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서울 백사실 계곡과 숭례문에서 남산을 지나 흥인지문에 이르는 서울 성곽길을 걷다.

산중산담 2019. 6. 26. 11:16


서울 백사실 계곡과 숭례문에서 남산을 지나 흥인지문에 이르는 서울 성곽길을 걷다.


 

<두 발로 만나는 우리 땅 이야기> ‘서울편의 발간에 맞추어 78일 오전 서울 백사실 계곡 아래, 세검정과 석파정, 그리고 안평대군의 자취가 서린 비해당 터를 거릴 것입니다. 오후에는 남대문으로 알려진 숭례문에서 남산을 지나 광희문 거쳐 동대문이라고 알려진 흥인지문을 거닐 예정입니다.

서울에서도 가장 숲이 울창한 남산과 백사실 계곡을 거닐게 될 이번 여정에 동참해주십시오.

 

인조반정을 승리로 이끈 유서 깊은 창의문,

인왕산이 뻗어 내린 등성이에 청운공원이 있다. 이 근처에서 학창시절 윤동주 시인이 잠시 살았다고 한다. 공원에는 서시가 새겨진 시비가 있고, 그 너머로 보이는 청와대 일대가 한 폭의 그림이다.

잠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내려서자 고갯마루에 떡 버티고 서 있는 문이 나타난다. 창의문이다. 1396(태조 5)에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의 하나로 창건 한 뒤 창의문이라는 문명을 지었다. 이 문은 축한산, 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다. 북문 또는 자하문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데, 그것은 도성의 북쪽 교외 세검정과 북한산으로 통하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창의문은 훗날 1413(태종 13)에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이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면 지맥이 손상된다고 주장하여 1416(태종 16)에 닫았다가 1506(중종 1)에 다시 열었다. 1623년 인조반정 당시에는 능양군(인조)을 비롯한 의군들이 이 문을 도끼로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문루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740(영조 16)에 다시 세우고 다락 안에 김유金庾, 이귀, 최명길을 비롯한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로부터 120여 년이 지난 영조 19(1734)에 새검정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오던 영조 임금은 이곳 자하문에서 반정의거를 회고하며 현판을 꾸며 달게 하였다. 1958년 크게 보수하였으며 정면 4,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만든 창의문은 사소문 가운데 원래의 모습이 유일하게 보존된 문이다.

 

옛 정취가 사라진 부암동을 거닐다.

창의문 문루에 올라가 성 안을 바라다 보고 창의문을 내려서자 부암동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자두와 복숭아, 능금이라고 부르던 과일들을 재배하는 과수원들이 연달아 있던 한적한 곳이었다. 부암동은 원래 한성부 북부 상평방의 일부로 부암이라는 이름은 부침바우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암동 134번지에 있는 이 바위에다 다른 돌을 붙이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며, 바위에 돌을 문질러 붙이므로 부침바위 또는 한자명으로 부암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다.

고샅길을 내려가 다시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올라가자 김환기미술관이 보이고, 골목길을 올라가 다시 내려가자 거짓말처럼 산길이 아타난다. 나무숲 우거진 그 길목에 백석동천이라는 글씨 넉자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그 아래가 바로 백사실 계곡이라는 백석동이다.

부암동 87번지인 백사실은 바위에 백석동천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므로 백석실 또는 배석동, 또는 백사실이라고 불렀다. 예로부터 흰 돌이 많고 경치가 좋은 이곳을 사람들은 백사 이항복이 공부하던 곳이라고도 하고, 또는 흰모래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나뭇잎이 사각사각 발에 밟히는 비단결 같은 흙길이 이어진다. 산길을 따라 능선길로 가다가 아랫길로 접어들자 절이 한 채 보인다. 절 계단에 앉아 새참을 먹고 절문을 나서자 한줄기 물줄기가 세차게 흐른다. 다시 백석실을 지나 고갯마루를 넘어 도착한 부암동, 이곳에는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종이를 만들던 한지공장이 있었다. 조선 태종 때부터 고종 19년까지 순지와 환지를만들던 조지서가 있었고, 1960년대까지만 해도 종이를 만들던 사람들이 그 전통을 이어왔는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부암동 269번지에 있었던 메주가마 터 역시 옛 정취가 사라진 지 오래다. 나라에서 이곳에 사는 백성들의 생활고를 덜어주기 위하여 서울 관청에서 쓰는 메주를 쑤는 권리를 주었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빽빽한 집터만 남아있다.

 

자하문 터널 지나 새검정과 석파정에 닿다.

자하문 터널을 지난 차들이 동서로 오고가는 근처에는 새검정과 석파정이 있다. 관서팔경 중의 하나인 세검정은 인조반정을 성사시킨 사람들이 이곳을 흐르는 맑은 시냇가에서 칼을 씻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하지만 문일평이 쓴 조선사화에는 그와는 다른 이야기가 실려있다.

사실에 있어서는 인조반정과 하등의 관계가 없고, 숙종 때 삼청동에 설치했던 총융청을 북한산성의 수비를 위하여 영조 때 이곳으로 옮기면서 경치 좋은 데를 택하여 수간정사를 새로 세우고 세검정이라 이름 지으니 때는 정조 24년이었다.”

이곳에서 칼을 씻은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사초를 썼었던 곳이다. 사관이 임금의 말이나 나라 일을 적어 실록의 기본자료로 삼은 원고의 먹물을 씻어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종이가 귀해 한 번 썼던 한지를 재생용지로 만들 때 다시 물로 씻어서 순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부암동 20번지에 있는 서가정은 원래 이 부근의 세 갈래의 내가 합해서 흐르므로 바위에 삼계동이라는 글자를 새겨 삼계동정자라 불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이곳에 살게 되면서 그 아호를 따서 석파정이라 하였다.

골목길을 한참 올라서자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 용이 살았던 비해당 터가 보인다. 비해당은 그의 당호였다. 안평대군은 도원에서 기쁘게 놀았던 꿈을 꾸고서 정자를 지었는데, 바로 무계정사다.

하지만 꿈속인 듯 아름다웠을 비해당 터에는 집 한 채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폐허처럼 변해가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안평대군이 그린 몽유도원도는 일본에서 이방인들의 가슴을 울리는데, 정작 경복궁에서 멀지 않은 부암동에 있는 그의 집터는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으니 이를 어찌할까. 가슴 한쪽이 몹시 아리다.

 

숭례문에서 응인지문에 이르는 서울 성곽길,

 

우리나라 국보 1호는 서울의 숭례문이다. 서울 남대문에는 문턱이 없다. 그런데도 남대문 문턱이 대추나무라고 한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것은 터무니없는 말로 우김질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 속담에도 등장하는 숭례문은 근현대화 속에 빌딩 숲에 갇혀 외롭게 서 있다가 2008년에 어이없는 방화로 인해 소실되고 말았다.

숭례문은 도성(都城)4대문과 4소문 중에 남쪽으로 나 있는 정문(正門)이었다. 조선 태조 7년에 평양감사를 지낸 조준趙浚이 감독하여 창건된 서울 성곽 중 정남쪽 문이 숭례문崇禮門이다. 이 문의 처마는 상하층 모두 겹처마이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1962년 이 문을 해체 할 때 발견 된 상량문의 명문에 의하면 본래 지붕은 팔작지붕이었으나, 훗날 우진각지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형태의 숭례문이 다시 지어진 것은 세종 30년인 14485월이었다. 당시 이문을 재건하려 있던 이유가 세종실록15년 조에 실려 있다.

 

경복궁의 오른 팔이 대체로 산세가 낮고 미약하여 멀리 헤벌어지게 트여서 품으로 껴안은 형국이 없으므로 남대문밖에 연못을 파고 문안에 지천사(支天寺)를 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남대문터가 지금같이 낮고 평평한 것은 필시 당초에 그 땅을 낮추어서 평평하게 한 것으로 여겨지는 만큼 이제 그 땅을 다시 돋우어서 양편의 산맥(山脈)과 잇닿게 한 다음 그 위에 문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는가?” 청파역(靑坡驛)에서부터 남산으로 잇닿은 여러 산맥의 봉우리와 흥천사(興天寺) 북쪽의 봉우리에도 소나무를 심어 무성하게 가꾸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임금께서 말씀하시니 여러 신하들이 좋다고 하였다.

 

남대문의 본래 이름은 숭례문(崇禮門)으로서 도성(都城) 둘레 사방팔방에 딸린 4대문 4소문 중에 남쪽으로 나 있는 큰 성문(城門)으로 도성의 정문(正門)이다. <태조실록> 728일 을유 조에 도성 남문이 완성 되어 임금께서 납시어 살피시었다.” 라고 기록 된 것으로 태조 7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숭례문崇禮門이라는 글씨는 <신증동국여지승람>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 남대문이라 부른다.” 라고 실려 있고, 이수광李?光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設>’‘세종대왕의 큰 형님인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

 

이 산을 중심으로 남산南山 팔영八詠이 있었고 이 산에 성종임금과 손순효에 얽힌 일화가 남아 있다.

 

찬성 손순효는 성종 때에 충성스럽고 소박하며 정직하기로 이름이 났었다. 임금도 몹시 그를 좋아하였다. 어느 날, 임금께서 늦은 오후에 두 사람의 내시와 함께 경회루에 올라 멀리 바라보자, 남산 기슭에 두어 사람이 수풀 사이에 둘러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손순효일 것이라고 짐작한 임금이 사람을 시켜 가보라고 하였다. 임금의 예감이 틀리지 않아 손 찬성이 두 사람의 손님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쟁반 위에 누런 오이 한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임금께서 바로 말 한 필에다가 술과 고기를 잔뜩 실어다 주게,’ 하고 이어서 경계의 말을 전하기를 내일 조정에 나오면 절대로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해라. 다른 신하가 알면 반드시 내가 손순효를 편애 한다고 싫어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손순효는 그 친구와 함께 머리를 숙이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넘치도록 배불리 먹고 취하였다. 그 다음날 이른 아침에 손순효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갔다. 임금께서 불러 어제 당부한 그 경계를 지키지 않은 것을 나무라자 손순효는 울면서 대답하였다.

신은 다만 은덕에 감사하려는 것뿐이옵니다.”

멀리서 바라보니 사랑하는 신하가 보인다. 그래서 아랫사람을 시켜 가보라고 하니 술을 마시는데 안주가 오이 한개 밖에 없다. 임금은 술과 안주를 보내고 신하는 그 은혜를 가슴에 새기고, 감복해 한다.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임금과 신하의 도타운 정이 이렇게 깊고도 깊었던 것이 옛 시절이었다.(...)

 

흥인지문은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도성을 쌓을 때 같이 짓기 시작하여 조선 태조 7(1398)에 완성하였다. 단종 원년(1453)에 고쳐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흥인지??의 현판이 원래는 흥인문이었으나 세조 이후에 흥인지문으로 고쳐지며 넉자로 되었다. 그 이유는 풍수설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풍수설에서 인은 목에 속하고 목은 동에 속하므로 흥인興仁은 동방을 뜻한 것이며, ‘자를 더한 것은 서울의 지세가 북. . 남은 산과 고지로 되었고, 오직 동쪽에 험하므로 그 험한 곳을 메우기 위한 뜻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이 지대가 도성의 북. 서 남쪽에 비해 유난히 낮기 때문에 가라앉은 땅 기운을 돋우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예로부터 흥인문 밖에는 버드나무가 울창하였으므로 흥인문 박의 버들(興仁門外陽柳)이라 하여 필운대의 살구꽃, 북둔의 복숭아꽃, 천연정의 연꽃 삼청동과 탕춘대의 수석과 더불어 서울의 놀이터로 유명하였다,

흥인지문에서는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올렸고 그 반대로 긴 장마가 져도 비를 그치게 해달라는 영제?祭를 올렸는데 그 이유는 큰 장마가 들수록 항상 동대문에 물이 들기 때문이었다.

흥인지문은 도성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문화재이다.

 

조선시대의 9대로,

도성의 4대 문 중 동쪽에 있는 흥인지문에서 시작되는 도로가 관동대로다. 이 도로가 <동국여지비고>2권에 서울에서 우리나라 각 지역에 이르던 9대로 중의 제 3로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