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태백의 황지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그 두 번 째 봉화 분천리에서 봉화군 명호면청량산 자락까지-

산중산담 2018. 4. 27. 13:22


태백의 황지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그 두 번 째 봉화 분천리에서 봉화군 명호면청량산



 

낙동강 천 삼백리 두 번째 여정이 2018323일에서 25일까지 실시됩니다.

봉화군 분천리에서 시작하여 청량산 자락까지 이번 기행은 낙동강 천 삼 백리 여정 중 가장 오지이기도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구간을 걷게 될 것입니다. 한 나절을 걸어도 사람 하나 만날 수 없는 그 길을 걸어가면서 자연과 교감을 하고 싶으신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분천리(汾川里)는 본래 안동군 소천면의 지역으로서, 낙동강이 마을 중앙으로 흐른다 하여 부내 또는 분천이라 부르고 있다.

 

풍애터널을 통과하다

능호 아래에 있는 아래터(하기) 마을에는 집 한 채 남아있고 아랫터에서 풍애로 건너가는 솔밭나루는 흔적도 없다. 길가에 대추가 빨갛게 익어있다. 다시 나는 철길을 따라가고 풍애에서 가호로 건너가는 풍애나루 건너 물돌이동에선 고랭지 채소밭에 농약을 뿌리는 손길이 부산하다. 철로 옆 산비탈에는 늦게 핀 패랭이꽃이 소담하게 피어있고 풍애터널 못 미쳐 풍애마을에 집들이 서너 채 새로 지어지고 있다.

드디어 풍애터널이다. 86분 랜턴을 비치며 걷는 길은 그다지 팍팍하지 않다. 816518m를 무사히 통과했다. 2현동교 가운데에서 나는 내가 걸어온 그 강 길을 바라보고 오랜만에 경적소리 울리고 지나가는 택시를 본다. 현동교라고 쓰여진 시멘트기둥은 강가에 나뒹굴고 있고 그 다리 아래를 물고기들은 수도 없이 헤엄쳐 다닌다.

막지고개를 오르는 길에 탐스럽게 들어선 수수밭 사이에 숨은 듯 자주색 나팔꽃이 피어있고 그 아래로 강물은 소리를 죽인 채 흐르고 있다. 현동역에는 몇 사람이 앉아서 담소를 즐기고 있고 승객은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이 현동역에서 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막지고개라고 불렀는데 울진에서 오는 열두 고개 중에 마지막 고개라서 막지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동교 아래로 강물은 여울져 흐르고 낙동강 쉼터에 들어가 여장을 내려놓는다. 울진 57km 울진이 멀지 않구나.

이곳 봉화에 철길이 놓이게 된 것은 세계 2차 대전 말기였던 1944년이었다. 납과 아연 그리고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백중석이 나오는 이곳에 영주에서 춘양까지 철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는 경상북도 북부지방 사람들을 강제 동원하여 놓기 시작한 철도로 그 이듬해에 봉화까지 뚫렸으나 해방이 된 후 중단상태에 있다가 1949년에 다시 춘양까지 있는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두 번씩이나 철길공사가 중단되자 봉화지방에서는 억지로 춘양까지 철길을 놓으려고 들면 변란이 일어난다.”라고 하여 억지 춘양이라는 유행어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1953년에 춘양을 거쳐 삼척 탄전지대까지를 잇는 공사가 벌어져 이년 만에 완공되었다. 영주에서 철암까지 이어져 영암선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철길은 해방된 뒤에 우리의 기술로 맨 처음으로 놓은 철길이다.

철길이 뚫림에 따라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외진 지방의 물산 집산지였던 봉화는 그 세력을 교통의 요지가 된 영주 지방에 빼앗기고 말았다. 물자도, 상권도, 사람도 그리고 1962년에는 세무서도 영주에 빼앗겼다. 군청 소재지인 봉화면이 읍이 된 것도 1979년에 군청소재지를 모두 읍으로 승격시킨다는 국가방침 덕분이었다. 철길이 뚫린 그 무렵만 해도 이 지방에서는 여전히 봉화의 옛 이름을 따 내성장으로 통하는 봉화장에 모이는 장사꾼들이 오백 명이 넘었으나 팔십년 대에는 백여 명쯤이 모여 장을 이루던 한적한 장이었다가 지금은 겨우 장터의 명목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

내가 지나고 있는 현동리(舷洞里)는 본래 안동군 소천면의 지역으로서 신라 때 일계현(日谿縣)이 있었으므로 현동이라 하였으며, 또는 소천부곡이 있었으므로 부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분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현동리라 부르고 있다. 이곳 현동리에는 부족국가시대에 반이국이라는 나라에서 쌓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산성인 소천석성이 있으며 이곳에서 현동천이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배나들이 고추농원이라고 쓰여진 표지판을 보고 산길을 내려간다. 큰논배미가 있어서 한밤이라고 부르는 한밤이 동쪽에는 배나들이(주진동)마을이 있고 그 앞에 놓인 나루가 고제나루였다. 그러나 나루는 사라지고 다리가 놓여져 있다. 강은 이곳에서 길게 휘감아돌고 지도에도 없는 현동 3리 마을에서 강은 아래로 깔린 채 흐른다.

길이 있을까 물어보니 강으로 따라가는 길이 쭈욱 나 있단다. 고개를 넘어 가파른 길로 내려서자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헤어졌다 싶었던 철도와 다시 만난다.

 

걸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을

그런데 뒤에서 오고있던 봉고차가 내 옆에다 차를 세운다. “어데를 그렇게 걸어가입니꺼? 제가 태워다 드리겠습니다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을까? 그러나 나는 그 친절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나는 걸어가야 하는데 나는 고맙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는 즉 걸어갈 수밖에 없는 내 사정을 말씀드린다. “걸어가겠다는데 우야겠노 잘 가이소하고 떠나는 봉고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딴 생각이 든다. “한참동안만 태워다 달라고 했어야 옳은가부질없는 생각에 웃음을 지으며 애써 키에르케고르의 말로 자위한다. “ 무엇보다 걸으려는 욕망을 앓지 말자. 매일 같이 나는 걸으면서 행복한 상태가 되고, 걸음을 통해 모든 질병으로부터 벗어난다. 나는 걷는 동안 가장 좋은 생각들을 떠올렸다.”그뿐만이 아니다. 니체는 걷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은 믿지 말라.” 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 생각 저 생각에 사로잡혀 걷는 사이에 여정은 임기리에 접어든다. 원래 소나무 숲이 우거진 송림이 있었기 때문에 숲터, 수터 또는 임기리(林基里)라고 부른 임기리 감전 마을에는 메밀꽃들이 눈이 부시게 피어있다.

(,,,)

삶도 죽음도 도처에 있다

모퉁이를 휘어돌자 임기분교가 나타나고 영양, 봉화로 갈라지는 31번 국도가 지척이다. 임기교를 지나며 세차게 흐르는 강물 위로 백로 한 마리가 외롭게 떠 있고 선담마을에선 고추를 따는 사람들의 손길이 부산하다. 양지벼루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가운데에 서낭당이 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선담인 이 마을에선 정월 열낫날 동제를 올린단다. 여정은 골마을로 접어든다. 골마을의 당집인 시멘트 블록집에는 새끼줄이 둘러쳐 있고 그 위에선 담쟁이 넝쿨이 자연스러움을 연출하고 있다.

길가에는 사마귀, 송장메뚜기, 나비, 잠자리들이 수도 없이 깔린채 죽어있다. 그렇다 삶도 죽음도 도처에 있다. 이곳에서 길은 두갈래다. 강으로 내려가는 길과 고개를 넘어가는 길, 나는 지나가는 경운기를 불러세워 강을 따라 가는 길이 있느냐고 묻는다. 걱정 말고 내려가란다. 내게는 박하사탕 한봉지와 물 한병 밖에 없는데 믿고 가자 사람이 사람의 말을 믿지 누구의 말을 믿겠는가.

가다가 보면 설마 산입에 거미줄 치랴. 옛날 임기교를 지나자 담월마을이고 길 아래로 폐공장이 서있고 문짝이 덜렁덜렁하는 그 위에는 연구소라는 썩음썩음한 나무 팻말이 걸려있다. 한때 저 낡고 조그마했던 곳에서 무슨 연구를 했던가 보지 바로 길 아래에 푸른 호수같은 임기소수력발전소가 보이고 물은 녹색의 물감을 풀어놓은 듯 진녹색이다. 소 수력발전소에서 흐르는 물은 마치 한탄강 변의 직탕폭포를 연상시킨다.. 가도가도 끝없는 비포장 시골길이라 임기교에서부터 차는커녕 사람조차 만나지 못한다. 그저 흐르는 강물과 내 발자국 소리 벗삼아 나 역시 흐르듯이 내려갈 뿐이다.

짐은 자꾸 무거워지고 배는 갈수록 고프다. 강 건너 법전면 눌산리 물알로 건너가는 물알나루는 찾아볼 길이 없고 물알(수하동) 마을도 어딘지 알 길이 없다. 모두가 떠나버린 탓인지 강가에는 고요만이 맴돌고 묵은 밭들에 잡풀만 무성한 채 낡은 컨테이너 박스만 유령처럼 서있을 뿐이다. 강이 휘돌아가는 저 멀리에 건물 한 채가 보인다. 그곳 바로 아래는 벼랑이다. 아마도 임기소수력발전소인 모양인데 어떻게 한다. 내려온 길을 되돌아갈 수도 없이 멀고 하여간 가보자. 임기 소수력발전소에 들어서자 직원 두 사람이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어떻게하면 강을 따라 가겠느냐고 묻자 박광기씨의 말로는 산을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방법은 저 여울을 건너 벌초하는 사람들이 내 논 강길을 따라 합강나루까지 갈 수밖에 없단다.

우선 점심부터 드시라는 박광기씨의 말이 감사할 따름이다. 걱정이 태산같이 많은데 점심은 뒷전이라 물고기 조림도 반갑지가 않다. 물을 말아 양파와 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어도 걱정에 또 걱정뿐이다.

강물을 건넌다. 가능할까 가능하단다. 수력발전소 물이 산을 뚫고 바로 아랫부분으로 흐르기 때문에 강물이 많지 않고 강의 돌들 또한 한강과 달리 그다지 매끄럽지 않단다.

(...)

그렇다 이렇듯 사람조차 만날 수 없는 길 없는 길 위에선 낯선 곳에서 길을 묻다라는 누군가의 책제목 그것마저도 사치다 사람을 만날 수가 없는데 어디서 누구에게 무엇을 묻는단 말인가. 박광기씨의 말대로 얼마 전에는 배를 타고 가던 사람을 보았지만 길도 없는데 걸어간다니 걱정스럽네요그렇다. 나는 걱정스럽게도 지금 길 없는 길 없는 길 위에 서있다. 그러나 이 길도 길이라고 우기고, 우기고 가자 바위와 온갖 가시덤풀과 나무숲들 그리고 잡풀들이 빼곡히 들어찬 길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아무도 다니지 않은 길을 만들며 앞으로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것인가는 그 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인생의 나그네길, 반고비에서 눈을 떠보니 나는 어느새 길을 벗어나 캄캄한 숲속을 헤매고 있었네단테의신곡의 서두처럼 나는 길없는 길 위에 서 있으니......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비탈진 길을 얼마쯤인가를 헤쳐나가자 뽕나무가 나타나고 그 뽕나무가 끝나는 지점에 콩, 옥수수 등이 심어진 밭이 나타나며 길 위에 집 한 채가 보였다.

눌산리 아름마을은 마을 앞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그 앞에는 아름나루가 있었다고 한다. 이상열(44)씨 집에선 건조된 고추를 마대포대에 담고 있었다. 이상열씨 집에서 나는 시원한 물을 얼마나 마셨던가. 이 집에서 지난가을 지리산 살리기의 일환으로 낙동강을 따라 걸었던 실상사의 수경스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수력발전소에서 길이 끊기니까 산을 넘어 넘어 걸어와 하룻밤 묵어갔단다. 혼자가 아니고 여럿이서 걸어가면 외로움은 덜할 것이지만 혼자라서 더 자유롭게 선택하고 도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렇듯 무모할 만큼 힘든 길을 헤쳐 나가고 있는 것이리라.

아름마을에서 쉰 여력으로 한 고개 넘어가자 225분이다. 12km 명호까지 가능할 것이다. 아름마을을 지나며 고개마루에 접어들고 길은 사뭇 돌아간다. 까투리 한 마리 푸드득 날아가고 멀리 내가 걸어가야할 한구비 고난의 길이 보인다.

(...)

합강 나루엔 빈배만 매어있고

드디어 강가에 매어있는 배 한 척이 보이고 강 건너에 집과 전봇대가 보인다. 여기가 삼동리에서 고계리로 건너가는 합강나루터인가.

강 이쪽과 저쪽에는 나룻배 한 척씩이 매어있고 강 건너에서 재산천이 합해진다. 재산천(才山川)은 재산면 동면의 봉화재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현동리에 이르러 북쪽으로 꺾여서 활 모양을 이루고 강산리 합강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뒤돌아보면 빈집 한 채 있고 아무래도 여기서부턴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명호면 삼동 2리 합강마을 김수동(61)씨 집에 들른다. 고추를 따다 잠시 쉬러 왔다는 김수동씨는 찐 옥수수부터 내민다. 길 없는 길을 헤쳐온 나는 배도 고프고 다리 힘도 다 빠진 듯하다. 허겁지겁 옥수수를 두 개나 먹고 물은 몇컵을 들이마셨다. 새참으로 먹으라고 건네주는 옥수수를 두 개나 배낭에 넣으니 살 것 같다. 사람이 알고보면 별 것 아닌 일로 감동도 하고 별 것 아닌 것으로 원수가 되기도 한다. 옥수수 몇 개에 나는 부자가 된 듯 싶고 닫혔던 말문이 열린다. “교통도 불편한 곳에서 어떻게 사세요라고 내가 묻자 그냥 저냥 살아요 춘양에서 살다 6.25사변 때 피난와가지고 오도 가도 못하고 살다보니까 정들어 살지요. 아들딸들이 너이나 되는데 다 객지에 나가 살고 있어요 예전에는 여러 집이 살았는데 다 떠나버리고 우리 내외만 살고 있어요

옥수수가 주절이 주절이 매달려 있는 집 낯선 사람이 올라치면 개 몇마리가 우짓는 집 낙동강을 바라보며 한 폭의 그림처럼 서있는 김수동씨 집에 작별을 고하고 나는 산길을 오른다.

(...)

삼동 1리 마을의 논 가운데에는 돌장승 한 기가 서있고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도 있었던 길을 나는 합강나루 아래 명호 소수력발전소 부근을 다시 보고자하는 열망 하나로 힘든 길을 다시 택했다.

숲은 그 사이 어두컴컴하다. 나는 강물 소리에 홀린 채 그 소리나는 곳으로만 가다보면 낙동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명호 소수력발전소에서 강물은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강물소리는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듯이 위풍당당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이제 나는 숲길을 헤쳐나오느라 땀과 피로로 뒤범벅이된 육체와 정신을 추스리고 어두워진 강물을 따라 걸어가고 있다. 낙동강이 내게 말하는 소리 들린다. “신정일 수고했어 시도하지 않으면 얻을 게 없는 법이야이제 발목이 어제처럼 아프다. 다리를 건너고 이 모퉁이만 돌아가면 그리운 명호가 내 눈 안에 들어올 것이다. 어렵고 힘들고 그리고 모든 것들과 단절되었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가고 낙동강은 서서히 저물어가는 황혼녘에 춘양천을 받아들인 후 더 넓은 강물이 되어 예산 안동으로 흐르고 흐를 것이다. 보릿골을 지나며 일찍 켜진 가로등 불빛 하나 깜빡거리고 멀리 명호 소재지가 보인다. 하얀 메밀꽃 너머로 붉은 해가진다. 623분 나는 지금 춘양천(운곡천)을 지나고 있다.

(...)

관창리(觀漲里)는 마을 뒤 바위에서 낙동강물이 불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뜻으로 관창이라 하였다 한다. 갈골거리(관창1)에는 갈골나루터가 있고 문명산 자락에 구름재(운산) 마을이 있고 그 마을 가운데에 운산정이 있다. 프라스틱으로 만든 배 한 척 정박해 있는 낙동강 가에는 흰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찻길도 나 있지 않은 운산마을에도 사람이 살고 있구나. 관창2교를 지나며 강물은 흐리고 탁하다. 청량산의 뒤라 하여 뒤실 또는 북곡이라 이름지은 북곡 마을 강 가운데에는 물새 한 마리 앉아 있고 청량산의 위용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강 건너 관창2리는 부근에 큰 조개형의 명당이 있다고 해서 대로방이고 청량산 자락에선 고추 따는 할머니들의 손길이 부산하다. 관창1교를 지나며 멀리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청량1교가 보이고 과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쌓았다는 산성산(845m)이 보인다.

<신정일의 낙동강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