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여기 저기 들려오는 말들이 많이 있다.
나라의 아파트 값이 한 달 새 2억이 올랐느니,
1억이 올랐느니, 그 말 뒤에는 서울만 그렇지
지방은 그와 다르다는 말도 나온다.
물론 집값이 오르면 좋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한 집 가지고 산다면
그 집이 2억을 한들, 백억을 한들 무슨 소용이야,
아파트를 장난감 모으듯 세 개, 네 개, 열 개, 스무 개 백 개를 모은다면 몰라도,
그렇게 모은 집값이 천정부지처럼 오른다면 마음이 편할까?
이렇게 요지경 같은 세상 어떻게 살면 좋을까?
사는 곳을 그냥 집이라 여기고, 걸어가는 곳을 길이라 여기며,
작고한 가수 최희준의 노래 같이 하숙생처럼 사는 것이 가장 편한 삶의 자세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 요즈음 세태다.
길도 집이고, 집도 길이 아니던가,
먼 길 떠났을 때에는 길만 가지런히 나 있어도 행복하고,
가다가 머물 집만 있어도 행복한 것이 나그네인데,
무엇이 그리 모자라서 매일, 더 많은 돈, 더 많은 집, 더 많은
그 더 많은 것들을 갈망하느라 지금의 ‘나‘ 에 만족하지 못하고,
매일매일 허기진 모습으로
아등바등 살아가는지,
“해와 달은 백년 과객이며, 오고 가는 해 또한 나그네이다.
뱃전에 생애를 띄워 보내고 말고삐 붙잡은 채,
늙음을 맞는 사람은 나날이 나그네길이며.
나그네길이 내 집이다.
옛 사람도 무수히 나그네 길에서 생을 마쳤다.
나도 언제부턴가 조각구름을 쓸어가는 바람에 이끌려,
방랑벽을 가눌 수가 없구나.” 바쇼의 <오쿠노 호소미치> 라는 글이다.
평생을 길에서 맞고 보낸 바쇼의 글과 같이
우리 모두는 긍정하건 부정하건 나그네이고,
매 순간 우리 모두는 길 위에 있다.
단지 그것을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그 차이일 뿐이다.
외로운 인생길에서 시절 인연으로 만나서
살다가 가는 삶,
그래서 그 시절 인연들이 순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던 사람일지라도
얼마나 지극한 인연에 의해서 만나고 사는 것인가를
이즈막에 절절히 실감한다.
“하늘하늘 더욱 함초롬하다. 마타리 물꽃,
한적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울음,
거친 바다여, 사도 섬에 가로놓인 은하의 강,
병든 기러기 추운 밤 날다 떨어져 길에서 자네.
외로운 이 길, 오가는 이 없는데, 가을 해질 녘“
일본의 하이쿠 시인 바쇼의 시 구절 같은 계절이
저만치에서 빗줄기 속에 성큼성큼 오고 있다.
나뭇잎이 온갖 형형색색으로 치장하고 있다가
우수수 질 때 그 길을 걷고 또 걸어갈 우리들,
너무 애잔하지 않은가?
‘나그네는 길 위에서도 쉬지 않는다
보고 싶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
보고 싶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
이 책도 보고, 저 책도 보고,
방안에 널려 있는 책들, 요즘 내 방안을 어지럽히고 있는 책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부분,
이탈리아, 그것도 피렌체하고 베네치아에 관계된 서적들이다.
그러다가 보니, 단테가 등장하고, 베아트리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어디 그뿐인가. 마르코폴로와 마키아벨리와 로버트 브라우닝이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브라우닝과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곳,
그리고 <냉정과 열정 사이>의 쥰세이와 아오이가 만난 두오모까지
여러 갈래의 것들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그 땅에서 펼쳐진 역사와 문화,
7박 8일 간의 여정이 문제가 아니라, 그 동안에 해 놓고 떠나야 할
수많은 일들, 그 일들이 나를 얽매고 있어
자발적으로 자유를 반납하고 즐거우면서도 괴로운 일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떠난다.
어떻게 떠날 것인가?
“이제 짐을 꾸리는 일이 어렵지 않다.
내게 그토록 사랑스럽고 소중했던 모든 것을
뿌리치고 떠나왔지만 지금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너무 많은 준비를 한다는 말이 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내일이면 나는 나폴리로 간다.
나는 저 낙원 같은 자연 속에서 새로운 자유와 기쁨을 얻을 것이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중에 실린 글이다.
그렇다. 며칠 간의 여정인데도 왜 그리 준비할 것이 많은지,
‘먼 길 떠날 때는 눈썹까지 빼놓고 가라.’는 말을 나는 잊었는가?
나는 내일 떠나지 않고 며칠이 더 남았고,
그 동안에도 이 일, 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일을 일이라 여기지 않고, 노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내가
단테가 걸었던 그 길, 피렌체의 성당과 광장, 그리고 골목길에서
나는 지나간 역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게 햇살에게 묻고 또 물을 것이다.
베네치아 사람으로 오랜 나날을 길에서 보내다가
원 나라에서 돌아와 <동방견문록을>을 남겼던 사람이 마르코 폴로다.
마르코 폴로가 임종 시에 친구들은 <동방견문록>에 썼던 거짓들에 대해 참회하라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아직 내가 본 것의 절반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이번 이태리 기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보고 싶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를 창조했다는데,
나는 어떤 것들을 보고, 느끼고 돌아와
내 남은 생에 자양분을 만들 수 있을지,
자기를 오롯이 지키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자기를 오롯이 지키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이 태어나서 한 생애를 살면서
어느 시기를 지나면
오롯이 자기를 그대로 지키고 살 수 있을까?
어떤 세상의 큰 바람에도, 욕심이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만의 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한 사람, 사람 모두, 한 사물, 사물 모두가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선 모든 사람들이 말하고, 갈망하는 정의를 놓고 보자,
“절대적인 정의라는 것은 없다.,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일리인의 <인간의 역사>에 실린 글이다.
공동체의 정의나. 인류애적인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하고 같은 생각,
나하고 친한 사람, 나하고 같은 집단, 그리고 오직 나에게 유리한 것이
‘정의’고 나에게 불리한 것은 ‘불의’ 라는 말이다.
이런 세상에서 제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난망한 일이다.
이런 때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현명하고 자제심이 있는가?
가난도 죽음도 쇠사슬도 그를 전율케 못하는가?
그는 자기 정열을 억제하며 명예를 경멸할 수 있는가?
전적으로 자신 속에 유폐되어, 마치 어떠한 외적 물체도
그 굴러가는 것을 막지 못하게 둥글고,
매끈한 공과 같이 운수의 뭇 침해에도
태연자약, 동요함이 없는가?“
호라티우스의 글이다.
지금의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이렇게 살 수 있는가?
행여 라도 내 일신상의 작은 피해라도 있을까 싶어서
몸을 사리고 사는 사람들, 나도 그중 한 사람인데,
이렇게 살아서 되는 것이 삶인가?
자꾸 묻고 또 물으며 사는 삶,
이래도 세상은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자위하면서 살아도 되는가?
묻고 또 묻는 시간이 새벽을 향해 가고 있는 시간 속에
어느 새 구월이 왔구나.
켜켜이 쌓인 한은 그리움이고 슬픔이다.
켜켜이 쌓인 한은 그리움이고 슬픔이다.
누구일 수도 있고, 무엇일 수도 있는 것을 마냥 기다릴 때가 있다.
언제, 어느 때 올지도 모르는 그 기다림,
그 기다림이 아침 일찍, 아니 신 새벽부터,
저녁 해가 어스름해지고, 어둠이 대지에 검은 커튼을 드리우도록
이어질 때도 있지만,
아침나절에 그 기다림을 포기하고, 아무 생각 없이 이 책 저 책만
뒤적일 때가 있다.
오기는 올까? 아냐, 안 올지도 몰라,
하고 기다리는 시간,
“오마지 않는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열린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육당 최남선의 <혼자 앉아서>라는 짧은 글 한편이다.
그러나 그 기다림을 다르게 표현한 사람이 있다.
“기다림은 길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히려 짧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다리는 동안엔 시간을 이용하거나,
적극적으로 살지 않아도 기다림이
시간의 모든 공간을 소모해 버리기 때문이다.“
토마스 만이 시간의 흐름을 세밀하게 묘사한 소설
<마의 산>에서 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기다리는 것,
아니 내 의식이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몸이 살아 있는 한,
우리의 억누를 길 없는 그리움이 살아 있는 한,
우리들 마음속에, 몸속에 찍힌 채 지워지지 않는 무수한 풍경들,
우리들의 영혼 속에 찰칵찰칵 빠르게 넘어가는 그리움의 환등幻燈,
더러는 선명하게, 더러는 어렴풋하게,
더러는 천연색으로. 더러는 흑백으로, 더러는 무성無聲으로,
더러는 슬로우 모션으로 명멸하는 꿈의 사진들,
-그 모든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 ‘삶의 공간’이다.”
김화영 선생의 <공간에 관한 노트> 서문 (무성)(환등)에 실린 글과 같이
기다림은 설명하기조차 힘든 어떤 그리움이 아닐까?
그런 그리움은 쓸쓸함이고, 외로움이고, 그리고 어떤 때는 체념일수도 있는데,
<회심언>은 그와 다른 형태의 그리움을 말하고 있다.
“홀로 즐기는 것도 좋지만 홀로 근심에 젖어 있는 것도 좋다.
이때 홀로 근심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모두 보통
세상 사람들이 하는 근심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대략 아득한 천고를 향한 그리움이거나 이런 저런 일로
홀로 걸어가는 한스러움 같은 것들이다.”
한이 많아서 길을 걷고, 한이 많아서 글을 쓰는 나에게
그리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운 것들을 찾아서 떠난 여행, 청룡사, 석남사는 보수중이었고,
칠장사는 너무도 변한 모습으로 나를 맞고 있었다.
변하고 또 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란 것을 잘 알면서도,
조금은 옛 모습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도
그리움 때문이라라.
그리움이 진해서 살아가는 나,
그리움은 켜켜이 쌓인 한이고 슬픔이다.
서둘러서 삶을 ?아가다니?
서둘러서 삶을 ?아가다니?
한 남자가 한 눈 팔지 않고 급히 가고 있었다.
랍비가 그 사내를 불러서 물었다.
“왜 그렇게 급히 서두르고 있습니까?”
“삶을 쫓아가려고 합니다.”
“어떻게 그걸 할 수 있습니까?”
랍비는 계속해서 뛰어가며 말했다.
“삶을 쫓아가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단 말이죠?
그러나 실제 삶은 당신 뒤에 있고, 당신을 쫓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가만히 기다리면 됩니다.
그렇게 서두르면 오히려 삶에서 도망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가다가 보니 오늘에 이르렀고,
지금도 나는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가다가 멈추는 곳이 내가 머물 곳이고,
머물다 가는 길이 나의 길이다.
“현명하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서나 반드시 무엇인가를 발견해낸다.
강하다 하는 것은?
“자기감정을 억제할 수 있다.‘
부자라고 하는 것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존경받는 다는 것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을 존경하는 사람, “
랍비의 말이다.
지금의 나를 내가 긍정하고,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모든 사물들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행복인데,
가끔씩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으니,
하물며 다른 사람이나 사물은 무슨 말이 필요하랴.,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말아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말아라.“ <이사야>6-9절에 실린 글이다.
그러나 히브리 원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져 있다.
“듣고 들어라. 그리고 깨달으려 하지 마라.
보고 보아라. 그리고 알려고 하지 말라.“
그저 멍한 채 살다가 영문도 모르고 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인데, 안다고 해서 얼마나 알겠다고,
이리저리 헤매며 허둥지둥 살고 있는지,
신 새벽에 내리는 저 빗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저렇게 생각에 잠기는 시간,
내가 온전할 때 세상이 온전하다.
내가 온전할 때 세상이 온전하다.
누가 말했다.
“조사祖師들의 묘한 도를 알 수 있는가요?”
“그 말에 대답했다.
“옛 적에 말하지 않았던가, 도는 앎에도 속하지 않고,
모름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안다고 하면 망상이고,
모른다고 하면 헤아림이 없는 것이다.
만약 참으로 의심 없는 경지에 이르면,
오히려 커다란 허공이 펼쳐져 있는 것과 같거늘,
어찌 구태여 시비를 가리겠는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조사들이 세상에 나왔어도,
중생에게는 보탬이 되지 않는가요?”
다시 말했다.
“부처나 조사가 나서서 사람들에게 법을 준 바는 없다.
다만 중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본성을 보게 했을 다름이다.”
<진심직설>에 실린 글이다.
옛날 뛰어난 선사나 조사들은,
그 도를 말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문을 들어서면,
몽둥이로 때리기도 하였고. 고함을 지르기도 하였으며,
벼라 별 신기한 기행이적으로,
중생들이나 제자들에게 도의 이치를 전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이차 삼차 방정식으로도 풀기 어려운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야 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쉽게 보지만
정작 보아야할 자신의 허물에는 어둡다.
그리스속담에는 이런 것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앞뒤에 하나씩 자루를 달고 다닌다.
앞에 있는 자루에는 남의 허물을 모아 담고,
뒤에 있는 자루에는 자기의 허물을 주어 담는다.“
뒤에 있는 자신의 허물을 담는 자루는
자기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반대로 남들 눈에는 잘 보인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칼린 지브란 <두개의 허물 자루>에 실린 글이다.
솔로몬의 지혜로도 가능하지 않는 국제관계,
그것도 조금씩 양보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양보가 힘의 논리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는
여간해서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저기 불협화음이 끊이질 않고,
누구나 겨울 냇물을 건너듯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와 자기 허물들을 잘 모르면서
남의 존재와 남의 허물만 탓하는 것이
이 세상의 진리로 자리 잡은 지 너무 오래,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끼어들 수도 없는 어정쩡한 존재인 우리들,
그냥 속만 탈 뿐이다.
어느 누가 남의 꿈을 엿볼 수 있단 말인가?
단지 ‘나하고 생각이 같으면 군자고,
나하고 생각이 다르면 소인.’인 이 시대에,
분명한 것은 내가 온전할 때 세상이 온전하다는 것이다.
세상의 질서가 바로잡히길 간절히 염원할 뿐이다.
내가 온전할 때 세상이 온전하다.
내가 온전할 때 세상이 온전하다.
누가 말했다.
“조사祖師들의 묘한 도를 알 수 있는가요?”
“그 말에 대답했다.
“옛 적에 말하지 않았던가, 도는 앎에도 속하지 않고,
모름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안다고 하면 망상이고,
모른다고 하면 헤아림이 없는 것이다.
만약 참으로 의심 없는 경지에 이르면,
오히려 커다란 허공이 펼쳐져 있는 것과 같거늘,
어찌 구태여 시비를 가리겠는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조사들이 세상에 나왔어도,
중생에게는 보탬이 되지 않는가요?”
다시 말했다.
“부처나 조사가 나서서 사람들에게 법을 준 바는 없다.
다만 중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본성을 보게 했을 다름이다.”
<진심직설>에 실린 글이다.
옛날 뛰어난 선사나 조사들은,
그 도를 말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문을 들어서면,
몽둥이로 때리기도 하였고. 고함을 지르기도 하였으며,
벼라 별 신기한 기행이적으로,
중생들이나 제자들에게 도의 이치를 전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이차 삼차 방정식으로도 풀기 어려운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야 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쉽게 보지만
정작 보아야할 자신의 허물에는 어둡다.
그리스속담에는 이런 것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앞뒤에 하나씩 자루를 달고 다닌다.
앞에 있는 자루에는 남의 허물을 모아 담고,
뒤에 있는 자루에는 자기의 허물을 주어 담는다.“
뒤에 있는 자신의 허물을 담는 자루는
자기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반대로 남들 눈에는 잘 보인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칼린 지브란 <두개의 허물 자루>에 실린 글이다.
솔로몬의 지혜로도 가능하지 않는 국제관계,
그것도 조금씩 양보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양보가 힘의 논리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는
여간해서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저기 불협화음이 끊이질 않고,
누구나 겨울 냇물을 건너듯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와 자기 허물들을 잘 모르면서
남의 존재와 남의 허물만 탓하는 것이
이 세상의 진리로 자리 잡은 지 너무 오래,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끼어들 수도 없는 어정쩡한 존재인 우리들,
그냥 속만 탈 뿐이다.
어느 누가 남의 꿈을 엿볼 수 있단 말인가?
단지 ‘나하고 생각이 같으면 군자고,
나하고 생각이 다르면 소인.’인 이 시대에,
분명한 것은 내가 온전할 때 세상이 온전하다는 것이다.
세상의 질서가 바로잡히길 간절히 염원할 뿐이다.
그대는 맑고 장미 빛 감도는 어느 아름다운 가을 하늘입니다.
그대는 맑고 장미 빛 감도는 어느 아름다운 가을 하늘입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립니다.
가을 비, 이 비 그치고 며칠 후면 추석입니다.
민족의 명절 추석, 그 추석을 올해
다른 나라에서 답사를 하기 위해 곧 떠납니다.
매일 떠나고 돌아오는 그 답사처럼
떠남은 돌아옴을 전제로 하고 갑니다.
가면서도 왜 그렇게 못 다하고 가는 것이 많은지,
마음이 편치 못하지만,
그래도 예정된 것 떠났다가 돌아와서 하리란 마음 하나로
떠납니다.
오매 단풍 들겠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리.
바람의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 시인의 시 <오매 단풍 들겠네.>
며칠 후 돌아오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테지요,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단풍이 속으로 물드는 계절,
추석을 맞아 보들레르의 시 한 구절로 선물을 대신합니다.
“그대는 맑고 장미 빛 감도는
어느 아름다운 가을 하늘입니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추석을 보내시기를,
늦은 밤에 돌아와서 방문을 열며,
늦은 밤에 돌아와서 방문을 열며,
늦은 열한 시 심야버스에 타고서
의자를 약간 뒤로 젖히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보니,
어느 새 잠이 들었고,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면서
흔들리다가 느닷없이 불이 켜졌고,
그곳이 중간 기착지인 탄천이라는 것을 알았고,
다시 버스가 어딘가로 가는가 싶더니,
종점 전주 고속버스터미널이다.
다른 일행들보다 하루가 더 걸린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열자
내가 읽다만 책은 그대로 펼쳐져 있고,
내 방은 떠난 그 당시 그대로다.
사실 오랜 시간이 아니었다. 5박 6일,
그 사이에 이 것 저것을 보았다고 해서 세상이나
나의 일신상에 무슨 큰 변화가 있겠는가?
그것도 내 집, 내 방에, 그런데도 떠나고 돌아옴은
항상 불안과 함께 설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가고 가고 가는 가운데 알게 되고,
행하고 행하고 행하는 속에 깨닫게 된다.“
去去去中知 行行行裡覺 여해의 이 말은 언제나 맞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부단히 떠나야 하고,
그리고 돌아오다가 어느 날 떠남을 멈추는 순간,
삶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아가지 않고 머무르고 있는 것은 삶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단히 떠나고 떠남을 멈추지 말 것,
그것을 이 새벽에 방문을 열며 느낀 것이다.
가고 또 가고 가다가 세상의 끝으로 가는 그 시간까지
걸어갈 길, 그것이 내 길이다.
다시 어제 걸었던 무너져 가던 만리장성과
그 사이 사이 핀 채 흔들리던 붉은 빛깔의 구절초가 문득 그립다.
검고도 검은 창을 닫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검고도 검은 창을 닫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중국 여행에서 돌아와 이런 저런 일로 하루를 보냈다.
그 중 여행을 떠났던 짐을 풀고, 다시 떠날 여행 짐을 꾸리는 것도
이 일, 저 일 중 한가지였다.
이렇게 바쁘게 보낸 날들 때문에, 나는 한 참 동안
본격적인 책과 글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냥 분주하게 아니, 더 자세히 묘사한다면 멍한 채
하루를 보내고 다시 또 새로운 새벽이다.
어떠한 것도 내 영혼의 창에 침범하지 못하게
꼭꼭 숨겨두고 희미한 불빛조차 새어나가지 않게
검고도 검은 창을 닫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어쩌면 절대 고독 속에서 숨어 살았던 그 때가
행복했을까? 아니다.
그 때는 ‘고독孤獨’이라는 그 위대한 단어를 제대로 알지도 못했으며,
그냥 쓸쓸했고, 암담했고, 그냥 도피처가 없다는 것에
절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혼자 있다는 것은 외로움만일까? 아니다. 설명할 수 없는 충만감을
혼자서 있을 때 느낀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신반의 하거나
아예 믿을 생각조차 하지 않지만, ‘혼자‘ 있을 때
자기 자신의 숨겨진 본질을 찾아내는 순간,
철저하게 자기가 되는 것이다.
“모든 작가들은 불행하다.
책에 묘사되어 있는 세계는 너무나 암담하다.
아무런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행복하다.“
버지니아 울프가 1940년 9월에 쓴 일기다.
가끔씩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내가 진정한 나를 만나는 것이다.
특히 작가로 살아가면서 가끔, 그렇다. 가끔씩 책이 쓰여 지지 않거나.
책이 읽히지 않을 때가 있어서 말라르메의 <백지의 현기증>을 실감한다.
이도 저도 아니고, 그 어떤 실마리도 풀리지 않아. 무심히 바라보고
침묵으로 맞고 보내는 시간, 그 시간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아직도 나는 침묵 속에서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아직도 세상에 벌린 일들이 많고, 그 많은 일들이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하기도 하고
나를 쓸쓸하게도 한다.
나여!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는가?
하고 두리번거리지만
어디에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나’여!
태풍 속으로 떠나는 여행,
태풍 속으로 떠나는 여행,
가을이다. 하늘은 높고, 구름은 창공에 둥둥,
그런 가을이 얄미웠던지 태풍 짜미가 북상중이라면서
구름이 점점 하늘을 뒤덮고 있다.
어제 낮만 해도 오늘 떠나는 시코쿠 답사 여정 때문에
설왕설래 말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가 가는데 태풍이 우리의 길을 막을까? 아니라는데 동의하고
조금 있다가 시코쿠로 가기위해 새벽 버스를 타야 한다.
새벽 두시 30분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는 시간을 어기지 않고
예정대로 떠날 것이다.
그래, 내가 정하고 내가 지켜야 하는 그 시간을 맞추기 위해
나는 깊은 잠에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잠이 들지를 않았다.
시간, 1분이라도 늦어서는 안 되는 시간,
그 시간에 대해 ‘인간은 유한한 시간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
보들레르는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남겼다.
“오, 이 괴로움이여! ‘시간’은 생명을 좀 먹고,
이 보이지 않는 원수는 우리 심장을 갉아먹어,
우리가 잃은 피로 자라고 튼튼해진다.“
어길 수도 없고, 지키기도 힘든 그 시간을 두고 보들레르는
단호하게 ‘원수怨讐’라고 지칭한 것이다.
원수, 그래서 정현종 시인은 ‘가을 원수 같은’ 이라는
시를 남겼는지도 모른다.
가을이구나, 빌어먹을 가을,
우리의 정신을 고문하는,
우리를 무한 쓸쓸함으로 고문하는,
가울, 원수 같은, 나는 너에게 살의를 느낀다.
가을 원수 같은,
그 원수 같은 가을의 한복판에
짜미가 기세 좋게 오키나와를 통과해
일본 본토를 향해 올라온다는데도
일본으로 가기 위해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이것 역시 이미 오래 전에 정한 시간의 굴레에서
벌어지는 한 축제의 일환인지도 모르지만
아슬아슬한 것이 없고 너무 평온한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 삶은 얼마나 삭막할까?
떠남과 돌아옴이 이미 예정되어 있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사실 별 재미가 없는 일이다.
보들레르는 이렇게 노래했었지,
“얄궂은 운명, 목표는 수시로 바뀌어
아무데도 없는가 하면, 어디에나 있을 수도 없고,“
이런 떠남이 진정한 여행이고, 여행자의 자세일 것인데.
나뿐만 아니라 요즘 사람들은 너무 풍요롭게 떠나는 것은 아닐까?
이탈리아로 떠났다가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나
다시 중국으로 나갔고, 다시 돌아와 곧, 일본의 시코쿠로 떠나는데,
내 짐은 너무나 무겁다. 먼 길 떠날 때는 눈썹조차 빼놓고 떠나라 했는데,
이것도 필요할 것 같고, 저것도 필요할 것 같고 해서 주섬주섬 넣은 내 짐이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그러면서도 설렘 가득한 나라로 같이 떠난다.
그래, 떠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이 가을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떠나서 보고 느끼고 이해하자,
예기치 않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갈망하며,
여행은 인생에 활력을 불어넣고, 삶을 자유롭게 하는 최상의 항로,
여행은 인생에 활력을 불어넣고, 삶을 자유롭게 하는 최상의 항로,
정신없이, 아니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게 바쁘게 지낼 때가 있다.
2018년 9월초부터, 10월초까지 한 달이 그러했다.
여기인가 싶으면 저기에, 저기인가 싶으면 여기에 ‘가고 오고’ 하다가
보내고 정신을 차리자 10월이다.
구월이 가고 어느 새 시월이 왔다. 내가 사랑하는 시월,
시월, 초나흘, 한밤에 혼자 불빛 두 개가 영롱하게 빛나는
창문과 마주하고 의자에 앉아
세 개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정신없이 보낸 지나간 세월을 회상한다.
알베르 카뮈는 피렌체를 두고 말했지.
“피렌체! 나의 반항의 중심에는 동의가 잠자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준
유럽에서 드물게 보는 장소의 하나,
눈물과 태양이 뒤범벅이 된 창고에서 나는 대지에 동의하고,
그 축제의 어두운 불빛 속에서
몸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나 역시 그렇게 오랫동안 세상을 돌아다녔어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구나, 이렇게 놀라운 일들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이렇게 놀라운 장소들이 내 시선 속에,
내 마음 속에 미치지 않는 곳에서 숨 쉬고 있고, 탄생과 소멸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곳이 피렌체였고, 베네치아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갔던 중국의 태행산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던가?
“험한 태행산 길에 수레바퀴가 꺾여 져도
그 길, 사람 마음보다는 평탄하다네.
거센 무협 물결이 배를 뒤집어도
사람 마음보다는 잔잔하다네.
우리 인생 길 험난한 것은 물길에 있지 않고,
산길에 있지 않고,
오로지 사람 마음 안에 있네.“
백거이의 시와 같이 보아도, 보아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신비로운,
대 자연의 신비에 마음을 빼앗겨서 나를 잃어버린 채
이리저리 떠밀려 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마음의 동요가 가라앉기도 전에 나는 일본의 시코쿠로 향했고,
대윈미술관에서 타이티에서 타이티 여인의 그림을 그린 고갱을 만났다.
“태양처럼 빨간 옷을 입은 여인이 아름다워 자꾸만 바라봅니다.
여인의 맨발을 보고 나도 맨발이 됩니다.
햇빛을 머금은 나무의 향기를 맡으며, 맨발로 온 들을 거닐었습니다.
여인이 그립습니다.”
타이티에서 고갱이 쓴 글을 떠올리다가 우연치 않게 시선이 머문 곳이
일제 때 일본인 화가가 그린 조선 여인들이었다.
타이티 여인들보다 더 강렬하게 내 마음속에 각인된, 그 여인들은
어떤 이름을 가지고 어떤 생애를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났을까?
오래 전에 이탈리아의 로마에 도착했던 괴테는 그 로마의 첫인상을 두고
다음과 같은 글로 남겼다.
“그렇다, 나는 드디어 세계의 수도에 도착했다.
내가 이 도시를 훌륭한 사람의 아내를 받아서 15년 전에 보았다면
나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 기쁨이 이렇게 늦게 주어져
지금은 이 도시를 나 홀로, 나 자신의 눈으로 돌아다보아야 하지만,
그래도 좋다,(...) 이제 나는 어기에 있고 평안하다.
그리고 내 삶 전체에 대해 안심하고 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다고,”
괴테 <이탈리아 기행>에서,
괴테나 카뮈와 달리 나는 너무 늦게 그 나라에 간 것이 아닐까?
하지만 늦었을지라도 여러 나라 여러 도시에 갔었고, 그 곳들을 어정거렸으며,
그리고 돌아와 이런 저런 회상에 잠기는 나.
누군가는 말했다.
“사랑이 어려운 이유는 사랑에 깊이 빠질수록
스스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
나는 이 말을 바꾸어 말하겠다.
“여행이 어려운 이유는 여행에 깊이 빠질수록
스스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 이라고
여행은 인생에 활력을 불어넣고, 삶을 자유롭게 하는 최상의 항로가 아닐까?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는데.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는데.
일본의 메이지 시대에 두 명의 유명한 교사가 살았다.
둘은 아주 달랐다.
한 사람 '운쇼'는 진언종이라는 불교의 한 종파의 선생으로
불교의 계율을 철저히 지키기로 유명했다.
새벽에 일어나 저녁 일찍 잠들고
해가 진 뒤에는 결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또 다른 한 사람 '탄잔'은 황실대학의 철학교수였는데
아무런 계율도 지키지 않고 배고프면 언제나 먹었으며
낮잠을 즐겼다.
어느 날 운쇼가 탄잔을 방문했다. 그때 탄잔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불교도가 술을 마시는 일은 금지된 일이었기에 운쇼는 충격을 받았다.
"친구여, 어서 오시오!"
탄잔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어서 와서 나와 함께 술 한 잔 마십시다!"
화가 난 운쇼는 감정을 자제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마시지 않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이란 말이오?"
운쇼는 탄잔의 말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부처님이 마시지 말라고 하신 술을 내가 마시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사람이 아니라면
그럼 내가 뭐란 말이오?"
탄잔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부처님이지요!"
탄잔이 에키도라는 선승과 함께 폭우가 내린 뒤
진흙탕으로 변하여 걸음을 옮기기도 힘든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마을 근처에 이르러 그 질퍽한 길을 가지 못한 채 쩔쩔매고 있는
젊은 여인과 마주쳤다. 진흙탕이 너무 깊어 그녀가 입고 있는
비단 기모노가 망가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탄잔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그녀를 등에 없고 길 건너편으로 데려다 주었다.
두 수도승은 침묵 속에 발걸음을 계속했다.
다섯 시간이 지난 뒤, 그들이 머물게 될 사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에키도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
“왜 그 처녀를 등에 없고 길을 건너다 주었는가?
우리 수행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모르는가?”
탄잔이 말했다.
“나는 몇 시간 전에 그 처녀를 내려놓았는데,
자네는 아직도 그녀를 업고 다니는 군,”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이나 도를 깨치기 위해 살고 있는 구도자들의 삶이나
동일한 것은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성聖과 속俗이 한 끝 차인데, 그 한 끝 차가 우주보다 더 클 수도 있고,
겨자씨만큼이나 작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을 깨달은 부처님이 말했지.
“나 이외는 모두가 다 나의 스승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소크라테스도 말했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그런데, 알량한 지식으로 중무장한 사람들이
‘내가 더 잘 알고, 너는 모른다.‘고 난리가 아니고,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고 아우성 치느라 요지경 속이다.
언제 쭘 세상이 잠잠해질 것인지,
모자람 많고, 흠결 많은 내가 혼자서 투정을 하다.
모자람 많고, 흠결 많은 내가 혼자서 투정을 하다.
살아 갈수록 모자라는 것투성이고 부족한 것투성이다.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보아도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것,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런 일이고, 그나마 나를 위해서
미래를 위해선 나은 일이다. 하지만,
가끔씩 나이를 의식하게 되는 현 시점에서는
어느 한 귀퉁이가 텅 빈 듯 쓸쓸하기도 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허허 웃어버리지만
내면에선 의기소침하기도 하고, 일면 주눅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책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내가 읽고 동감했던 시 구절로 나름 위안을 삼는다.
“오오 계절이여! 오오 성이여! 흠결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시인 랭보는 이렇게 그 자신의 마음을 달랬는데,
나는 어떻게 이 모자라고 흠결 많은 내 인생을 달랠 수 있으랴?“
“무엇이든 풍부하다고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다.
더 바랄 것 없이 풍족하다고 그만큼 기쁨이 더 큰 것은 아니다.
모자라는 듯한 여백, 그 여백이 오히려 기쁨의 샘이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는데, 내게도 그런 숨겨둔 여백들이 더러 남아 있을까?
조금씩은 남겨 둔. 조금씩은 비워둔, 그 여백이 남아서 나를 위로해 주고
달래줄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물음표 ? 속에 자꾸 세월은 가고,
나는 그 세월이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을 눈 크게 뜨고 바라보면서
‘무심하리라.’ 다짐하고, 그리고 이상의 시 구절을 떠올려본다.
“문을 암만 잡아 다녀도 안 열리는 것은 안에 생활이 모자라는 까닭이다.”
그럴까? 내 안에, 아니 이상이 아닌 내 마음 속에서는
어떤 문이 있는데, 아무리 해도 안 열리면서 내 생활이 진부해지고,
어쩌다, 문득 초조해지고 쓸쓸해지는 것일까?
내 삶이 치열해서 그럴까? 그것도 아닌데, 치열한 삶도 아니면서,
현실이나 이상理想도 아닌 나의 생활,
뒤죽박죽은 아니지만, 질서가 없이 어질러진 나의 생활,
그런 나를 향해서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잘 가는 자는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좋은 말은 흠이 없다.
잘 헤아리는 자는 주판을 쓰지 아니하고,
잘 단속하는 자는 자물쇠를 쓰지 않는다.
하려는 자는 반드시 패할 것이요,
잡으려 하는 자는 반드시 놓칠 것이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함이 없기에 패함이 없고,
잡음이 없기에 놓침이 없다.(....)
끝을 삼가기를 늘 처음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패하는 일이 없을지니,”
그렇게 살고자 한다고 해서 살아지는가? 삶은 항상 무질서하고,
가끔은 권태를 동반하고 찾아오기도 하지만,
노자가 말한 그 말도 무심코 지나가는 세월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그렇게 산다는 것은 때와 사람이 잘 맞아 떨어질 때에 가능한 일기기 때문이다.
“돈도 지혜도 진실도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언제나 모자라는 것이다.“
이탈리아 속담에 나오는 말이다.
거기에 덧붙여야 할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직도 내가 못 찾은 나의 ‘길,‘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것을 찾아야 하는데,
운명인지, 아니면 숙명인지 나는 찾지 못했다고 여기며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면서 모자람 많고,
흠결 많은 내가
한 밤에 혼자서 어둠을 향해 투정을 하는 것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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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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