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의 한옥마을 일대와 미륵사지, 그리고 지리산의 역사 길을 걷는다.2018년 제 14회 길 문화축제
전주의 한옥마을 일대와 미륵사지, 그리고 지리산의 역사 길을 걷는다.
2018년 제 14회 길 문화축제
‘길 위에 역사가 있고, 길 위에 문화가 있고, 길 위에 사람이 있다.‘ 그 길의 역사를 찾아 이 땅을 한 발 한 발 걸어온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에서 제 14회 길 문화 축제를 개최합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 새로운 길이 있다.> 라는 주제로 2018년 11월 10일(토요일)에서 11일(일요일)까지 전주와 진안, 남원 일대에서 이틀간에 걸쳐 진행됩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11월에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에서 제정한 길의 날에 펼쳐지는 제 14회 길 문화 축제는 전주 한옥마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1월 10일 오전에 한옥마을에서 전통 상여놀이를 진행한 뒤, 오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미륵산 일대의 유물들을 찾아갑니다. 왕궁리 오층석탑, 동고도리 석불입상, 쌍릉, 미륵사지 쌍 탑, 연동리 석불을 답사할 예정입니다.
11월 11일, 일요일에는 지리산자락 하동의 국사암에서 쌍계사 일대를 걸으며 단풍을 보고 단풍의 명소인 지리산 피아골에서 연곡사를 거쳐 섬진강으로 이어지는 늦가을의 정취 가득한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조선 초기의 학자인 성임成任은 전주를 두고 “안팎으로 산과 강이 전주의 영역을 휘감아 돈다.”하였는데, 풍수지리상 전주를 행주형(行舟形)이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한 배 가득 싣고서 순풍에 돛을 달아 항로에 오른 배를 지그시 잡아 매어둔 형상이란 뜻이다.
윤곤尹坤의 그의 기에서 “나라의 발상지이며, 산천의 경치가 빼어나다.”라고 하였으며 서거정 기(記)에서 “(전주는) 남국의 인재가 몰려 있는 곳이다. 물건을 싣는 데 수레를 사용하며, 저자는 줄을 지어 상품을 교역 한다”라고 기록하였던 곳이 바로 전주였다. 이 전주에서는 수많은 인물들이 태어났다. 세조 때 우의정을 지낸 이사철(李思哲)과 명종 때 우의정을 지낸 황헌(黃憲),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정언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이상진이 그들이며 기축옥사(己丑獄死) 혹은 <정여립의 난>의 주인공 정여립이 선조 때의 사람이었다.
<주기州記>에 “기름진 땅과 메마른 땅이 섞여 있으며, 사람들의 눈치가 빠르고 영리하다.” 고 실려 있는 이곳 전주를 최충헌에 의해 사록겸장서기(司錄兼掌書記)로 이곳에 왔던 이규보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전주는 완산이라고 부르는데, 옛 백제국이다. 인물이 번호(繁浩)하고 가옥이 즐비하여, 고국(古國)의 풍이 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은 어리석거나 완고하지 않고 모두가 의관을 갖춘 선비와 같으며, 행동거지가 본뜰 만하다. 그러나 완산이란 이름은 근교의 작은 산봉우리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해서 고을의 이름이 되었는지 이상하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조상이 살았다고 해서 객사(客舍) 이름조차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고 붙인 전주에는 호남제일문인 풍남문과 경기전, 오목대, 이목대 등의 문화유산들이 많아 있다. 1894년 5월에는 동학농민군들이 무혈입성을 한 뒤 위하여 전주화약을 맺었던 곳이며 현재의 지방자치제의 효시라 할 집강소를 설치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전주는 현재 문화관광도시를 모색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꿈꾸고 있으며, 전주비빔밥과 한정식 그리고 콩나물국밥이 유명하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진 것들도 많다. “전주 부성의 네 개 문중 호남 제일문인 풍남문만 남아 있고, 그 안에 자리 잡았던 매월정梅月亭이나 진남루鎭南樓. 제남루濟南樓등의 정자와 누각은 사라지고 없으며 오직 옛사람의 글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권근權近이 “큰 고을이 남과 북을 갈라놓으니, 완산이 가장 특기하도다. 천년의 왕기가 모여 있으니, 일대에 큰 토대를 열었구나.” 라고 하였고, 이승소李承召는 “완산은 곱고 새뜻하니, 한 옛날의 명도名都로다.”고 노래한 고을이 전주였다.
신정일의 <두 발로 만나는 택리지> ‘전라도’ 편에서
전주의 옛길과 한옥마을에서 제 14회 길 문화 축제를 열고, 오후에는 익산의 미륵산 일대의 문화유산을 답사할 예정이다. 무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쌍릉과 아름답기로 소문난 익산왕궁리 오층석탑, 미륵사지 석탑, 연동리 석불입상을 보고 그 다음 날인 일요일에는 하동 국사암과 쌍계사에 이르는 길을 걷고, 구례 피아골과 엮고사를 답사하고 아름다운 지리산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길을 걸으며 길의 날인 11월 11일의 의미와 역사와 문화를 되짚어보는 행사에 많은 참여바랍니다.
민족의 성산 지리산, 전북과 전남, 그리고 경남 3개도와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등 5개 시도에 걸쳐 있는 이산을 두고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풍년과 흉년을 모르는 산 지리산”이라고 평했습니다.
“흙의 성질이 두텁고 기름지므로 온 산이 모두 사람이 살기에 알맞은 곳이다. 산 속에는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많은데, 바깥쪽은 좁지만, 안쪽은 넓기 때문에 가끔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곳도 있으므로, 나라에 세금稅金도 바치지 않는다.
땅이 남해에 가까워 기후가 따뜻하므로 산속에는 대나무가 많고, 또 감과 밤이 대단히 많아서 가꾸는 사람이 없어도 저절로 열렸다가 저절로 떨어진다.
높은 산봉우리 위에 기장이나 조를 뿌려 두어도 무성하게 자라지 않는 곳이 없다. 평지의 밭에도 모두 심을 수 있으므로 산 속에는 촌사람과 섞여서 살아간다.
스님이나 속인들이 대나무를 꺾고, 감과 밤을 주워서 살기 때문에 수고하지 않아도 생리生利가 족하다.
농부와 공인들 역시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모두 충족하게 살아간다. 이런 까닭으로 이 산에 사는 백성들은 풍년과 흉년을 모르고 지내므로 부산富山이라고 부른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실린 글이다. 이중환의 말처럼 지리산은 수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육산이다. 그래서 조용헌 선생은 골산(骨山)과 육산(肉山)을 빗대어 ‘사는 것이 외롭다고 느낄 때는 지리산의 품에 안기고, 기운이 빠져 몸이 쳐질 때는 설악산의 바위 맛을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남원의 동쪽에 자리 잡은 지리산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 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리산은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산세(山勢)가 높고 웅대하여 수백 리에 웅거하였으니, 여진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두류(頭流)라고도 부른다. 혹은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하였다 하여 유(流)자는 유(留)로 쓰는 것이 옳다 한다. 또 지리(地理)라고 이름하고 또 방장(方丈)이라고도 하였으니, 두보(杜甫)의 시 「방장삼한외(方丈三韓外)」의 주(注)와 통감(通監) 집람(輯覽)에서 ‘방장이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한 곳이 이곳이다. 신라는 이것으로 남악(南岳)을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다. 고려와 본조에서도 모두 이에 따랐다. 산 둘레에는 십 주(州)가 있는데, 그 북쪽은 함양이요, 동남쪽은 진주(晋州)요, 서쪽에는 남원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기이한 봉우리와 깍은 듯한 절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동쪽은 천왕봉과 서쪽의 반야봉(般若峯)이 가장 높으니 산허리에 혹 구름이 끼고 비가 오며 뇌성과 번개가 요란해도 그 위 산봉우리는 청명하다. 해마다 가을 하늘이 높으면 새매가 북쪽에서 모여드는데 열군(列郡)의 사람들이 다투어 그물을 쳐서 잡는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태을(太乙:북극의 신)이 그 위에 살고 있으니 많은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龍象)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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