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 구미시 도개면에시 칠곡군 왜관읍 왜관 철교까지

산중산담 2019. 6. 26. 11:18


낙동강 -여섯 번 째 구미시 도개면에시 칠곡군 왜관읍 왜관 철교까지-


태백의 황지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여섯 번 째 구미시 도개면에시 칠곡군 왜관읍 왜관 철교까지-

 

낙동강 천 삼 백리 여섯 번째 여정이 2018713()일에서 15()일까지 구미시 도개면 가산리에서 칠곡의 왜관에 이르는 강 길에서 23일간 실시됩니다.

영남의 한복판에 있는 선산군, 산과 물이 서로 어울려 기세가 화합하고 정기와 맑음이 모여 대대로 뛰어난 인물이 났다

 

조선 왕조 선조 때의 학자인 여헌 장현광이 그의 고향 선산을 자랑했던 말이다. 이중환 역시택리지에서 조선 인물의 반은 영남에서, 영남 인물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고 했을 만큼 이곳에서는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났다. 포은 정몽주로부터 학통을 이어 받은 고려 말의 삼은 중의 한사람이었던 야은 길재는 이곳 선산군 고아면에서 태어났다. 서른 여덟살에 고려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낙향한 길재는 강호 김숙자같은 제자를 길러냈고 김종직은 김숙자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무오사화 당시 함께 희생되었던 서른세명의 선비들이 김종직의 제자들이었다. 또한 사육신의 한사람이었던 단계 하위지는 선산읍 영봉마을에서 태어났고 조선 중종 때 반정공신이었던 성희안이 청송의 이름난 잣과 꿀을 보내달라는 청을 받자 잣은 높은 산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으니 내가 어떻게 구하리요라는 답장을 썼던 청송의 원이었던 정붕이 제자들을 길러낸 곳이 그의 고향이었던 선산이었다. 이곳 선산 땅이 인물이 많이 태어난 곳임을 말할 때마다 이곳의 명산인 금오산과 이곳을 거쳐 흐르는 낙동강의 수려한 흐름도 함께 이야기된다.(...)

 

한적한 시골이었던 구미(龜尾)시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5.16이 일어난 지 두해 뒤였다. 1963년에 면에서 읍으로 승격된 구미시는 1971년 구미수출 산업공단이 들어서며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고 그 뒤 1978년에는 시로 승격되었다.

 

구미시가 그토록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 것은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이곳 구미는 1960년대부터 70년대가 우리나라 경제개발정책을 대표하는 곳이 있다. 총 면적이 530만 평인 이곳 구미공단에서 총 생산액은(96년 기준) 145천억원에 이르렀다. 낙동강을 중심에 두고 낙동강을 중심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1, 2, 3공단이 밀집해 있으며 낙동강 서쪽에 4공단이 들어서고 있는데 그 때가 되면 구미공단의 총 면적이 1720만 평이 될거라고 한다.

 

강변 체육공원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자동차들이 서있었다. -우리 고장 산천 우리가 맑게 낙동강 정화는 LG전선- 이라고 쓰여진 안내판을 대그룹들마다 앞다투어 세우는 것보다 먼저 실천이 중요하리라. 길 건너에는 구미공단의 공장들이 가슴이 답답해지도록 빼곡히 들어차 있고,

강 건너 LG전자 뒤편에는 산 정상을 칼로 자른 듯한 천생산과 숲 뒤에 산들이 에워싸고 있다. 천생산은(天生山)은 구미시 인의동 북쪽에 있는 산으로 신라 박혁거세가 쌓았다는 쌓았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는 천생산성에는 연못이 네 개가 있으며 선조 37년에 중축하였다.

지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남구미교를 지나 구미시내 강변을 따라 걷고 있어도 어디 슈퍼 하나 찾아볼 수가 없다. 식당을 만나면 점심부터 먹어야 겠다. 낙동강은 그 아래에서 여울져 흐르고 대기업들이 11하천을 보호한다는 안내판이 세워져있는 것이 무색하게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어째서 저런 일들이 벌어졌을까? 하루 한 사람씩만 당번을 정해서 청소를 하게 한다면 이 강변 길이나 낙동강이 얼마나 깨끗할까?(...)

 

길은 포기하는 순간 없어지고

공단교를 지나며 그 아래 하천은 먹물을 풀어놓은듯 새까만 물이 흐르는 것이 보이고 그 까만 물위에도 검은 구름이 떠있다. 신기하기도 하지 흰 구름이 검은 구름으로 변하는 그것은 그 무슨 연유일까? 선종의 격언 중에 물의 가르침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물을 마셔라라는 말이 있는데 저 물을 어떻게 한다. 길은 오르막길이다. 오태에서 구봉못골을 거쳐 율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마산 고갯마루에서 신기루처럼 주유소가 나타나고 그 옆에 하이웨이 식당이 있다. 이번 낙동강 답사를 통해 나는 혼자 먹는 밥이 얼마나 고역인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아니면 백반박에 무엇을 시키겠는가? 고기를 즐겨 먹는 편은 아니지만 먹고 싶어도 일인분은 혼자 다 먹지를 못하니 시킬 수도 없고 매운탕 1인분을 시켜놓고 소주(잘 먹을 때 두 잔 먹으면 많이 취하는 주량임)를 마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관에 앉아 청승맞게 캔 맥주를 먹을 수도 없으니...

나는 여럿이 떠들썩한 가운데 이야기를 반찬삼아 나누는 음식이 종류를 고하하고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샘삼 깨달은 것이다.(...)

 

강싱이들 아래를 지나 길 위에 올라서자 낙동강왜관전적기념관에 다다른다.

1950625일 칠흙같은 어둠 속 내리퍼붓던 빗줄기 속에서 시작된 한국전쟁이 시작된 뒤 계속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7월말 낙동강을 건넌 뒤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우리들의 후방에는 더 이상 물러설 방어선이 없다. 우리 부대들은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그 균형을 깨뜨리기 위하여 끊임없이 역습을 감행해야 한다...... 부산으로 철수하다는 것은 사상 최대의 살육을 의미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우리들은..... 차라리 같이 싸우다가 죽을 것이다” 729일 유엔군 총사령부의 사령관이었던 워커 중장은 상주에 있던 미군 제 25사단 사령부에서 각급 참모들을 모아놓고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해야 하는 당위성을 이렇게 비장하게 천명하였다.

낙동강 방어선은 칠곡군 왜관읍을 꼭지점으로 북쪽으로 동해안의 영덕에 이르고 서쪽으로 낙동강 본류가 남강과 합류하는 경안 창념군 남지읍에 이르는 길이 240km에 이르는 금이 있다. 이 금안에 연합군의 중요한 보급기지였던 부산, 마산, 대구, 영천, 포항 등이 있어 그곳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절명의 방어선이었다. (...)

 

1980년에 육이오 전쟁 30돌을 맞아 특집을 실은 영남일보는 융단 폭격으로 치명적 타격을 받은 인민군들이 그 보복으로 사로잡았던 미군 포로들을 찢어죽였다는 증언을 실었다. 그리고 쫓기다가 강물에 뛰어든 인민군 1개 연대를 미군기가 휘발유를 뿌리고 네이팜탄을 떨어뜨려 강물을 불바다로 만들면서 모두 불태워 죽었다는 정황도 실었다. 한편 다부리 전투에서 인민군 전차 13대가 파괴됐고, 3,078명이 사살됐으며, 1,363명이 사로잡혔는데, 이에 맞선 국군과 미군의 희생도 컸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지리 창마마을을 지나 경부선열차가 지나가는 왜관교에 이른다. 왜관(倭館)이라는 이름은 지금의 왜관 언저리에 조선 성종 때부터 낙동강 하류에서 뱃길을 따라 올라온 왜물 곧 일본 물건을 서울로 실어가기 전에 보관해 두었던 창고인 왜물고가 있었던 데에서 잘못 생긴 이름이다. 원래의 왜관은 강건너 약목면 관호리 임강마을에 있었다. 낙동강에 임하여 있던 구왜관은 일본인들이 철도를 개설하면서 장래성이 더 있어 보이는 이 돌밭 마을에 역을 두고 옮겨왔다. 인동군의 9개 면을 병합한 칠곡군의 군청이 왜관으로 옮겨온 때는 1914년인데 그 전까지는 지금은 대구직할시에 편입된 칠곡읍과 구미시의 동이 되어 있는 인동면이 이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다. (...)

 

하엽정은 원래 이곳에 있던 파산서당을 개축한 아름다운 건물로 누마루에서 바라보는 연못의 풍경이 사뭇 운치가 있다. 연당은 본채를 지을 때 필요했던 흙을 파낸 자리를 손질하여 만든 것으로 세로로 긴 장방형의 못 가운데는 동그란 섬이 있다. 조선시대 정원을 세울 때 대부분이 이런 형태를 취했는데, 방형의 못은 땅을, 원형의 못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동양적 우주관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내 이르노니 국화는 꽃 가운데군일자요. 모란은 꽃 가운데 부귀자요. 연꽃은 꽃 가운데 군자로다. , 국화를 살아한다는 말을 도연명 이후로 듣기가 어려우니 나와 더불어 연꽃을 사랑할 사람이 뉘 있을까. 모란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많으리라.”라고 노래한 주돈이의 <애련설>에 나오는 연꽃이 무한한 곳이 이곳 하엽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