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암 아래 길에서 우연처럼 필연처럼 만난 법인스님,
다산수련원에서 하룻밤 묵고 일어나 문을 열자,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렸다.
2월 4일 토요일 일정은 해남 두륜산 대흥사에서 일지암을 오른 뒤
다시 산길을 걸어서, 북 미륵암의 마애불을 보고
미황사 지나 도솔암 거쳐 땅 끝으로 가는 여정인데,
이를 어떻게 한다. 가능하기나 할까?
걱정이 앞섰지만 달리 방법도 없고, 가보자,
대흥사 주차장에 도착하자 온 세상이 하얗다.
눈의 나라, 설국에 온 것이다.
유선여관을 거쳐, 대흥사 대웅전에서 추사 선생을 화상하고,
천불전의 아름다운 문살을 들여다보고, 산길을 올랐다.
일지암 0,5 km, 북 미륵암 1km 두 갈래 길에서 망설이다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서 북미륵암을 가기로 했다.
오르막길에 내린 눈이 만만치 않다.
올라가면서도 내려올 길을 걱정하는 마음,
그렇게 오랜 세월을 걷고 또 걸었어도
순간순간의 걱정에서는 아직도 해방되지 않았으니,
눈이 내리다가 그치고, 다시 내리고. 그치면서
가끔씩 휘몰아오는 회오리바람에 우수수 눈들이 쏟아져 내리는 눈길,
그렇게 도착한 북미륵암의 용화전,
마애여래좌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름답고도 오묘했다.
지극한 정성, 지극한 신심이 아니었으면 도저히 만들 수 없는
북미륵암의 마애여래좌상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올리는 기도,
세상의 평화, 모든 사람들의 대동의 마음,
그리고 이번 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그 시간에도 날은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변하고 변했다.
그 육중한 문을 떠밀려 용회전 내에까지 밀려들어오는 눈발,
점심때는 다가오고, 내려 가야하는데, 어쩔 수 없이 암자에서
큰 대나무를 하나 챙기고 내려오니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일지암과 북 미륵암 가는 삼거리에서 조금 내려가자
세 사람이 싸리비로 눈길을 쓸고 있었다.
누가 이 겨울 눈보라 속에 눈을 쓸고 있을까?
다가서 보니 이런 우연의 일치가 있을까?
“신정일 선생님 아니세요? 또 길에서 만나네요.”
일지암의 주지스님인 법인스님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 다른 절로 가셨거니 했는데, 지금도 그 일지암에 머물러 게셨다.
10여 년도 넘는 세월 저편에 일지암에서 갔을 때
동료 스님과 차를 마시다가
“신정일 선생님 아니세요?” 하고 만났고,
답사 때에 우연처럼 필연처럼 두 세 차례 만났던 스님을 이렇게 만나다니,
“그런데 어디 갔다 오세요?”
“일지암 갔다가 북미륵암 가려다가, 미륵암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먼저 일지암에 오시지“ “그러니까요.”
“그런데 스님은 어찌 이 눈길을 쓸고 계신지요?”
“오늘 저녁 김종삼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몇 십 명이 일지암에 오셔서 문학행사를 한다고 해서
손님맞이 눈을 쓸고 있습니다.“
일정대로 일지암에 먼저 갔더라면 법인 스님을 먼저 만나 차 한 잔을 나누었을 것인데, 만날 수 없었을 인연이 법인 스님이 눈길을 쓰는 바람에 만나는
기이한 인연, 그것을 기념하여, 나는 미륵암에서 가지고 내려온
큰 대나무를 들고, 스님은 비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소설가 최명희는<혼불>에서 그 인연을 다음과 같은 글로 남겼다.
"인연이 그런 것이란다. 억지로는 안 되어.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 해도 달아날 수 없고잉.
지금 너 한테로도 누가 먼 길 오고 있을 것이다.
와서는, 다리 아프다고 주저앉겄지. 물 한 모금 달라고."
우리들의 인생이나 만남도 어쩌면 그러하리라.
어느 순간 만나고 헤어지는 그 것조차도 억겁의 인연에서 연유한 것이리라.
“인연이 있으면 천리 밖에서 찾아오고,
인연이 없으면 코를 맞대고도 사귀지 못한다.“
<수호전>에 실린 글과 같은 인연, 그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가?
“언제 오셔서 하룻밤 묵어가십시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하고 헤어진 우리들의 인연,
“주인은 꿈을 나그네에게 말하고, 나그네는 꿈을 주인에게 말한다.
두 꿈을 말하는 나그네, 그 또한 꿈속의 사람이로구나.“
서산대사 휴정의 선시 한 편이 떠오르던 그날 그 시간도
지나고 나니 하룻밤 꿈이었구나.
초의선사의 뒤를 이어 차 문화와 불교의 중흥을 위해
애쓰시는 법인 스님을 이렇게 우연처럼 필연처럼 만났듯이
살아가면서 어떤 인연을 또 만들어가며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돌아갈 것인지,
2018년 2월, 6일 월요일,
일지암 아래 눈길에서 법인스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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