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6

지나간 추억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지나간다.

산중산담 2019. 6. 26. 13:09


지나간 추억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지나간다.


 

책에 넣어야 할 사진을 찾기 위해

지나간 날의 사진첩을 뒤적인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지나간 날들의 기억들이 그 사진 속에 낱낱이 새겨져 있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이 활동사진처럼 스치고 지나가고,

지금은 어쩌다가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추억들이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지나간 시절들도, 아니 스쳐 지나간 사람들과 추억의 그 시간들도

내가 이렇게 빛바랜 사진첩에서 그 시절들을 회상하듯 떠올리고 있을까?

아마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그럴 것이지만 형제자매들과 보낸 시간들은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없을 것이다. 그런데, 1985년에서 2004년까지는 <황토현문화연구소>

그리고 <전라세시풍속보존회>와 그 때 그때 필요에 따라

만들었다가 해체한 여러 단체 사람들과 어울렸고,

2005년부터는<우리 땅 걷기>라는 허공 속에 지어진 집을 통해

매달 몇 차례씩 형제자매보다 더 자주, 깊게 만나서 세상을 편력했었다.

그 시절의 그 시절 인연들이 어느 순간, 어떤 일로 만남이 끊어지고,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른 채 가끔씩 그 지난날들을 회상하면서

보내고 있으니, ‘만남과 헤어짐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때때로 숲 한가운데서 떡갈나무 하나가 나무꾼의 도끼에 의해서 쓰러질 때면,

아버지는 곧 숲을 가로 질러 햇빛이 드는 공터를 넘어서

그에게 할당된 목재들을 찾았다.

성당의 탑, 시계와 종을 지키는 일과日課 틈틈이 그는 숲에 있던

그의 작업장에서 사려 깊게 작업을 했다.....

아이들은 떡갈나무 껍질로 배를 만들고,

노 젓는 좌석과 조종키까지 갖춘

이 배를 냇물이나 학교의 샘에 띄우고는 했다.

배는 너무 쉽게 목적지에 도달했고, 다시 해안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세계 주유의 꿈같은 유희는 모든 사물들을 보이지 않게

아늑하게 감싸고 있던 빛 안에서 행해졌다.

이 모든 사물들의 왕국을 어머니의 눈과 손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의 말없는 염려가 모든 것을 수호하는 것 같았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들길>에서 부모를 추억하는 글이다.

 

그보다 더 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못하지는 않았을

아름다운 추억들을 남겨 놓고 간 사람들,

그들과 어느 시절 다시 인연이 이어져 함께 걸어가며 지난날들을

이야기 하며 걸어갈 날이 있을지, 없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쩌면 이미 추억 속에 그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 추억은 이미 추억 속에서 부서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을

견고하면서도 단단한 꿈이 된 것이다.

그 추억들을 어떻게 갈무리할 것인가?

 

상상력을 부지런히 동원하여

지난날의 불행한 추억을 되새기려 하지 말고

오히려 태연한 마음가짐으로 현재를 견뎌내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우리의 괴로움은 훨씬 줄어들게 될 것이다.“

괴테의 말이다.

 

지나가버린 과거가 행복으로, 혹은 불행으로 남아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다시금 회상하는 그 추억들이 달콤 쌉쌀할 때

살아가야할 남은 삶이 풍요로워질 수도 있고,

쓸쓸하거나 한심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나간 추억은 추억일 뿐이다. 그러나

그 추억들을 아름다움으로 채색하거나 쓸쓸함으로 채색하는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다.

 

지나간 추억들이여, 가끔씩 나에게 오라,

와서 지나간 그 시절들을 가끔씩 회상하게 하라.

그리움으로, 다가와서 살아갈 나날들을 더 아름답게 해 주라.




인생은 결국 운명대로 사는 것,

인생은 결국 운명대로 사는 것,

 

백두대간 중 인제와 양양을 잇는 한계령을 다녀 온지

이틀이 채 되지 않았는데,

음악방송에서 한계령을 듣는다.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며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산만 그럴까, 강도 그렇고, 바다도 그렇고,

자연이 그렇게 말한다.

 

욕심을 내지 말고, 마음을 비우라,

이 세상에 그 무엇이 중요한가?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중요할 것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렇게 저렇게 중요한 것과 별 것 아닌 것을 다 정해놓고,

삶이며, 죽음이며, 찬 것과 빈 것을 논하면서

스스로가 파논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것은 아닌가?

 

양주가 말했다.

태고太古의 일은 다 없어지고 말았다. 누가 그것을 기억하랴? 삼황三皇, 삼황 하지만, 그때의 일이란 과연 그런 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애매할 따름이며, 오제五帝 때의 사실도 꿈속의 일인지 생시의 일인지 분간하기 어렵고, 삼왕 때의 일만 해도 어떤 것은 없어지고 어떤 것은 남아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억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옛것은 고사하고 우리 평생의 일만 해도, 더러는 듣고 더러는 보고 했으면서도 우리가 아는 것은 만에 하나 꼴도 되지 않고,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의 경우에도, 어떤 것은 남아 있으나 어떤 것은 없어지고 말아서, 우리는 그 천분의 1도 알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태고로부터 오늘까지 몇 해나 지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며, 복희씨 이후만 따진대도 30만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무수히 반복된 현우賢愚, 성패成敗, 시비是非치고 소멸하지 않은 것은 없었으며, 다른 것이 있었다면 빨리 없어지고, 더디게 사라지는 차이 뿐이었다. 그렇?摸? 한 때의 비난과 명예에 마음을 써서 그 심신心身을 괴롭히고, 그것으로 수백 년 뒤까지 남을 명성을 추구한다 한들, 그것이 죽어버린 몸에 무슨 이익이 되며, 어떤 삶을 즐겁게 하는 것이 되겠는가?“

<열자> <양주 편>에 실린 글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 수 있는 사람 하나도 없다.

고금古今도 그러하고 지금只今도 그러하다.

그런데, 그것을 잘 알면서도 그러한 세상의 판단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매일 매 순간을 알량한 머리로 계산하고 또 계산하면서

혼돈 속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생이다.

 

아름다운 젊음이 얼마나 되리

그렇게 빠르게 가버리는 것을

즐거움을 좇을 자는 좇아라.

내일조차 기약할 수 없으니,“

플로렌스의 영주 <로렌츠오일 매니피코의 노래> 전문이다.

 

오늘, 지금을 후회 없이 잘 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이렇게 저렇게 계속 계산만하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다.

이미 정해진 대로 살다가 가는 것을,

쓸쓸하고 허망해서 다시 또 이런 저런 생각으로 보내는 하루,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민족의 통일도 중요하지만 우선 마음의 해방부터 필요하지 않을까?





영원한 삶은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

영원한 삶은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의 어디를 보아도 평온한 곳은 없다.

여기서는 저것이 문제고, 저기서는 또 다른 이것이 문제다.

왜 그럴까? 저마다 자기의 입장에서 바라보니까

세상의 어느 한 곳도 평등하지 않고 불평등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하지만 조금 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러한 생각들이

부질없음을 깨닫게 된다.

왜 그럴까. 우리들에게는 그 때, 곧 시기가 있는데, 때를 맞추고

못 맞추고는 우리들의 의지나 노력하고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기한이 있고, 이루어지는 때가 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은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고, 전쟁을 할 때가 있고,

평화로울 때가 있으며, 생각할 때가 있고, 행동할 때가 있다.”

이때가 곧 시기인데, 그 시기를 맞추지 못하면

아무리 갈망하고 발버둥 쳐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재물을 모으는 것이나 권력을 쟁취하는 것도 그렇지만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은 탄생과 소멸의 시간이 있다.

사람 역시 누구나 다 나고 죽는다.

그렇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으면서 인간들은 유독

탄생의 시간만을 좋아하고

소멸의 시간은 입에 담기조차 싫어한다.

 

사실 이 지상에서 사라져 가는 것은 왔던 곳으로 달아갈 뿐이다. 그런데

그 돌아가는 것을 달게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그 시간만큼 엄숙한 시간, 당연한 시간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은 어떤 시기일까?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노년의 시기이다.

 

노년의 추억들은 집이 무너진 개미들과 같아서,

어느 하나의 추억도 오랫동안 쫓을 수 없다.

광주리에 담겨져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리악의 말이다.

 

맞는 말이다. 부정할 수도 없이 우리 모두는 지금 귀로에 오른 차에 타서

미끄러져 가고 있고, 소멸 외에 다른 방법은 이 세상에 없다.

영원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 곧 진리다.

 

추억들이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고

여러 번 되풀이 되다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그것들은 얼마나 불안한 것들인가?

우리의 삶은 얼마나 깊은 망각의 심연 위에 세워져 있는가?

얼마나 먼 거리를 두고 이제는 추억도 아닌 추억을 상기시켜야 하는가?!”

 

헤르만 브로흐의 말과 같이 추억을 추억하는 시기, 노년의 시간이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다가오고 있다.

자꾸만 게을러지고, 무료하고 힘든 시간이 다가올 것인데,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럴 때, 에머슨의 말을 경청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한순간은 어쩔 수 없이 결정된 한때이다.

우리의 오늘이 일 년 중에서 가장 좋은 날이며.

지금 이 시간이 제일 좋은 시간이며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좋은 순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현재만이 당신의 소유이므로,”

 

후회 없이 순간, 순간을 연소시키면서 살 것을 이 세상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2018816일 목요일,




내 슬픔은 어디서 오는가.

내 슬픔은 어디서 오는가.

 

한밤에 일어나 창문을 열자

밤바람이 어제와 너무도 다르다.

가을인가? 그렇지, 입추가 지났으니 계절은 가을이지,

가을이 오는 소리 들리는가?

하고 귀 기울이자 어디선가 떨어지는 나뭇잎소리,

문득, 가을이 왔다고 생각하니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중국 당나라 때의 화가 설직의 <가을 아침에 거울을 보다>라는 시다.

 

나그네 마음은 낙엽에도 놀라는데,

밤새 앉아 강바람 소리를 들었지,

아침이 되어 얼굴 수염을 봤더니,

한 생애가 거울 속에 있었네.“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볼 때, 부스스한 머리에

하루 내 자란 수염, 선명히 드러나는 굵은 주름살,

시 속에서 말하는 한 사람의 생애가 거울 속에서,

지난 세월을 들려준다.

가을이 오면 무언가 모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저며 오는데,

그것이 바로 슬픔이라는 것이다.

 

내 슬픔은 어디서 오는가,

가을 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말로는 표현할 길 없고,

그저 어렴풋이 마음으로 알 뿐이네.

어찌 부귀에 안달하고 늙음을 두려워하겠는가?

가난한 선비의 탄식이 아니며,

외지로 밀려난 관리의 슬픔도 아니라네.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니,

나 일찍이 고향을 떠난 적도 없다네.

친구를 떠나보낸 탓인가 하면,

애당초 친구와 헤어진 적도 없네.

처음에는 덩굴 풀에 견주어 보았으나.

저녁 이슬이 그 슬픔 시들게 할 수 없고,

다시 안개에 견주어 보았으나,

가을바람도 그 슬픔 걷어가지 못하네.

자욱하게 내 마음 뒤덮어 놓고

올 때는 거침없이 왔다가 갈 줄 모르네.

스스로 물어보네.

이 슬픔 찾아온 지 대체 얼마나 되었느냐고,

옛날 서쪽 시냇가에 살 때는

그래도 산과 물의 아름다움을 즐겼거늘,

이제 동쪽 동산에 돌아와서는

시든 초목을 보고 더욱 탄식만 하네.

세상 버리고 사는 이 몸 찾는 이 없고,

우수만이 나를 감싸네.

세상 사람들은 즐거움을 찾아

유람하고 잔치 벌이며, 피로한 줄 모르는데,

어찌 나만 홀로 회한에 젖어

이리저리 헤매고만 있는가.“

 

원나라 말과 명나라 초기를 살았던 고계라는 시인의

<내 슬픔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시의 전문이다.

 

아무런 근심 없는 삶일지라도,

지는 나뭇잎, 스산한 바람, 헐벗은 나무들이

무언가 모를 허전함, 무언가 모를 그리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이기 때문이다.

 

덥다, 덥다고, 아우성치던 여름도 이제 막바지,

곧 이어 이 땅에 가을이 오고, 그 가을은 금세

지나가고 말 것인데,

나는 왜 아직 여름의 막바지에서 잠 못 이루며

오고 가는 계절의 두런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지





지식이 많아지면 걱정도 많다.

지식이 많아지면 걱정도 많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매일매일 반복되는 그 물음, 그러나 그 물음에

해답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하지만 계속 묻고 물으면서 계속되는 것이 삶이다.

삶이란 것을 인생이라는 큰 저울판에 올려놓고

계량하면서 살기에는 너무도 짧다.

그런데 매일 매일 사라져 가면 그뿐인 것들을 가지고,

이런 저런 말로 싸우고 웃고 행복해 하고 슬프게 사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삶이 어디를 거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저마다 하나의 우주인 삶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면서도 이런저런 말들을 한다.

상대를 아는 사람은 현명하다.”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더욱 현명하다

 

그러나 어디 현명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저 현명한 체, 유식한 체만 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어린왕자>의 작가인 생텍쥐페리는 <성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인간을 통과해 가는 것에 의해

인간은 수레이며 길이고 운반이다.

인간은 맡겨진 기탁물애서

자기의 관록을 유지하는 수탁자이다.“

 

그렇다. 저마다 우주이고, 저마다 길인 인간,

그 인간들 때문에 울고, 웃고, 분노하고, 실망하고

즐거움과 불행을 느끼며 살고 있다.

 

찾으면 찾게 될 것이다

찾지 않으면 발견 할 수 없다

소포클레스의 말을 빌려서

가끔씩 방관자처럼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삶의 내면을 파악하고 꿰뚫어보고자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조차도 부질없는 것이 아닐까?

 

알면 아는 만큼 모르면 모른 그만큼

그렇게 살아가자,

왜냐, 너무 많이 알면 마음의 상처를 입으니까?

 

지식이 많아지면 걱정도 많다.





먼 길 걷고 돌아온 날 아침의 소회

먼 길 걷고 돌아온 날 아침의 소회

 

먼 길을 다녀왔다.

서울에서 나귀타고 이레를 걸리는 길,

전주에서는 나귀를 타고 보름을 걸리는 길,

백두대간의 선자령과 대관령 길이 있는 강원도의 평창과 강릉 땅을

새벽 네 시 반에 출발하여 오전 아홉시 반에 도착했고,

산 길 17KM를 걷고 다섯 시에 출발하여

밤 열한 시 오십분에 도착했으니,

먼 길이라 이를만하다.

옛 사람들의 생각으로 보면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손오공도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기행이적을 매일매일 행하면서도

그 자신이나 세상의 놀라운 변화의 물결을

놀래지도 않고 바라보고 느끼는 인간들,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다.

매 순간이 기적이고, 매일 매일이 신기하고 놀라운 세상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고 세상을 편력했듯이

이 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누비고 돌아다닐 줄

어느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고맙고도 설레고도, 어떤 땐 심히 두려운 세상,

조심조심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이럴 때 문득 떠올리는 말이 있다.

 

사람의 일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조급하게 행동하지 말라.

불편함을 일상이라 생각하면 부족함에 대한 불편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마음에 욕심이 생길 때는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의 근본이니,

분노는 적으로 생각하라,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몸에 해가 미친다.

자신을 탓할 것이며 남을 탓하지 말라.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

일본의 정치가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훈 에 몇 소절이다.

 

길을 걸을 때도 이런 마음으로 걸어야겠다.

조심조심,

 

하지만 먼 길 걷고 돌아온 날은 누군가에게 흠씬 두드려 맞은 것 같고,

세상을 날아다니다가 온 것 같고, 온 몸이 아프고 뻐근하지만,

정신은 맑아지고, 맑아져서 맑은 이슬과 같다.

 

가고 싶어서 갔던 길,

몸은 피곤하지만 정신은 더욱 맑아지는 곳이

아름다운 길, 역사적인 길을 걷고 났을 때의 마음의 상태다.

불현 듯 어제 걸었던 그 길이 활동사진처럼 펼쳐지며

다시 그 길을 걷고 싶은 욕망이 인다.

나에게 있어서 길은 집이고,

집은 길이라서 그런 것일까?




모든 것은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무르익어야 온다.

인생의 노정도, 삶의 지혜도, 사랑도 행복도

그냥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비바람 불고, 눈보라 치고, 그리고 온갖 세파가 왔다가

간 뒤, 그렇게 오는 것이다.

 

어떠한 대군大軍도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한 송이의 포도, 하나의 무화과까지도 그렇지 못하다.

지금 그대가 나에게 무화과를 먹고 싶다고 말한다면 나는 대답할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다. 우선 꽃이 피게 하라.

다음에 열매를 맺게 하라. 이러서 여물게 하라,

무화과의 열매까지도 금방, 즉 한 시간 내에 되지 않는데,

그대는 인간의 마음의 과실果實,

그렇게 신속하게 또 손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설사 그대가 그렇게 할 수 있어도, 결코 이를 기대하여서는 안 된다.“

에픽테토스의 <마음의 과실>이라는 글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르는 말이며,

매사는 그냥 어느 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라

다 준비된 다음에 온다는 것이다.

 

계절도 마찬가지다.

인간들이 88일 무렵을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리고,

823일 경의 날을 처서處暑라고 해서

여름이 지나면 더위도 가시고 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였지만

아직까지도 여름이 기세등등하게 여름을 뽐내고 있다.

하지만 그 기세가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곧 이어 이 땅에 가을이 성큼 와서 찬바람 불고, 겨울을 재촉 하는

가을비라도 내릴 양이면 긴 소매를 입고 누런 가을 들녘이 펼쳐질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의 가을은 아름답다.’

에우리피데스의 글을 읊조리며

가을 들판을 휘젓고 다니다가 보면 금세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올 테지,

 

그 때 나는 어떤 마음의 자세로

계절의 오고 감을 갈무리하고 겨울을 맞이할까?




바닷가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은 안다.

바닷가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은 안다.

 

바닷가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은 안다.

폭풍이 얼마나 무섭게 휘몰아오는가를,

그 폭풍이 오기 전 바다가 얼마나 잔잔한가를,

그래서 베르길리우스는 폭풍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처음 산들바람이

수풀 속에 붙들려 율동할 때에

그 은은하게 우는 바람소리는

폭풍우의 다가옴을 뱃사람에게 알린다.“

 

그러나 가끔씩 오는 폭풍이 바닷가에서 살아갈 수 밖이 없는

인간들을 강인하게 키워놓는다.

그래서 호라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폭풍이 나를 어느 해안에 던져 놓건, 나는 손님으로 상륙한다.”

어떤 일이건 마음먹기 달린 것이고,

가볍게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미풍이 사람의 마음을 분홍빛 감성으로 물들이듯,

스칸디나비아의 속담과 같이 드센 폭풍이 바이킹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빈센트 반 고흐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나에게 있어 가장 완벽한 것은 무엇인가.

자연에 있어서는 폭풍의 드라마요,

삶에 있어서는 고뇌의 드라마 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폭풍에 관한 이야기이고,

세상을 뒤엎을 듯 밀려오는 태풍은 그와는 전혀 다르다.

 

태풍을 일으키는 것은 가장 나직한 말이다.

비둘기 걸음으로 오는 사상이 세계를 움직인다.”

니체의 말인데, <어린왕자>의 작가인

생텍쥐페리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태풍은 매일 밤 있는 게 아니다.

일단한 번 그 길을 닦아 놓으면,

그 길을 따라 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 속의 태풍, 또는 지혜의 태풍도

어느 날 문득 다가왔다가 살며시 사라지는 것이다.

 

오는 태풍을 너무 경계하지도 말고,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자.

오고 가는 것을 뉘라서 막을 수 있으랴.

이럴 때 필요한 것이 그냥 받아들이는 것,

그 것이다.





남의 땅 걷기로 개명을 해야 할까? (글은 인간 그 자체다.)

남의 땅 걷기로 개명을 해야 할까? (글은 인간 그 자체다.)

 

어쩌다가 보니 구월 한 달, 우리나라를 세 번(이태리, 중국, 일본)이나

비우고 떠나야 한다.

이러다가 <우리 땅 걷기> 가 아니라 <남의 땅 걷기>

개명을 해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혼자서 비식 웃는다.

우리나라 땅을 비워야 하는 만큼 밀린 일들(보낼 원고)을 다 해놓아야 하는데,

놉이라도 얻어야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남에게 맡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서 마음만 급하다.

말도 그렇지만 글(문체)에는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가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 부탁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렇다고 모든 글이 누에가 실을 뽑듯 술술 써지는 것이 아니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편지를 쓰려면 지필묵보다도 먼저 고독과,

그리고 마음이 가뿐한 시간이 필요하다.”

편지도 그러할 진대, 하물며 역사나 기행문을 쓰는 데는

온갖 잡다한 생각들과 수많은 책들을 읽고, 통과하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해야 써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사람들이 인정하는 좋은 문체는 무엇을 말하는가?

 

결코 자연미를 떠나지 않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완벽한 문체가 될 것이다.”

세비네 부인의 글인데, <팡세>를 지은 파스칼의 글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문체를 볼 때 매우 놀라고 기뻐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한 작가를 보리라고 기대했다가

한 사람의 인간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좋은 취미를 가진 사람은 책을 읽으면서

한 사람의 인간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가

한 사람의 작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자연은 모든 것에 관해서, 신학에 관해서,

시까지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연을 존중하는 사람들이다.”

파스칼의 말은 자연스러운 것이 세상의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철학자인 볼테르의 말은 그와는 약간 다르다.

 

어떠한 문체라도 좋다. 그것이 지루한 문체만 아니라면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으면서, 그 글 속에 사람들의 삶과 철학, 그리고

인생의 희로애락이 들어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것이다,

작가의 문체는 작가 그 사람의 자아의 참된 표현이다.

누구든지 명석한 문체를 쓰려면 우선 그 정신을 명석하게 해야 한다.

누구나 위대한 문체를 가지려면

우선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일의 문호인 괴테의 <에커만과의 대화>에 실린 글이다.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어야 좋은 문체를 쓸 수 있다.

맞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명석하고도 맑은 영혼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자크 드 라크르텔은 우리 모두에게 충고한다.

 

문체에 대한 어떤 감각을 가질 것,

그리고 보다 단순하고 소박한 문체를 갖도록

 

세상에는 독창적인 작가들이 더러 있다, 그런데

그들은 대중의 취미에 아부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하고도 이상한 것은

그런 사람들은 대중들에게 익숙한 상투어를 쓰지 않기 때문에,

그 작가가 쓰는 문체가 조금만 독창적이어도

대중들의 눈높이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로마제국흥망사>를 지은 에드워드 기번은 <잡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가의 문체는 마음의 심상이어야 하지만,

어휘의 선택과 구사는 수련의 결과이어야 한다.”

 

결국 글이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인간 그 자체라는 것인데, 당신은

어떤 문체로 글을 쓰는가?

 

2018824일 금요일,


 

어쩌다가 보니 구월 한 달, 우리나라를 세 번(이태리, 중국, 일본)이나

비우고 떠나야 한다.

이러다가 <우리 땅 걷기> 가 아니라 <남의 땅 걷기>

개명을 해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혼자서 비식 웃는다.

우리나라 땅을 비워야 하는 만큼 밀린 일들(보낼 원고)을 다 해놓아야 하는데,

놉이라도 얻어야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남에게 맡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서 마음만 급하다.

말도 그렇지만 글(문체)에는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가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 부탁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렇다고 모든 글이 누에가 실을 뽑듯 술술 써지는 것이 아니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편지를 쓰려면 지필묵보다도 먼저 고독과,

그리고 마음이 가뿐한 시간이 필요하다.”

편지도 그러할 진대, 하물며 역사나 기행문을 쓰는 데는

온갖 잡다한 생각들과 수많은 책들을 읽고, 통과하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해야 써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사람들이 인정하는 좋은 문체는 무엇을 말하는가?

 

결코 자연미를 떠나지 않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완벽한 문체가 될 것이다.”

세비네 부인의 글인데, <팡세>를 지은 파스칼의 글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문체를 볼 때 매우 놀라고 기뻐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한 작가를 보리라고 기대했다가

한 사람의 인간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좋은 취미를 가진 사람은 책을 읽으면서

한 사람의 인간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가

한 사람의 작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자연은 모든 것에 관해서, 신학에 관해서,

시까지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연을 존중하는 사람들이다.”

파스칼의 말은 자연스러운 것이 세상의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철학자인 볼테르의 말은 그와는 약간 다르다.

 

어떠한 문체라도 좋다. 그것이 지루한 문체만 아니라면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으면서, 그 글 속에 사람들의 삶과 철학, 그리고

인생의 희로애락이 들어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것이다,

작가의 문체는 작가 그 사람의 자아의 참된 표현이다.

누구든지 명석한 문체를 쓰려면 우선 그 정신을 명석하게 해야 한다.

누구나 위대한 문체를 가지려면

우선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일의 문호인 괴테의 <에커만과의 대화>에 실린 글이다.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어야 좋은 문체를 쓸 수 있다.

맞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명석하고도 맑은 영혼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자크 드 라크르텔은 우리 모두에게 충고한다.

 

문체에 대한 어떤 감각을 가질 것,

그리고 보다 단순하고 소박한 문체를 갖도록

 

세상에는 독창적인 작가들이 더러 있다, 그런데

그들은 대중의 취미에 아부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하고도 이상한 것은

그런 사람들은 대중들에게 익숙한 상투어를 쓰지 않기 때문에,

그 작가가 쓰는 문체가 조금만 독창적이어도

대중들의 눈높이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로마제국흥망사>를 지은 에드워드 기번은 <잡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가의 문체는 마음의 심상이어야 하지만,

어휘의 선택과 구사는 수련의 결과이어야 한다.”

 

결국 글이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인간 그 자체라는 것인데, 당신은

어떤 문체로 글을 쓰며 어떤 문체를 좋아하는가?




낙동강에 내리던 비

낙동강에 내리던 비

 

인생이 반복이라는 것을 가끔씩 실감한다.

낙동강을 처음 걸었던 2001년 가을, 하룻밤을 묵었던

하목정 부근에서 2018년 가을의 초입에 다시 낙동강을 세 번째 걷는

도반들과 잠을 자고 그 일대를 걸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달성 부근에다 숙소를 정하라는 말만 건넸을 뿐인데,

늦은 밤에 도착해서야. 하목정이라는 안내판을 보고

17년 전의 그 날, 오랜 시간을 걷고 나서 지친 몸을 이끌고 모텔을 잡고

저녁밥을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다니,

알 수 없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인연의 끈이 그때도 비가 내렸듯이

이번에도 비가 내렸으니,

아침에 일어나 내리는 비를 보고,

아침 비는 천리를 간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어서 곧 갤 것이라 이야기했건만,

하루 종일 내리는 비, 그 비속을 걷고 또 걸어서 현풍의 박석진교까지 걸었다.

이제 남은 거리 150km, 석 달만 걸어가면

그리운 낙동강 하구둑에 도착할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그런 의미에서 발걸음의 역사.

태백에서 한 발 한 발 걸어온 여정이 이제 150km 밖에 안 남았으니,

신기하지 않은가?

 

장수에서 군산까지 연결된 5만 분의 1 지도 14장을 가지고

무작정 걷기 시작한 금강을 필두로, 섬진강, 한강, 영산강을 걸었고,

태백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연결된 5만 분의 1 지도 18장을 가지고

무작정 걷기 시작한 낙동강 길 걷기가 열여드레로 끝난 지가 벌써 17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 두 번을 걷고 네 번째를 걷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아는 사람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이 짐 가방과 책 상자 하나만을 가지고,

그 무엇에도 호기심도 없이 이 세상을 떠돌고 있다.

집도, 물려받은 물건도 없이,

개들도 없이 이렇게 사는 것이 도대체 무슨 삶이란 말인가,

적어도 추억이라도 있다면,...하지만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다 해도

그것은 땅 속에 묻혀버린 것이나 다름없을 텐데,

아마도 사람들은 그 모든 것에

닿을 수 있기 위해서 나이를 먹는 게 틀림없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의 몇 소절처럼,

나 역시 추억도 아니고 그리움도 아닌 그 어떤 것, 그 무엇에 닿기 위해서

이렇게 걷고 또 걷는 것은 아닐까?

 

먼 길 떠나서 하루 종일 내리는 빗속을 헤매고 헤매다가 돌아와서

잠시 멎었다가 다시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미 지나간 추억들을 추억하고,

다시 길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