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봉정사와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로 가는 길을 걷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가 우리나라를 찾아왔을 때 답사했던 곳이 안동의 하회마을과 봉정사입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명승지인 하회마을과 나라 안의 절 집 중 가장 빼어난 절 중 한 곳인 봉정사를 찾아갑니다.
개목사에서 봉정사에 이르는 아름다운 길, 낙동강 변에 자리 잡은 아름답기로 소문난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걷고 부용대에 올라 낙동강이 휘돌아가는 하회河回를 보실 분들의 참여바랍니다.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계절에 노랗게 물든 들녘을 향해 떠나는 여정에 많은 참여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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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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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에 안동의 지리지 「영가지」를 편찬한 권기는 안동의 지세를 “산은 태백으로부터 내려왔고, 물은 황지로부터 흘러온 것을 알 수 있으며... 산천의 빼어남과 인물의 걸 특 함과 토산의 풍부함과 풍속의 아름다움과 기이한 발자취”가 이곳에 있다 하였다. 멀리로 태백, 소백의 백두대간이 지리산으로 흐르고 낙동강의 물줄기가 아슴프레하게 보이는 천등산은 안동의 서쪽에 있고 그 산에는 봉정사, 개목사 같은 고색창연한 옛 절이 있다.
천등산(575m)은 그렇게 높지 않지만 소나무와 잡목들이 울창하고 산세가 온화하며, 수려하다. 주차장을 지나 산 길을 접어들면 숲길은 아늑하고 계곡 물소리가 제법 요란한 좌측에 정자가 한 채 있다. 퇴계 이황이 이 봉정사에 묵으면서 공부하다가 자주 나가 쉬었다는 정자의 옛 이름은 낙수대였다. 밋밋한 그 이름을 퇴계는 정자에서 듣는 물소리가 옥을 굴리는 듯 아름답다고 하여 명옥대로 바꾸었다. 바위 사이를 흐르는 시내물소리가 멎기도 전에 「천등산 봉정사」라고 쓰여 진 일주문에 들어서고 나무숲이 우거진 길을 계속 올라가면 봉정사가 나타난다.
빼어난 문화재들이 보석처럼 숨어있는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鳳停寺)는 의상이 세운 절로서 창건설화는 이렇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스님이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도력으로 날려 보냈는데 종이로 만든 봉황새가 앉은 이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고 이름 지었다. 또 다른 일설에는 의상이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이산에 오르니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혀 걸었고, 청마가 앞길을 인도하여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하고 청마가 앉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봉정사라고 지었다 한다.
창건이후의 확실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한국전쟁 때 사찰에 있던 경전과 사리 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이절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하화마을과 이곳 봉정사를 찾았고 그때부터 이절은 입장료를 받게 되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나라 안에 가장 오래된 건물
이 절에는 고려 때 지은 극락전(국보15호)과 더불어 조선 초기 건물인 대웅전과 조선후기 건축물인 고금당과 화엄강당이 있어서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계보를 고스란히 간직해왔기 때문에 건축박물관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 나무숲 길을 걸어가면 돌계단에 이른다. 한 발 두 발 숨이 가쁘게 올라가
면 봉정사의 강당인 덕회루 밑으로 지나게 된다. 마치 부석사의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 석등 앞으로 올라가듯이 그 문을 들어서면 석축이 나타나고 대웅전을 중앙에 두고 요사채와 화엄강당이 눈 안에 들어온다. 그 좌측으로 같은 위치, 같은 높이에 극락전이 고금당과 함께 있다. 봉정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정한 맞배지붕으로 나라 안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러한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72년 9월 봉정사 극락전을 해제 보수하는 과정에서 였다.
중도리에 흠을 파고 기문장처(기록이 들어있는 곳)이라고 표시한 곳을 열어보자 극락전의 상량문이 들어있었고 그 상량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안동 부 서쪽 30리쯤 천등산 산기슭에 절이 있어 봉정사라 일컬으니 절이 앉은 자세가 마치 봉황이 머물고 있는 듯하여 이와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됐다. 이절은 옛날 능인대덕이 신라 때 창건하고… 이후 원감 안충 등 여러 스님들에 의해 여섯 차례나 중수되었으나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1363년(공민왕 12년)에 용수사의 대선사 축담이 와서 중수했는데 다시 지붕이 허술해져서 수리하였다.” 이 상량문이 밝혀짐으로서 그때까지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알려졌던 무량수전은 1376년에 중건했는데 봉정사의 극락전은 그보다 13년이나 앞선 1363년에 중수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13년이라는 년대의 차이보다 봉정사 극락전은 대체로 고구려식이라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락전은 1972년의 해체와 복원공사 때에 금, 은, 구리의 옛날식 삼색 단청이 지워져 버렸고, 그 중요한 일부분이었던 귀중한 벽화가 뜯겨 포장된 채로 내버려져 옛 맛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건물은 배흘림기둥에 기둥위에만 포작이 있는 주심포식 맞배지붕이며 법당으로서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어진 필요한 구조만 있지 장식이 거의 없는 고려중기의 단아한 건물이며, 바닥에는 검은 전 돌을 깔았다. 이런 방식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양상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보수 할 때에 대웅전․화엄강당․고금당이 새집같이 지어져서 몇백년을 세월 속에 묵어온 온갖 풍상이 돌이킬 수 없게 되어 찾는 이들의 마음을 섭섭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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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대웅전에서 전면에 보이는 누각이 덕회루의 누마루다. 법고와 목어 사이로 봉정사의 오랜 역사를 적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나는 스님들이 머무는 무량해회(無量海會)라는 요사채를 돌아 영산암으로 향한다. 원래에는 천등산에서 흐르는 골짜기 그대로가 길이던 것이 영화「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촬영되고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골짜기를 메우고 계단을 만들었다. 영화「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89년에 네 개의 해외영화제 그랑프리를 비롯 특별상을 받아 한국영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린 작품으로서 늙고 어린 승려 3명의 구도적 삶을 담고 있다. 투철한 수행으로 득도의 경지에 오른 노선사 해곡이 “사방이 몹시도 어두우니 마음의 심지에 불을 밝히고 갈 길을 비추어라”고 어둠 속에서 석등의 심지를 돋우던 장면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장면이다.
지조암과 더불어 봉정사에 딸린 암자중의 하나인 영산암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지인의 집을 찾아가는 느낌이다. 봉정사 대웅전 앞에 있다가 옮겨진 우화루의 작은 문을 지나 영산암의 마당에 들어서면 큰 바위 곁에 잘 드리워진 소나무가 한그루 있고 목백일홍 나무와 여러 가지의 나무들이 요사채, 삼성각, 응진전 등 다섯 채의 건물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서 있다. 지난날 봉정사의 스님들의 공부방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절 영산암에는 상주하는 스님이 없다. 나는 하얀 고무신 두 켤레가 놓인 요사채 마루에 기대 앉아 세상에 찌든 내 마음을 풀어 놓는다. 풀어진 내 마음은 솜털처럼 가벼워지고 그 가벼움으로 산길에 접어든다. <신정일의 암자기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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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부수형인 하회마을
안동 하회마을은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지정 민속마을로 중요민속자료 12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豐山柳氏) 동족마을로, 터전은 낙동강의 넓은 강류가 마을 전체를 동․남․서 방향으로 감싸는 명당이며 지형은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한다. 풍산 유씨가 집단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대체로 허씨(許氏)․안씨(安氏) 등이 유력한 씨족으로 살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조 13년(1635)의 ?동원록(洞員錄)?에도 삼성(三姓)이 들어 있기는 하나 이미 유씨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그 이전에 유씨들의 기반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마을을 감싸 도는 화천(花川)은 낙동강 상류이며 그 둘레에는 퇴적된 넓은 모래밭이 펼쳐져 있고 그 서북쪽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들어서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백사장이 펼쳐진 강 건너에는 층암절벽이 펼쳐지고 그 위에 여러 누정이 자리 잡고 있어 승경(勝景)으로서의 면모도 잘 갖추고 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부용대(芙蓉臺)의 절벽과 옥연정(玉淵亭)․화천서당이 있으며, 서북쪽에서 강물이 돌아 나가는 부근에는 겸암정(謙菴亭)과 상봉정(翔鳳亭)이 자리 잡고 있다. “하회별신굿을 보지 못하면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별신굿이 열릴 때면 나라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하회별신굿에 쓰이던 가면들은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제작연대가 고려시대로 추정되어 하회마을의 역사적 배경이 뿌리 깊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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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대가 위치한 광덕리(廣德里)는 본래 풍산현 지역으로서, 넓은 둔덕이 있다 하여 광덕․광덕이․광덕리라 하였다. 부용대는 낙동강가에 높이 80미터가 넘는 높이로 깍아지른 듯 서 있는 암벽으로, 그 밑에 달관대(達觀臺)․운송대(雲松臺)․형제암이란 이름의 기이한 바위가 있으며, 그 사이 사이에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또한 서쪽 기슭에 겸암정(謙岩亭)․봉상정(鳳翔亭), 동쪽 기슭에 옥연정(玉淵亭)의 고적이 있다. 바로 밑에는 서남쪽으로만 흐르는 낙동강이 이곳에 이른 뒤 동쪽으로 흘러서 추월담(秋月潭)․옥연(玉淵)을 만들어낸다.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는 하회마을은 차마 혼자서 바라볼 수가 없을 만큼 아름답다.
그 중에서도 옥연정은 부용대 동쪽 기슭에 있는 정자로 선조 19년(1586년)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창건하였다. 낙동강이 이곳에 이르러 옥같이 맑은 못을 이루었다는 뜻에서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 불렀다. 옥연정 남서쪽 뜰에는 삼인석(三印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유성룡과 노수신(盧守愼)․정전(鄭瑑)의 3정승이 놀았다고 한다. 삼인석 밑에는 청파대가 있는데 낙동강 물이 범람하여 높이 파도를 쳐도 이 바위에는 미치지 못하므로, ‘청파대(淸波臺)’라는 석 자를 새겼다고 한다.
실학의 대가이자 명재상으로 이름난 유성룡의 고향이 바로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이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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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몽대仙夢臺는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로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乃城川) 남쪽 암산에 있는 정자이다. 1563년(명종 18)에 이열도(李閱道)가 창건한 것으로, 대에 오르면 선경에 비길 만큼 경치가 아름답다.
동에서 서로 흐르는 내성천의 모래밭이 한눈에 들어오고, 대 아래에는 가늘고 긴 냇물이 굽이쳐 흐르고 뒷산에는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산중턱에 약수터가 있다. 정자 주변에는 노송이 울창하다.
내성천의 물이 휘돌아가는 곳에 소나무 숲이 울창한 선몽대를 답사하고 귀로에 오를 이번 여정에 참여바랍니다.
안동의 소산마을과 하회일대를 돌아다니고 돌아와
안동의 소산마을과 하회일대를 돌아다니고 돌아와
몇 십 년 간 그렇게 돌아다녔어도 기와 집 한 채나
정자 하나 보고, 그냥 지나쳤던 마을이 있고,
고샅길을 구석구석 헤집고 다닌 마을이 있는데, 이번 국립 민속박물관 답사팁과
같이 간 안동의 소산마을이 그렇다.
삼구정 정자가 멀리서 보아도 아름다워서 잠깐 들렀다 갔는데,
그 마을이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하다가 청에 끌려간 김상헌의 세거지였다.
그래서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있어서 답사했는데,
그 마을이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 있는 소산 마을이다.
이 마을은 안동김씨 집성촌으로, 북쪽 멀리 우뚝 솟은 학가산 지맥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형성한 정산(井山) 바로 아래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소산 마을은 넓은 풍산들을 마주보고 있어 실제 느끼는
산의 높이와 크기는 산이 많은 지역에서 받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경북마을지』에 실린 글을 보자
“마을 뒤의 정산(鼎山)과 서쪽의 관산(冠山)이 모두
표고 100m 정도의 구릉이며 앞과 동쪽은 확 트인 들판이다.
마을의 전체적 형상이 ‘소가 누운 형국’이라 하여
쇠미 또는 금산(金山)으로 불리었다.”라는 명칭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원래 금산이라고 불렸던 이 마을이 소산리가 된 까닭은
병자호란 때 낙향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에 의해서라고 한다.
“김가(金哥)가 사는 곳을 금산이라 하면 이는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모름지기 검소하다는 소산으로 바꿔야 한다.”
그 뒤 소산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김상헌은 누구인가?
남양주시 지금동 수석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 서원 세원이라고 부르는 석실마을이고
이곳에 석실서원이 있었다. 석실서원石室書院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도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그 뒤 김상용(金尙容),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이단상(李端相),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원행(金元行), 김이안(金履安), 김조순(金祖淳)이 배향되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이 시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김상헌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이고 호는 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이다. 어려서 윤근수(尹根壽) 등에게 수학하면서 《소학(小學)》 공부에 힘썼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6년 문과에 급제한 그는 이조좌랑·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북인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김상헌은 광해군 대에는 그다지 뚜렷한 관직을 역임하지 못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조정에 나가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로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난 직후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붕당을 타파하고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강직한 성격으로 누차 시사를 비판하다가, 반정 주체들의 뜻에 거슬려 향리로 귀향하기도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姜弘立)의 관직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예조판서로 있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여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자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1641년 심양(瀋陽)에 끌려가 이후 4년여 동안을 청에 묶여 있었다. 당시에도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불복하여 끝까지 저항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지만, 여전히 척화신(斥和臣)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로 나아가 은거하였다.
그의 동생이 청나라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그 당시 강화 남문에서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폭한 김상용이다. 그 두 명의 형제가 안동 김씨 가문을 조선 후기 대표적 가문으로 도약시킨 사람들이었고 조선 후기에 세도정치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한 사람들이었다. 김상헌 의 손자가 3수로 알려진 김수증金壽增. 김수흥. 김수항이며, 김수항의 아들이 당대에 뛰어난 학자로 6창이라고 알려진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金昌業. 金昌즙. 김창립이다.
그리고 한말 안동김씨의 세도가들인 김수근. 김병학. 김병국 등이 모두 그의 후손들이었다.
척화파의 대명사였던 김상헌과 주화파의 다명사였던 최명길
누가 더 옳고 그른가를 논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기 때문이고, 이미 지나간 역사이기 때문이다.
저마다가 옳았고, 저마다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살았다.
김상헌이 내려와 살 당시 중수한 청원루는 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건물인데, 멀리 한다고 멀어지는 것도 아니고,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가 가까이 하고 싶다고 가까워지는 것인가,
그 때로부터 몇 백 년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호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앗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대한민국이 나의 나라, 나의 조국이다.
안동 답사에서 돌아와 지난 어제의 일을 돌아보는 마음은 쓸쓸한데,
나는 또 다시
내일 중국으로 답사를 떠나니, 그것만으로도 김상헌이 살았던 당시
‘천자의 나라’라고 우리나라는 ‘약소민족’이라고 명나라와 청나라에
굽신거리며 살았던 상황보다는 훨씬 나아진 환경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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