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에서 달성군 논공읍까지

산중산담 2019. 6. 26. 11:30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일곱 번 째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에서 달성군 논공읍

태백의 황지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일곱 번 째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에서 달성군 논공읍까지-

 

낙동강 천 삼 백리 일곱 번째 여정이 2018824()일에서 26()일까지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에서 달성군 논공읍에 이르는 강 길에서 23일간 실시됩니다.

 

허허 젊은 사람이 오토바이도 못타!

 

길 양 옆으로 펼쳐진 참외비닐하우스로 들어간다. 수확이 끝난 비닐하우스에는 마지막 남은 참외들이 여기저기 열려 있고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철늦은 참외를 따먹는다 훔쳐먹는 사과가 맛있다고 비닐하우스에서 그 유명한 성주참외를 거져 따먹는 맛을 무엇에 비유할까? 금세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고 원두막은 이보다 더 따뜻할 수가 없다. 비는 더욱 세게 내리고 어쩌면 좋지 사진도 찍을 수 없고 메모는 더욱 엄두도 못내겠고 이러다 15KM도 못갈지 모르겠다. 안되겠다 싶어 비가 내리는 데도 비 내리는 길 위에 다시 나선다. 참외밭을 지나 용암면 동락동 봉천동으로 건너가는 가죽정 나루터는 흔적이 없고 가죽나무가 많았다는 가죽정 마을에 이르러서야 나는 비닐하우스에서 지도를 가지고 오지 않았음을 안다. 객지에 나간 아들을 기다린다는 마을 사람들에게 오토바이로 그곳에 가서 가져왔으면 싶다고 요청을 한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오토바이를 빌려줄테니 타고 갔다 오란다. 그러나 자전거도 못타는 내가 무슨 재주로 오토바이를 타고 가겠는가 오토바이를 못 탄다고 말씀드리자. “허허 젊은 사람이 오토바이도 못 타하며 웃음 짓던 그 분은 비옷을 입고 나는 그 오토바이의 뒷자석에 실려 그곳으로 갔다. 지도는 내가 두고온 그대로 남아있었다. 지도여 그대가 없다면 내가 어떻게 논공까지 가겠는가. 거기에서부터 강을 따라가는 길은 없단다. 이 고개마루를 넘어서 끝없이 길을 따라 가란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어디 그런가.

길을 따라가는 중에 산 너머로 가는 샛길이 보인다. 한번 가보자 가다가 안되면 되돌아오지 굽이굽이 돌아가는 고갯길을 넘어 갔는데 내가 가고자한 그 길은 절벽이 가로 놓여 있다. 다시 돌아나오는 그 길의 암담함이여. 그 길을 힘겹게 넘어사자 조암동 마을이 나타나고 나는 그곳에서 트럭에 실려 낙동강변으로 나올 수 있었다.

고령군 다산면 노곡리는 논이 많이 있으므로, 논실 또는 노곡이라 불리는데 제방둑이 시작되는 월암마을 복판에 달처럼 생긴 달바우가 있고 월남 뒤에는 두꺼비 모양 같다고 해서 뚜께비봉이 있다.(...)

 

이곳 낙동강변에서 강은 두 갈래로 흐르고 비내리는 강 건너에서 낙동강에서 두 번째로 긴 지류인 금호강(琴湖江)이 낙동강에 합류한다. 유로연장이 117.5km고 유역면적이 2,053인 금호강은 포항시 죽장면 가사리 가사령(佳士嶺 해발 500M)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죽장면과 영천군 자양면의 중심를 뚫고 임고면 우항동에 이르러, 동쪽으로 흘러 오는 임고천(臨皐川)을 합하고, 영천읍에 이르러 북서쪽에서 흘러 오는 고현천(古縣川)과 신령천(新寧川)을 합한 후 금호강이 된다. 금호면을 지나 경산군의 북부를 가로 뚫고 대구시를 동쪽에서 북쪽을 둘러 서쪽으로 활 모양을 이루면서 달성군 성서면 파호동(巴湖洞)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1984 경북 교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다. “금호(琴湖)는 영천시 서쪽 6km 지점에 있는데 금호읍 남쪽과 북쪽이 구릉지로 호수와 같아 갈대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 비파소리와 같은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하여 금호라고 불렀다고 한다.” 금호강 상류인 영천시 자양면에는 영천댐이 건설되어 있고 대구시의 북쪽을 휘돌아 흐르는 금호강에는 검단공단, 3공단, 비색염산단지 등의 공단들이 들어서 하지만 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경제개발 정책에 의해 들어선 수많은 공장들이 가동되면서 금호강은 1980년대 초부터 오염이 극치를 이룬 죽은강으로 전락되고 말았고 그 물을 받아들이는 낙동강도 오염된 강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금호강이 낙동강으로 접어드는 파호동의 강창마을 서쪽에는 강창덤이라는 벼랑이 있고 파산 아래에는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하여 흐르므로 경치가 매우 뛰어난 곳에 지어진 이락정(伊洛亭)이라는 정자가 있으며 강창 서쪽 궁마산 중허리엔 당나라의 이여송(李如松)이 혈을 지른 곳이라는 혈지른데가 있다. 낙동강이 더러워지기 전에는 이곳에서 잡은 싱싱한 잉어회를 먹기 위해 대구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하는데 강창교 아래를 흐르는 검붉은 물을 바라다보면 그것은 이미 옛날의 이야기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의 상태는 옛날에 비해 크게 나아진 것이다. (...)

 

강을 휘돌아가고 여정은 토촌리에 이른다. 늪이 있기 때문에 토촌이라고 지어진 토촌리에는 달서구 화원동으로 건너가던 사문진 나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나루터에 사문진(沙門津)교가 서있고 그 아래 강물이 여울져 흐르는 곳에서 강태공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문득 사람들은 흐린 물에서 고기를 낚는 사람과 깊은 물에서 고기를 낚는 사람을 혼동하곤 한다”(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는 니체의 외침이 귀를 때린다. 강 건너 달서구 성산동(城山洞)은 화현내면의 지역으로서 선덕여왕 때 쌓은 것으로 전해지는 토성이 있다. 배성포는 성산이 있었으므로 잣미, 잔미 또는 성산이라 불렀다. 웃갓미둘레에는 고려장(高麗葬)이라는 옛 무덤이 30여기가 있는데 신라왕이 성산에 와서 꽃구경을 하다가 죽어서 묻은 것이라고 한다. 강변의 풍경이 마치 꽃동산처럼 아름다워 화원(花園)이라 이름지은 화원에서 고령군 다사면 평리동으로 건너가는 사문진 나루에는 동래(부산), 김해 등지의 장삿배가 소금과 여러 가지 물품을 싣고 이곳에 이르러 대구의 물품을 바꾸는 큰 나루였다.

 

가야산의 노을 붉게 물들고

금호강의 달밤 어부들의 피리 속에 깊어 간다

늙고 늙은 강에 계수나무 솟은 듯

낙동강물 헤치며 돛단배 하나 포구를 찾는다

 

나는 그 옛날 지은이가 알려지지 않은 어느 시인이 배성십경을 읊조려 본다.

1940년 나무를 심어서 유원지를 만든 성산에 있는 놀이터인 화원유원지(花園遊園地)는 산은 비록 낮으나 낙동강 가에 있고, 사방이 틔어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신라 때에는 왕이 이곳에 와서 놀았고, 둘레에 신라 고총이 많이 있으며, 이조 때에는 봉수대를 두어서 성주(星州), 덕산(德山)의 봉화를 받아 마천산(馬川山) 봉수에 응하였다. 하지만 그런 정취는 찾을 수 없고 낙동강 본류의 물이 황토물인데 비하여 금호강과 진전천의 물은 새카만 채로 금그은 듯이 흐르다. 섞일 뿐이다. 흐리고 탁한 물 오염된 물은 아랑곳없이 그 아래에 수백마리의 백로들이 오염된 물을 아랗곳 없이 떼지어 놀고 있다. 달구화, 또는 달구벌이라는 이름의 부족국가였던 대구가 지금의 이름인 대구로 명명된 것은 신라 경덕왕 때인 737년이었다. 조선시대인 1601년 경상좌도와 경상우도가 합쳐지면서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되었고, 그뒤 300여년간 경상도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대구大邱는 감사監司가 있는 곳이다. 산이 사방을 높게 막아 복판에 큰 들을 감추었으며, 들 복판에는 금호강琴湖江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낙동강 하류에 합친다. 고을 관아는 강 뒤쪽에 있다. 일도一道의 한복판에 위치하여 남북으로 거리가 매우 고르니, 또한 지형이 풀륭한 도회지이다.”라고 기록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