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역사와 시의 고장 강화의 석모도와 교동도를 걷다.

산중산담 2017. 11. 23. 12:52

 

역사와 시의 고장 강화의 석모도와 교동도를 걷다.

가을의 초입 9월 2일 토요일에 강화를 갑니다. <강화 나들길>과 교동도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이어지는 휴전선 길 <통일을 여는 길>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는 강화는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크고 작은 일들이 연이어 일어난 역사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배를 타고 건너가야 되는 섬에서 섬으로 가는 여정, 그 여정이 지금은 다리가 놓여져 버스로 갑니다.

그 석모도에는 일몰이 아름다운 절로 알려진 보문사가 있고 석모도의 끝자락에 솟아 있는 상주산 둘레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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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모도에서 보이는 섬이 바로 교동도입니다. 1914년 까지만 해도 하나의 현이엇던 교동도가 지금은 강화군에 딸린 하나의 면이지만, 어 섬에는 안평대군, 연산군, 광해군 등 조선시대의 주요인물들이 유배를 와서 한 많은 생을 보낸 섬이기도 합니다. 하루 길로 강화의 섬, 석모도와 교동도를 답사하고, 나라 안에 제일 큰 부근리 고인돌과 강화 읍성을 가을의 초입에 답사할 것입니다.

광주의 서쪽은 수리산이며 안산 동쪽에 있는데 안산에서 바라보면 산세가 독수리처럼 보인다고 한다. 여기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정맥이 한남정맥이다. 인천부평김포를 지난 다음에는 움푹 꺼진 돌줄기가 되어 강을 건너고 다시 솟아나서 마니산이 되었는데, 여기가 강화부(江華府), 즉 강화도이다. 강화부 동북쪽은 강이 둘러 싸였고 서남쪽은 바다가 둘러 있어 부 전체가 큰 섬이며, 한양 수구의 나성(羅星)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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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통진의 서남쪽에서 굽어져 갑곶나루가 되고, 또 남쪽으로 마니산 뒤로 움푹 꺼진 곳으로 흐른다. 돌맥이 물 속에 가로 뻗쳐 문턱 같고 복판이 조금 오목하게 되었는데 여기가 손돌목[孫石項]이고 그 남쪽은 서해이다. 삼남지방에서 거둔 조세를 실은 배가 손돌목 밖에 와서 만조를 기다려 목을 지나는데,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돌무더기에 걸려서 배가 파선하게 된다. 정서 쪽으로 흐르는 한강은 양화도의 북쪽 언덕을 돌아 뒤쪽의 서강과 합치고, 또 문수산 북편 조강나루를 돌아 바다로 들어간다.

택리지에는 강화부는 남북 길이가 100여 리이고 동서 길이는 50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의 강화도는 남북의 길이가 약 28킬로미터, 동서의 길이는 약 16킬로미터이고, 면적은 405.2제곱킬로미터이다. 북쪽으로 풍덕의 승천포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으며 강 언덕은 모두 석벽이다. 석벽 밑은 곧바로 진흙 수렁이어서 배를 댈 곳이 없었다. 오직 승천포 맞은편 한 곳에서만 배를 댈 만하다. 그러나 만조 때가 아니면 배를 댈 수가 없으므로 위험한 나루라고 일컬었다.

한편 김정호가 지은 지리책인 <대동 지지> ‘강화부진도조에 의하면 강화부에는 다섯 개의 큰 나루가 있었다고 실려 있다.

갑곶진과 인화석진, 광성진과 정포진, 승천포가 그 나루인데, 지금의 송해면 당산리에 있던 승천포는 개성으로 통하는 나루였고, 인화석진에서는 교동도로 건너가는 나루가 있었다.

내가면 외포리 정포 마을의 서북쪽 모퉁이에 있던 정포진에서는 석모도로 건너는 나루가 있었다.

강화부의 좌우에는 성곽을 쌓지 않고 좌우편 산기슭의 강가에 쌓아 마치 성 위에 쌓은 작은 담처럼 돈대(墩臺 조금 높직하게 만든 평지)만 쌓았다. 거기다 병기를 보관하고 군사를 두어 외적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승천포와, 군사의 갑옷만 벗어 쌓아도 건널 수 있을 만큼 좁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갑곶 양쪽을 지키면 섬 바깥은 강과 바다가 천연적인 요새지가 된다. 그런 연유로 고려 때 원나라 군사를 피해서 여기에다 10년 동안이나 도읍을 옮겨 고려왕조의 명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삼남의 조세를 실은 배가 모두 손돌목을 거쳐 서울에 올라오는 까닭에 바닷길의 요충이라 하여 유수관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동남쪽 건너편에 있는 영종도에도 방영(防營)을 설치하고 첨사(僉使)를 시켜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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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관창리에는 1232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이곳으로 옮겨온 고려 왕실이 39년 간 머물렀던 고려궁 터가 있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 도망쳐온 고려 왕조와 지배계급들은 백성들의 고통과 절망은 아랑곳없이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행사를 꼬박꼬박 치렀다고 한다. 그 호화스러움이 개경에서 벌이던 것에 못지않았다는데, 그 중에 한 예를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고사통(故事通)?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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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2년에 그때의 집권자 최우(崔瑀)가 고종에게 진상한 음식상은 여섯 개였고 상마다 귀한 음식이 담긴 그릇 일곱 개씩이 놓여 있었다. 최우는 음식의 풍성함과 사치스러움을 다하고는 스스로 자랑하기를 다시 오늘과 같이 할 수 있을까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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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실과 지배계급의 잔치는 항상 음악과 춤을 곁들여 호화로운 것이었는데, 처용무나 가면 잡기 등으로 여흥을 돋우었고 그때마다 담 밖에는 잔치를 구경하려는 강화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몽고군의 침입으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만도 20만 명이 넘었고 몽고군이 지나간 곳은 모두 불에 타서 재가 되었음에도 지배세력이 그렇게 생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국의 조세가 안전한 해상통로를 걸쳐 강화도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강화도가 고려의 왕도였던 시대에 황룡사의 9층목탑과 대구 구인사의 대장경이 불에 타버렸다. 그러자 현재 국보 32호로 지정되어 합천 해인사에 보관 중인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서 16년에 걸쳐 다시 만들게 된다. 민중들의 절박한 삶과는 달리 호화 생활을 하면서도 부처의 힘을 빌려 몽고군을 물리치고자 한 집권 세력들은 오늘날에도 또 다른 형태로 존속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역사학자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조선사화(朝鮮史話)? 고적(古蹟)’편에서 강화를 역사의 고장, 시의 고장, 재물의 고장이라고 했던 것처럼 강화는 역사 속에서 수난의 땅이었다.

삼별초의 난으로 강화도가 뻘겋게 피로 물들었고, 그 뒤 병자호란 이후 조선조 말기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난다.

18669월 프랑스의 선박 세 채가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 영종도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강의 언저리 양화진까지 올라갔고, 뒤를 이어 미국과 여러 나라들이 조선의 문호를 연다또는 마실 물을 구한다는 핑계로 몰려 수호조약을 체결했으며 결국 그 조약들은 조선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 항상 중심축을 형성했던 지역이 강화도였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경기도 편에서

강화 나들길과, 행자부에서 만드는 <통일을 여는 길>을 따라 답사할 이번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