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법성포와 불갑사로 봄을 맞으러 가다.
무술년 3월 3일 토요일 이른 봄을 맞으러 영광의 법성포와 불갑산으로 갑니다.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굴비의 고장 영광의 법성포와 마라난타가 창건한 아름다운 절 불갑사 일대를 돌아보고 돌아올 이번 기행에 참여하여 봄바람을 맞기를 바랍니다.
법성포에 들어갔을 때는 대낮이었고 배들은 뻘밭에 헐벗은 몸을 아무렇게나 드러내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갈매기 떼들이 정박한 배에서 배로 다시 뻘밭으로 날아올랐다. 이곳은 그 옛날 진나라의 마라난타가 백제 땅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곳이라고 전해오는 포구다. 고려 때 이자겸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난을 일으켰다가 부하 척준경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법성포에 귀양을 왔다. 그 이자겸이 칠산바다에서 삼태기로 건질 만큼 잡혔던 영광굴비를 석어라는 이름을 붙여 사위였던 인종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법성포는 조선시대 영산포와 더불어 호남지방의 세곡을 갈무리했던 초창의 기능을 맡았었다. 그 무렵 조창의 중심역할을 했던 영산포가 뱃길이 멀고 험하여서 배가 자주 뒤집히자 중종 때 영산포 조창을 없애고 법성포로 옮겼다. 그로부터 법성포에는 전라도 일대 모든 고을의 토지세인 전세가 들어왔다. 동헌을 비롯한 관아건물이 열다섯 채가 들어섰고, 배가 스무 채에서 오십 채까지, 전선이 스물두 채, 수군이 천칠백여 명이 머물렀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라도 제일의 포구가 법성포였다. 고깃배 선단이 포구에 들어오면 법성포 외양에 있던 목넹기에 파시가 섰다. 충청도 전라도 일대의 어물상들이 떼지어 물려와 북새통을 이루었고, 가을세곡을 받을 때는 큰 도회지를 연상케 했던 법성포는 이젠 옛날만 회상할 뿐이다. 그렇다. 그 법성포는 옛 이야기 속에 한 토막일 뿐이다.
도온 시일러 가세에에
돈 실러으어 가으세에에
여영광에 버법성포에라 돈 시일러가
온 나라에 이름이 나도록 떼지어 왔던 영광굴비가 수심이 얕아진 후로 가뭄에 콩나듯 드문드문 나타나고, 다른 운송수단의 발달로 포구의 기능이 쇠퇴하고 말았다. 파시때 마다 흥청거리던 그 날, 법성포의 영광은 언제 다시 올 것인지 기약이 없다. 홍농면에 자리한 원자력 발전소의 그늘에 가려 빛을 잃어 가는 법성포에서 어느 바다에서 잡혔는지도 모른 채 널려 있는 영광굴비를 바라보며 그 옛시절에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며 들어오던 어부들의 활짝 핀 웃음을 환영처럼 보았다. 바다 저 멀리 동학농민군들이 진을 쳤다고 전해오는 구수산(326.8m)쪽을 아쉬운 눈길로 응시하다가 시간을 어쩌지 못하고 불갑산(515.9m)으로 향했다.
마라난타가 창건한 고찰 불갑사
불갑산 불갑사로 가는 길은 언제나 적적하다. 매표소도 없고 관리사무소라고 있기는 있는데 몇 번째 왔지만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울창한 나무숲만이 오고가는 길손을 반길 뿐이다. 이 나라 불교개혁의 현장에는 꼭 있었던 지선 스님이 26살 때 주지를 지냈던 불갑사는 우리 나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한 진나라의 마라난타가 침류왕 1년 384년에 창건했다고 한다. 도갑사, 봉갑사, 불갑사의 3갑사를 창건한 그가 셋 중 이 사찰이 으뜸이라 하여 불갑사라 이름 붙였다는 설이 전해져 오는데, 대웅전 용마루에 반듯이 탑을 얹어놓은 마라난타의 사찰 건축양식이 그후 중창 시에도 그대로 이어져 온 것으로 짐작된다.
불갑사 고적기와 조선 중기 때의 성리학자 수온 강항선생이 지은 불갑사 중수기를 보면 이 절은 충렬왕 3년에 도승 진각 국사가 중창하였다. 그 때의 규모는 500칸이었고 승방이 70여개소, 낭료400여주, 누고가 90여척이었고, 수백여 명의 스님이 앉아 있을 수 있는 승방이 있었다고 한다. 정유재란때 전부 소실되어 버리고 전일암만 남아 있던 것을 몇 번에 걸쳐 중수하였고 영조 40년과 1909년 부분 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불갑사는 대웅전, 팔상전, 칠성각, 명부전, 요사채를 비롯한 절간 건물이 열다섯채가 있어 그 규모가 작지 않다. 보물 830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전은 정면 3간, 측면, 팔각 지붕에 다포계 건물의 매우 화려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대웅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문살 모양이다. 소슬 빗살문으로 중앙 어간에는 연꽃무늬와 국화무늬를 수려하게 조각하여 내소사 대웅전의 아름다운 문살을 연상시키지만 그와는 또 다른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바쁜 길손들을 사로잡는다. 대웅전 후면 벽화의 숙작(졸고 있는 까치)같은 보기 드문 작품과 소요사에서 옮겨 왔다는 사천왕상, 그리고 열한 살 먹은 소녀가 썼다는 인상적인 현관 ‘불갑사’가 있는 불갑사를 뒤로 하고 산길을 올라갔다.
불갑산은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동쪽에 위치한 산이다. 영광에 있는 크고 작은 산 중에 제일 높은 산이라 하여 모악산으로 불렸는데 산의 중턱에 불갑사가 세워지면서 불갑산이라고 하기 시작했다. 영광의 진산으로 호남정맥이 입암산에서 서남지맥을 뻗어 방장산 문수산을 일으켜 세우고 달리다가 우뚝 솟은 산이다. 해발 516미터 이며 영광읍에서 약 10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멀리서 보면 산의 형태가 늙은 쥐가 밭을 향해 내려오는 형세를 닮았다고 한다. 이 불갑산에는 인도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전설을 안고있는 참식나무가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 112호로 늘푸른 참식나무는 울릉도와 따뜻한 남쪽지방에서만 자란다.
산길을 따라 도토리, 참나무, 싸리나무 등의 잡목사이를 헤쳐 산 속으로 한참 들어갔다. 동백나무가 우거져 있다. 이곳이 바로 유명한 불갑산 동백나무숲이다. 선운사나 오동도의 동백과 견줄 바는 없으나 이른 봄 희끗희끗한 잔설 사이로 내어민 붉은 동백꽃은 지나는 길손들의 발길을 묶어놓고도 남았으리라, 칡넝쿨과 참대나무 우거진 길을 헤치고 1.5킬로미터 올라가니 수줍은 새악시처럼 해불암이 나타났다.
불갑산에 있는 여러 암자 중 유일하게 서해낙조를 바라볼 수 있는 해불암(海佛庵)에서 석간수로 목을 축였다. 가파른 산등성이로 땀을 훔치며 오르니 불갑산 정상인 연실봉이다. 연밥을 닮았다는 연실봉(蓮實峰)에서 바다를 보았다. 동해일출을 보고 싶거든 경주 토함산을 올라가고 서해낙조를 보려거든 불갑산 연실봉에 오르라던 누군가의 말은 틀림이 없을 듯 싶다.
함평평야와 나주평야가 그?꼴낮? 펼쳐져 있고 동북쪽으로 백암산, 추월산, 태청산의 여러 봉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구름 속으로 민족의 성산 지리산이 아스라하게 보일 듯 싶고, 남쪽으로 영암 월출산이 보인다. 그리고 곽재구의 아름다운 시편에 나오는 송이도, 각이도, 낙월도 등 이름도 모르는 무수한 섬들을 칠산바다가 자식처럼 끌어 안고 있다. 영광읍쪽으로 백수 대절산이 외롭고 바로 그 아래 촛대봉과 나팔봉이 초록빛으로 옷을 갈아 입은 채 서로를 시새움하듯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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