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만추晩秋에 지리산 쌍계사와 피아골에서 단풍을 보고 지리산智異山 길을 걷는다.

산중산담 2019. 6. 26. 13:24


만추晩秋에 지리산 쌍계사와 피아골에서 단풍을 보고 지리산智異山 길을 걷는다.

만추晩秋에 지리산 쌍계사와 피아골에서 단풍을 보고 지리산智異山 길을 걷는다.

 

20181111, 늦은 가을 만추晩秋에 지리산 자락의 단풍이 아름다운 피아골에서 단풍을 보고 지리산 길을 걷습니다. 아름다운 다랭이 마을 사이로 이어진 지리산 길은, 지리산 둘레 길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길이며 언제나 가도 다른 모습으로 길손을 맞는 길입니다.

 

길옆으로 펼쳐진 다랑이 논들마다 이 땅을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의 한이 오롯이 배어 있을 것이고 피맡골 또는 피어골로 알려져 있는 저 골짜기엔 어떠한 사연들이 숨죽이고 있는가? 피아골 연곡사 9km(여기는 지리산 국립공원입니다)라고 쓰여 진 골짜기엔 들어서서 가면 발길은 지리산 피아골에 닿을 것이다. 이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단풍이 이 나라에서 가장 붉게 타오르는 피아골이 있고 그 길목에 연곡사가 있다. 그 연곡사에토지에서 서희의 할머니 윤씨부인은 불공을 드리러 갔다. 그 곳에서 김개주라 명명된, 동학접주 김개남을 만난다. 윤씨부인은 아이를 배고 구천(김환)이를 낳게 된다. 구천이는 김개주의 형, 우관스님의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나. 그는 평사리에서 그의 최치수의 아내와 지리산으로 숨어들고 만다.

 

모든 산의 으뜸인 지리산

유몽인은 지리산을 우리나라 모든 산의 으뜸이다하였고 인간 세상의 영리를 마다하고 영영 떠나 돌아오지 않으려한다면 오직 지리산만이 편히 은거할만한 곳이다라고 하였으며, 양성지梁誠之지리산은 창창蒼蒼하게 반공半空에 솟아 있으니 천암만학千岩萬壑鶴에 물방울이 뿌리도다. 동중洞中의 청학靑鶴이 어찌하여 절의 종소리를 듣지 않는가 하고 조롱하리라.” 하였다.

내가 피아골을 넘어 백사골로 가고자 이 골짜기를 처음 들어왔던 때가 79년 가을이었다. 그때만 해도 비포장 길이었던 길옆에는 산밤들이 쩍쩍 벌어졌었고 감나무들은 빠알갛게 반쯤은 익어 가을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연곡사 못 미쳐 마을을 지나다가 보기에는 못생겼지만 제법 열매가 굵은 배나무를 발견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면 안 되지.” 혼자서 중얼거리고 배나무에 올라가 배를 몇 개 따는데 건너편에서 나락을 베던 사람들이 누가 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따느냐고 소리소리 지르는 게 아닌가. 당황해서 내려와 겨우 몇 개를 짊어지고 뛸 듯이 산길을 올라가 좀 전에 딴 배를 꺼내어 한 잎 깨물었다. 달콤한 배 맛이 입안을 스치고 지나갈 줄 알았는데 웬걸 딱딱해서 이빨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독밴가 보다. 지레짐작하고 몇 개 땄던 것마저 다 내놓고 갔다가 나중에야 그 열매가 모과였던 것을 깨달았으니 그때 올라가면서 보았던 그 논 다랭이들은 변함이 별로 없고 길이며 길 앞의 음식점들만 몰라보게 좋아졌다.

피아골 이름만 들어도 섬?했던 피아골은 임진왜란,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한컵 의병전쟁 때 결전의 현장이었고 더구나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의 아지트였기 때문에 토벌대 및 군경과 치열한 접전이 수없이 벌어졌었다. 그때 죽어간 사람들의 피가 골짜기마다 붉게 물들었기에 피아골이라고 붙여졌다고도 하며 그들의 넋이 나무마다 스며들어 피아골의 단풍이 유난스레 붉다고도 한다.

하지만 실제 피아골이라는 지명은 예로부터 이 지역에선 오곡 중의 하나인 피를 많이 가꾸었기 때문에 피밭골이라고 부르던 것이 어느 순간 피아골로 바뀐 것이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 연곡사에서 4km쯤 산길을 오르면 오랜 세월 동안에 다져지면서 만들어진 원시림이 골짜기로 이어져 반야봉, 임걸령, 불무장까지 이어진다. 시월 하순의 단풍은 산을 불태울 듯이 아름답다. 이 골짜기 삼흥소 일대를 홍류동이라고 부르는 데 그것은 불타는 단풍잎으로 산도 불도 사람도 빨갛다는 뜻에서 불리운 말이지만 지금은 이제 새순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봄이기 때문에 단풍잎들의 잔해만이 뒹굴 따름이다. 이 절 연곡사(然谷寺)는 통일신라 진흥왕(545)때 연기(緣起)조사가 창건하였으며 나말여초시기에는 수선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찰이었다.

임진왜란 때에 왜구에 의하여 불에 탄 뒤 인조 5(1627)에 소요대사 태능이 절을 다시 지었다. 연곡사는 그 뒤 영조 21년 무렵에는 왕실의 신주목(神主木 : 위패를 만드는 나무)을 만드는 밤나무를 대는 율목봉산지소로 지정되어 있었고 1895년까지 왕실에 신주목을 봉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밤나무의 잦은 남용으로 문제가 생겼고 그 때문에 절이 망하게 되자 스님들이 절을 떠나 결국 황폐화되었다고 한다.

그 뒤 1907년 전라도의 명장 고광순이 당시 광양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정규군을 격파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이곳 연곡사에 주둔시켰다. 그러나 그 정보를 입수한 일본 수군에 의해 고광순을 비롯한 의병들은 야간기습을 받아 모두 순절하고 말았고 절은 의병들에 의해 불타 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처음 연곡사를 찾았을 때만 해도 1965년에 세워진 작은 대웅전과 요사채만이 남아있는 쓸쓸한 절이었는데 지금은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지금은 어딘지 낯선 느낌을 주고 있다.

부도 중의 부도인 동부도

대웅전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면 두 눈에 미치는 곳 그곳에서 부도 한기가 있다 부도(浮屠)란 이름난 스님의 사리나 그 유골을 안치한 돌탑을 말한다. “부도 중의 부도또는 바라볼수록 아름다운 부도라고 불리고 있는 연곡사의 동부도는 신라 때 만들어진 것은 확실하지만 누구의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도선국사의 것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동부도는 8각 원당형을 기본형으로 삼은 부도로서 형태가 가장 우아하고 아름답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82단의 하대석이 놓이고 하단에는 운룡문이 얕게 조각되어 있다. 중대석은 낮은 편이며 각 면에는 안상과 팔부신중이 조각되어 있고 상대석은 두겹 양련으로 연잎마다 국화 같은 꽃무늬 돋을 새겨 되어있다. 윗면의 탑신림대에는 각 우각마다 중간에 둥근 마디가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조인 가릉빈가를 한 개씩 조각하였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는 시오리가 좋은 길이라 해도 굽이굽이 벌어진 물과 돌과 장려한 풍경은 언제보아도 길 멀미를 내지 않게 하였다라고 소설가 김동리가 그의 단편 소설 <역마>에서 표현한 것처럼 꽃피는 봄날 쌍계사 가는 길은 그윽하고 화사하기 이를 데 없다.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3(724) 의상의 제자 삼법이 창건하였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육조 혜능이 정상을 모셔 삼신산(금강산, 한라산, 지리산을 일컬음) 눈 쌓인 계곡 위 꽃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귀국하여 현재 쌍계사 자리에 이르러 혜능의 머리를 묻고 절 이름을 옥천사라 하였다.

이후 문성왕 2(840) 진감선사가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으며,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임진왜란 때 크게 소실되었으며, 인조 10(1632) 벽암스님에 의해 중건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쌍계사의 좌우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합쳐지므로 절 이름을 쌍계사로 지은 이 절의 초입에는 고운 최치원의 지팡이 끝으로 쓴 글씨라는 쌍계와 석문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쌍계사의 여러 문화유산 중에 가장 돋보이는 것은 국보47호로 지정되어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이다. 경주 초월산의 대승국사비,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 부도비, 보령 성주사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와 더불어 최치원의 사산비문중 하나인 이 비는 쌍계사를 세운 스님 진감선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신라 정당왕 2(887)에 세운 것으로 높이가 3.63m이고 폭이 1m인 검은 대리석비이다. 당대의 문장이었던 최치원이 짓고 쓴 이 비는 특히 그 글씨가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쌍계사에서 나와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는 길에 모암마을이 있다. 모암 북쪽에 있는 골짜기인 맹긴쟁이 고랑은 망건을 쓴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는 곳이고 모암 서쪽에 있는 화전바구라는 바위는 옛날에 사람들이 화전놀이를 많이 했다는 바위다.

신정일의 <섬진강 역사문화 탐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