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속리산 국립공원의 구병산자락 단풍과 선병국 가옥을 보고 삼년산성을 걷는다.

산중산담 2019. 6. 26. 13:21


속리산 국립공원의 구병산자락 단풍과 선병국 가옥을 보고 삼년산성을 걷는다.

속리산 국립공원의 구병산자락 단풍과 선병국 가옥을 보고 삼년산성을 걷는다.

 

2018년 가을 11월의 첫 번째 일요일 보은 일대를 찾아갑니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과실 중에 대추, 그 대추 맛이 기가 막히는 보은으로 갑니다.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하는 구병산 자락에 나라 안에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한 선병국 가옥이 있고 동학농민혁명의 자취가 서린 장내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산성 중에서도 가장 절묘하게 쌓았다는 평을 듣는 삼년산성을 도보답사 할 예정입니다.

보은 하면 떠오르는 산은 속리산이다. 맛은 무엇일까? 단연 대추가 보은을 대표하는 맛이다. 그래서 대추에 대한 속담도 많이 있다. “청산靑山 보은報恩사람 대추 자랑하듯 한다.”는 속담은 청산 보은 사람들이 대추를 자랑하듯이 대단치도 않은 것을 가지고 크게 자랑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청산 보은 색시 입 마냥 뾰족하다.”는 말도 있는데, 이 지역 처녀들이 대추를 많이 먹기 때문에 입이 뾰족하게 되었다는데서 유래한말이다

속리산 자락 아래에서 자란 대추가 얼마나 맛이 좋은지는 그곳에 가서 먹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지만 속리산 일대의 경관이 빼어난 것도 역시 가서 보아야만이 알 것이다.

 

서원리에 천연기념물 제352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이품송정부인 소나무가 있다. 나무높이가 15m인 이 소나무는 지상 70cm 높이에서 2갈래로 갈라졌는데, 갈라진 줄기의 밑 둘레는 각각 3.3m2.9m이다. 수관(樹冠) 너비는 동서가 23.8m, 남북이 23.1m로서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된다.

이 소나무는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는 서낭나무로 이곳에서 멀지 않은 법주사 입구에 있는 정이품송과 내외지간이라는 전설이 있기 때문에 정2품송 정부인貞夫人 소나무라고도 부른다. 정이품송이 외줄기로 곧게 자란 남성적인 모습인데 비하여, 서원리 소나무는 우산모양으로 넉넉하게 퍼진 품을 갖는 아름다운 모습이 여성적으로 비유되므로 암소나무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서원리 황해동에서 안돌이로 넘어가는 고개를 돌고개라고 부르며, 황해동에서 내속리면 갈목리 갈미기로 넘어가는 고개를 희넘이재(회월티)라고 부른다.

 

속리산에서 흘러내린 삼가천의 맑은 물이 큰 개울을 이루고 개울 중간에 돌과 흙이 모여 삼각주를 이루었다. 그래서 배 모양 같은 섬이 되었는데 이와 같은 곳을 풍수지리상에서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명당이라 이른다.

연화부수형의 자리에 터를 잡으면 자손이 모두 원만하고 또한 고귀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룬 중앙에 99칸의 큰 기와집으로 한껏 멋을 부려서 지은 집이 중요민속자료 134호로 지정된 보은선병국가옥(報恩宣炳國家屋)이다.

몇 년 전에 간장 한 병이 거금 5백만 원에 거래되었다고 각종 언론매체에 소개 되었던 집이 바로 이집이다. 다른 것도 아닌 간장이, 대부분의 집에서 다 담그는 간장, 대두병 한 병이 몇 만원도 아니고 오백만원에 거래 되었다는 것은 큰 뉴스 꺼리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다 보니 그 집이 어느 곳에 있는 누구 집인가 궁금해 하는 이 집을 지은 선씨는 보성 선씨로 원래 고흥에서 살다가 백여 년 전에 이곳으로 터를 옮겼다. 그 뒤 1919년에서 1921년 사이에 이집의 주인 선정훈이 당대 제일의 목수들을 가려 뽑아 후하게 대접하면서 이상형의 집을 지었다고 한다. 이 집의 특징은 사람이 살면서 요긴하게 공간을 이용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이 시기에는 개화의 물결을 타고 이른바 개량식 한옥의 구조가 시험되던 때이기도 하여서 재래식 한옥으로 질박하게 짓기보다는 진취적인 기상으로 새로운 한옥의 완성을 시도했다고 한다.

이 집은 그런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특색 있게 지어졌으므로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80년 수해 때에 돌각담들이 무너져서 아늑하여 유연하던 분위기가 많이 흩어졌다. 대문 맞은편에 돌각담을 두른 일곽이 있고 그 안에 여러 채의 부속 건물들이 있었으나 6·25사변 이후 무너져서 지금은 볼 수 없다.

변한 것이 그것만이 아니다. 소슬대문과 조선소나무 숲은 옛날처럼 여전하지만 세월 속에 선병국 가옥의 행랑채는 고시촌으로 변해 버렸고, 사랑채는 찻집이 되었다. 선병우 가옥은 음식점이 되어 그 집을 찾는 내방객들을 맞고 있어서 우주순환의 이치를 실감할 수 있다.

 

이곳 보은지역은 대전, 청주, 상주, 영동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가 영토를 다투던 접경지역이었다. 보은의 북쪽에 우리나라 산성을 대표할 만한 석축산성인 삼년산성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년산성(三年山城)은 신라 자비왕 13(470)에 상주의 사벌성(沙伐城)을 점령한 신라가 보은으로 나와 쌓은 것이다. 이 성은 백제의 남진에 대비하고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서북지방으로 진출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전초기지가 되었다. 즉 삼년군 지역의 확보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삼국시대에는 보은 일대를 삼년군(三年郡) 또는 삼년산군(三年山郡)으로 불렀기 때문에 성 이름이 삼년산성으로 불린 듯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으로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오항산성(烏項山城)으로, ?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이 있다고 하여 오정산성(山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소지왕 8(486)에 이찬 실죽(實竹)을 장군으로 삼아 경상도 일선(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일대)의 장정 300명을 징발하여 개축하였다고 한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민가 스무 가구쯤이 있어서 성 안의 마을을 삼년성 그리고 성 밑의 마을은 성밑이라고 불렀다는데, 민가는 성 밖으로 옮겨가고 현재 성 안에는 보은사라는 절이 하나 있을 뿐이다.“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