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무주구천동을 걷는다.
늦은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무주구천동을 걷는다.
단풍이 아름다운 11월 세째 주 토요일 심신산골의 대명사로 알려진 무주구천동을 찾아갑니다. 무주구천동 33경을 아우르며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걷고, 적상산성과 남대천 자락의 무주를 답사할 이번 여정에 동참을 바랍니다.
관광지로는 많이 찾아간 곳이지만 무주구천동을 천천히 걸은 사람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백련사에서 나제통문까지 아름다운 경치가 33곳에 걸쳐 있는 무주구천동 길을 나무 숲길 우거진 길과 아침가리보다 울창한 숲과 계곡 사이를 헤치고 걸어갈 예정입니다.
“민주지산에서 이어진 덕유산은 흙산으로 전라북도 무주군과 장수군, 경상남도 거창군과 함양군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이 1614미터로 주봉이 향적봉인 이 산은 남서쪽의 남덕유산(1,594m)과 북서쪽으로 적상산을 비롯한 여러 산들이 연달아 서 있다.
덕유산 아래 무주 구천동(九泉洞)은 설천면에서 무풍, 김천으로 가는 나제통문을 기점으로 하여 남쪽으로 덕유산까지의 100리에 걸친 계곡을 일컫는 것이다. 구천동 33경이라고 불리는 이 계곡은 산이 중첩하여 구중천엽(九重千葉) 속 같고 계류는 50리를 걸쳐 꾸불꾸불 흐른다. 특히 이 계곡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 금강으로 접어들고 나제통문에서 백련암에 이르는 덕유산 중턱까지의 50여 리 계곡은 기암과 비경을 이루는 폭포와 소가 곳곳에 펼쳐져 선경을 이루고 있는데 특히 무지개다리가 가로놓여 있는 주변은 절정을 이룬다. 해발 900미터 지점에는 신선들이 노닐었음직한 한가로워 보이는 백련암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한여름에도 솜이불을 덮어야 할 정도로 서늘한 곳이다. 뿐만 아니라 덕유산은 봄의 철쭉,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 중 그 어느 것 하나 다른 명승지에 비해 뒤지지 않은 장엄한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덕유산 정상에는 옛날 이태조가 등극했을 때 설치한 제단의 유적이 있으며 무주구천동에는 암행어사 박문수에 대한 설화가 전해온다,
어느 해이던가 초라한 차림의 박 어사가 깊은 밤중에 구천동에 이르러 불이 켜져 있는 외딴집에 찾아갔다. 마침 그 집에서는 주인인 듯한 한 노인이 젊은 사람을 향해 칼을 들이대며 찌르려 하고 있었다. 주인을 불러낸 박 어사는 왜 그런가하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친절하게 손님을 맞이한 주인은 자신은 구재서라는 서당의 훈장인데, 천석두라는 마을 부자의 흉계 때문에 내일 오후에 부인과 며느리를 천석두에게 뺏기게 되어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네 식구가 함께 죽으려 하는 것이라고 사정을 말했다. 박 어사는 구재서를 안심시킨 뒤 그 길로 밤새 무주현을 향해 가서 황?청?흑?백의 네 가지 옷을 차려 입힌 광대 넷을 데리고 다음날 오후 구천동으로 되돌아왔다. 구재서의 집에 사모관대를 쓴 천석두가 나타나자 갑자기 누런 털이 달린 도끼를 치켜들고 귀신을 그린 깃발을 든 괴물이 들이닥쳐 초례상을 치며 흉측한 저승사자 넷을 불러냈다. 이어 저승사자에게 옥황상제의 명을 받들어 천석두를 잡가라고 하니 결박을 지어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 뒤 박 어사는 천석두를 귀양 보내고 구재서에게는 아들과 며느리를 돌려 보내주었는데, 그 뒤부터 이 마을에 구씨와 천씨가 살았다고 하여 구천동이라 부른다.
십승지지의 한 곳인 무풍
무주군 적상면에 있는 적상산성은 조선 세종 때 축성된 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임진왜란이 끝난 1612년(광해군4)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할 ‘실록전’을 세웠고 1614년에 평안도 묘향산에 안치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이곳으로 옮겨 보관했다.
덕유산 동쪽은 함양군과 거창군이고, 북쪽에는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이 있다. 『택리지』에는 ‘남사고는 무풍을 복지福地라고 하였다.
골 바깥쪽은 온 산이 비옥하여 부자마을이 많으니, 이 점이 또한 속리산 위쪽의 산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라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나제통문의 동쪽에 있는 무풍면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피난하기 알맞은 땅 열 곳, 즉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꼽히던 곳이다. 그래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큰 전쟁이 벌어졌을 때에 이곳에 피난을 왔던 사람들이 많았다. 『무주군사』에 따르면 무주군민의 대부분이 그때에 피난을 온 사람들의 자손으로서 무주군의 대표적인 성씨인 밀양 박씨, 안동 권씨, 문화 유씨를 비롯해서 열여덟 개 성씨(姓氏)의 중시조가 모두 이곳으로 숨어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우리 산하>중에서
무주구천동에 펼쳐진 가을 단풍과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어 있던 적상산성 그리고 남대천의 아름다운 절경을 함께 할 사람들은 미리 접수하십시오.
구천동에 가서 구천동이 되자.
구천동에 가서 구천동이 되자.
무진장, 나라 안에서
가장 오지 중의 오지였고,
가기가 힘들었던 지역 중에서도
가장 먼 곳이
무주, 진안, 장수 중, 무주였다.
무주에서도 가장 먼 곳, 무풍과
설천 두 곳 중 무주구천동을 간다.
불과 몇 십 년 정만 해도
무주구천동의 투표함이 제일 늦게 도착했고,
그래야 개표가 시작되던
그런 시절이 있었던 그곳,
구천동을 간다.
산 좋고 물 좋은 구천동에 가서
천천히 걷다가 보면
하루 한 나절을
자연이 되어 세상을 잊을지도 모를 하루,
그 하루,
“이제 나는 안다.
최고의 인간을 만드는 비밀을,
그것은 탁 트인 대기 속에서 성장하고,
대지와 함께 먹고,
자는 것,“
로빈슨 제퍼스의 <최고의 인간>이라는 글이다.
그렇다. 단 하루만이라도,
단 몇 시간만이라도
최고의 인간이 되어
자연 속에서 자연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거닐게 도리 그곳에는
온갖 것을 꽃피웠다가
다 떨어뜨린 채 서 있는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내 집 앞에
필시 오랜 세월 동안 서 있었을,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
언제나 그곳에 있다.
아침에
나는 그 옆을 지나가고,
저녁에는
그 밑에 서서
가만히 그 나무를 바라본다.
언제까지 바라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한 그루의 외로운 나무여.“
로칸의 <나무 한 그루> 같은 그 나무들이
우리들은 그 나무 아래에서
그냥 나무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가만히 그 자리 지키고 있는 바위가 되고,
구천동에 가서 구천동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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