이 희어졌고, 물과 산 천리 길에는 벼슬살이하러 다니는 심정이 서럽구나. 난간에 의지해 앉아 동산의 달을 기다리노니, 밤이 고요하여 시 생각이 오랠수록 더욱 맑아진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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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돈을 벌었던 떼꾼들은 사라지고

아랫길로 갈까 윗길로 갈까 망설이다가에윗길로 오르자 집 한 채가 나타나고 먼저 갔던 김현준 씨가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 오늘 잠잘 곳은 저 집인가. (인부)을 얻어서 고추를 심었다는 거북이마을 정광섭 씨 댁에는 몇 사람이 앉아 김치전에 소주 한 잔씩을 나누고 있었다.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6반 연포. 동강댐 수몰지역이라서 집의 개보수는 물론 무엇 하나 고치지 못했다는 정광섭 씨의 집은 내가 어릴 적 살았던 고향집을 떠올리게 한다. 외양간에선 두 마리의 소가 정답게 여물을 먹고 있고 전기가 들어온 지도 불과 3년이라고 한다. 정광섭 씨 집의 부엌은 지금도 장작불을 때고 있었다.

느닷없는 손님들이 닥치자 영월 읍내에 살고 있다는 큰딸이 돌을 갓 지난 애를 등에 업고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방을 치우고, 소죽을 끓이는 큰 솥에다 물을 가득 부어놓고 장작불을 때기 시작한다. 저녁밥은 금세 나왔다. 취나물에다 여러 가지 고기를 넣고 끓인 매운탕. 그중에서도 일품이 민물고기조림이었다. 쫀득쫀득하면서 감칠맛 나는 조림맛의 비결은 불에 약간 구운 뒤 조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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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뗏사공들 돈벌이가 그만큼 좋았기 때문에 떼돈을 번다는 말이 생겼다는데 정말로 떼돈을 벌었느냐고 묻자 "그렇지요. 지금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을 벌었다고 해요. 열여덟, 열아홉에 뗏목을 탔는데 떼 타가지고 돈 벌어서 술값으로 다 나가고 순전히 재미로 했지요. 갔다 와서 또 나무를 모아가지고 또 내려가고 그랬지요. 떼돈이라는 것이 뗏목(뗏목은 떼와 목이 합쳐진 말이다) 띄워서 번 돈이지, 떼돈이 정말로 왕창 버는 돈이라는 뜻은 아니지요. 아우라지에서 여그까장 육십 리쯤 되는디 물 좋을 적에는 한나절이면 오지요. 그런디 황새여울이나 된꼬까리여울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거그 가면 굵은 바위들이 많이 있는디 바위마다 이름들이 있어요. 관일이가 뗏목을 끌고 가다 부딪쳐서 죽은 관일이바우, 승문이가 부딪쳐 죽은 승문이바우 등 많이도 있어요. 두태바우여울을 지나면 된꼬까리여울이 있는디 저그서부터 영월까지는 여울이 없으니까 술집들이 잘 되었지요. 그래서 '황새여울 된꼬까리여울 떼를 지어놓고 만지에 전산옥이야 술판 차려놓아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하고 노래를 불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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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룡동굴은 강 건너에

굽이굽이 일곱 고개가 붙어 있다는 칠족령(좌족령)을 넘어 돌아갈 수도 없고 강을 건너기로 한다. 주인아주머니가 저편으로 우리를 강 건네주고 그 강기슭을 따라 걸은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절매마을에 도착하자 더욱 난감하다. 옛날에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절매라고 이름 지은 이 마을에는 두 집이 살고 있는데 다 비어 있고 문에는 자물쇠만 채워져 있다. 배라도 있을까 두리번거려도 저 건너 문희마을의 나루터에만 나룻배가 매어 있으니 어떻게 한다. 011, 018, 017, 016 모두가 먹통이니 사람을 부를 수도 없고, 우리들은 난감해진다.

결국 김형곤 씨가 옷을 벗고 팬티 바람으로 헤엄을 쳐서 건너 배를 몰고 오겠다고 건너갔지만 배는 굵은 와이어로 매어져 있고 자물쇠까지 채워놓았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다시 김현준 기자가 헤엄을 쳐서 건너가도 소용이 없다. 외딴섬 절해고도에 갇힌 채 우리들의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강 건너 백룡동굴이 있다는 푸르른 절벽을 바라보며 수영도 못 배운 내가 한심하기만 하다.

김현준 기자가 웃통을 벗어제친 채 문희마을(문희마을의 옛이름은 뇌른마을인데 산 아래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로 가서 마을주민 이학균 씨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망치로 그 와이어를 끊어서 무당소라고 이름 지은 강을 건너가게 된 것은 두 시간이 훨씬 넘어서였다. (...)

신정일의 <한강역사문화 탐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