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독수정, 취가정, 소쇄원, 환벽당, 개선사 터 석등, 식영정, 명옥헌, 송강정

산중산담 2019. 6. 26. 11:28


만개한 배롱나무 꽃 아래에서 여름 한 낮을 노닐다.

만개한 배롱나무 꽃 아래에서 여름 한 낮을 노닐다.

 

201885일 일요일 여름, 대숲이 아름답고 배롱나무 꽃이 아름다운 무등산 자락의 정자여행을 떠납니다.

나라 안에서 배롱나무꽃이 가장 아름다운 명옥헌과 송강정, 식영정, 환벽당 일대의 정자를 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으로 걸을 예정이오니 시간 나시는 분들의 참여바랍니다.

 

 

무등산 자락의 원효계곡

택리지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살만하고 경치가 빼어난 곳이 무등산 자락에 자리잡은 원효계곡 일대이다. 여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이룬 광주호 변에는 16세기 사림문화가 꽃을 피웠던 곳으로 식영정(息影亭), 소쇄원(瀟灑園), 환벽당(環碧堂), 취가정(醉歌亭), 독수정(獨守亭), 풍암정(풍암정楓巖亭) 등의 정자들이 있다.

기름진 들이 널따랗게 펼쳐진 담양에는 큰 지주가 많았고 그 경제력에 힘입어 봉건시대의 지식인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 그들은 중앙정계로 진출했다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이 곳에 터를 잡고 말년을 보내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광주호 상류 자미탄(紫薇灘)을 중심으로 호남가단(湖南歌壇)이 형성되었는데, 그들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16세기 조선사회를 뒤흔들었던 사화(士禍) 때문이었다.

담양군 남면 지곡리 성산星山 자락에 자리 잡은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金成遠)이 스승이자 장인이었던 석천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1569년에 지은 정자이다. ‘식영이란 장자의 고사 중에서 도를 얻은 뒤 제 그림자마저 지우고 몸을 감춘다는 대목에서 따온 것인데 이곳의 경치와 주인인 임억령을 찾아 수많은 문인들이 드나들었다. 송순, 김윤제, 하서 김인후(金麟厚), 고봉 기대승(奇大升), 백광훈, 고봉 송익필, 고경명(高敬命) 등이 그들이었다. 그중에서 김덕령(金德齡), 김성원, 정철, 고경명을 식영정의 4()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후 식영정은 스승의 자취보다 제자 송강의 터로 더 유명해졌다. 김성원의 가계가 몰락한 후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은 송강의 후손들이 이 정자를 사들여 관리해 온 탓에 정자 마당에는 송강문학비가 들어서 있고 입구에도 송강가사의 터라는 기념탑이 서 있다.

세월의 흐름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식영정 근처에는 그 사이 가사문학관이 들어섰지만 그곳으로 오르는 돌계단만은 옛날 그대로이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것은 이미 옛말이고 2년도 안되어 강산이 변하는 세상이다. 광주호가 들어서 옛 모습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지만 댐이 생기기 전 정자 앞의 냇가에는 배롱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어서 자미탄(紫薇灘)이라고 불렀다.

식영정에서 자미탄을 건너 마을길을 버리고 산길을 올라가면 환벽당이 있다. 식영정 아래쪽에 서하당捿霞堂을 세운 김성원과 환벽당을 세운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는 자미탄 위에다 다리를 놓고 서로 오가며 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나주목사로 재직하던 김윤제는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인 충효리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말년을 보냈던 터였다.

취가정醉歌亭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김덕령을 추모하여 지은 건물이다.

김덕령에 관한 이야기가 <여지도서>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김덕령은 귀신같은 용맹함과 정의감을 지니고서 큰 뜻을 품었다. 그런데 유교의 바른 의리를 쌓아 마음이 온화하고 자신의 재주와 덕을 잘 갖추어, 다른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했다. 계사년인 1593년 선조 26년에 왜적이 더욱 함부로 굴 때, 감사, 수령 및 동지들이 서로 권하며 의병을 일으키자, 김덕령은 한창 어머니의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의병을 을이켰다. 임금께서 충용장忠勇將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군사를 이끌고 영남으로 나아가자, 왜적들이 이 소식을 듣고 석저장군石?將軍이라고 말하며 병사들을 거두어 그곳을 피했다. 이 무렵 김덕령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어 안팎에서 교묘하게 꾸며대니, 결국 체포되어 억울한 죽음을 죽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일을 악무목岳武穆(남송의 충신인 악비岳飛를 가리키는 말)공의 죽음에 비유하였다. 일찍이 김덕령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노래 부르는 일일랑 영웅의 할 일이 아니니

차라리 칼춤을 추며 장수의 장막에서 놀리라.

훗날 무기를 씻고 고향에 돌아가는 날이면, 강호에 묻혀

낚싯대 드리울 뿐, 그 무엇을 구하리.

 

이 정자는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金德齡)의 원혼을 위로하고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인 김만식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1890년대에 지은 건물이다. 정자를 짓게 된 사유가 재미있다. 송강 정철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서 벼슬을 하지 않고 야인으로 일생을 보낸 권필(權?)이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그 때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전공을 세웠지만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나타나 한 맺힌 노래 한 마디를 부르는 것이었다.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게 취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또한 뜬 구름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이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내 마음 바라기는 긴 칼로 밝은 임금 바라고저.

 

김덕령의 노래 취시가(醉時歌)를 들은 권필은 꿈속에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지난날 장군께서 쇠창을 잡으셨더니 장한 뜻 중도에 꺾이니 천명을 어찌하랴.” 이 시를 지은 권필은 정철의 문인이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이 오로지 술만 마시고 세월을 보냈다. 광해군 때 척족의 방종함을 비판하는 시를 썼다는 죄로 친국을 받은 뒤 귀양을 가던 중 동대문 밖에서 전송 나온 사람들이 건네준 술을 마시고 그 다음 날 죽었다고 한다.

진나라 때 시인인 도연명의 책자(責子)에 나온 하늘의 운수가 참으로 이러할 진대라는 글이 있다.

 

백발은 양쪽 귀밑머리를 덮고, 피부도 이제는 탄탄하지 못하다. 내 비록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하나같이 종이와 붓을 좋아하지 않는다. 큰 아들 서()는 열여섯 살이나 되었는데, 게으르기가 짝이 없다. 둘째 아들 선()은 열다섯 살이지만 학문에 뜻을 두지 않는다. 그다음 옹()과 단()은 열세 살인데, 여섯과 일곱을 구별하지 못한다. 막내아들 통()은 아홉 살이 되었건만, 배와 밤을 ?을 뿐이다. 하늘의 운수가 참으로 이러할진대, 우선 술이나 들자.

 

한 가문의 운수 뿐만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구국의 행동도 시대와 군주를 잘 못 만나면 운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슬픈 사연들이 얼마나 많은가?

 

명옥헌에는 눈부신 배롱나무 꽃이 피고

담양군 고서면 선덕리에 자리잡은 명옥헌(鳴玉軒)을 조성한 사람은 오명중(1619-1655吳明仲)이었다. 광해군 때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외가가 있는 이곳에 내려와 망재(忘齋)라는 조촐한 서재를 짓고 살았던 아버지 오희도吳希道의 뜻을 이어받고자 1652년 그는 명옥헌을 짓고 연못을 판 뒤 배롱나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배롱나무 꽃이 피어나는 명옥헌이라는 정자이름은 정자 곁을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옥이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담양군 남면 연천리에 있는 독수정은 이백의 시 구절인 백이숙제는 누구인가 / 홀로 서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었네라는 구절에서 따온 이름으로서 고려 공민왕 때 병부상서를 지낸 전신민全新民이 처음 세웠다.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있는 송강정은, 정철이 1584년 동인들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을 그만두고 돌아와 초막을 지어 살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우의정이 되어 조정에 나가기까지 4년 동안을 머물면서사미인곡속미인곡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정철은 가사문학에 뛰어난 업적을 남겨 그의관동별곡,성산별곡,사미인곡은 오늘날까지도 한국문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큼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그러나 당쟁 속에서 서인 편에 섰던 정철은 동인의 영수 이발李潑과의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고 정여립 사건 당시 위관委官을 맡게 되면서 조선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악역을 담당하게 된다. 4대사화보다 더 많은 천여 명의 사람들이 희생된 기축옥사 이후 정철은 정적들로부터 동인백정(東人白丁)’, ‘간철姦澈?독철毒澈등의 칭호를 얻었고 어떤 사람들은 정철과 함께 압록강 동쪽에 태어난 것이 부끄럽다고까지 비난하였다.

송강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사계 김장생金長生이 어느 날 그의 제자에게 군은 정송강을 어떤 사람으로 보는가?” 하고 묻자 제자는 제 부형이 일찍이 그는 청백?강직하고 속이 좁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김장생은 옳다. 그 분이 청백하고 티가 없음을 스스로 믿고 안하무인이어서 마침내 온 세상이 미워하는바 되었으니 정자가 말씀하기를, ‘식견이 높으면 양()이 크다하였는데 이 분은 양이 작고 식견이 높지 못한 소치이다고 하였다.

이율곡 선생 역시 정철은 충성스럽고 청렴하며 굳세고 개결(介潔)했으나, 술을 좋아하여 취하면 반드시 실수를 하니, 식자들이 부족하게 생각하였다고 평한 바 있다.

 

숨어 살 계획 이미 정해져

세모엔 장차 내 떠나가리라.

항상 원하기는 물고기 되어

깊은 물 밑에 잠기고 싶다.

 

이렇게 노래한 송강 정철의 참모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