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길을 만나고 길에서 길을 꿈꾸다.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꿈꾸던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전라북도에 길 박물관을 만들고,
길 문화유산 해설사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그 일이 올해 봄에 시작되어,
제 1회 2018년 천리 길 해설사 교육이
닷새 동안의 일정을 마치고 어제 끝났다.
하나의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이 시작된다. 그것은 만고의 진리다.
그와 같이 또 다른 일들이 기적처럼 다시 일어날 것이지만,
그래도 마음이 복잡하지 않고 평화로운 것은
교육 일정이 순조롭게 무사히 마쳤기 때문이리라.
여행 작가, 양영훈씨, 경주에 이재호 작가,
용인의 박수자 시인, 제주 올레 아카데미 박선경씨가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길 문화 교육을 담담했고,
전북 여러 지역의 길을 탐방하며 서로 배우고 가르친 시간 들,
지나고 나니, 그런대로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항상 무모하게,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곤 했다. 그런데,
그 일들이 우연처럼 필연처럼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 무슨 연유인지,
“무모하게도. 하지만 무모함이 때로는 나을 수도 있지.
분별하게 한 일이 잘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심사숙고한 계획은 오히려 수포로 돌아가고 말이지.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이 얼렁뚱땅 일을 벌여놓아도
그것을 잘 마무리 지으시는 신이 계시다는 뜻이네. ”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구절처럼,
어떤 보이지 않는 신이 계셔서 도와주기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살아갈 시간은 짧고.
이 생에서 해야 할 일은 많기 때문에,
저지르고 또 저지르면서 수습하는 일 밖에
우리에게 그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자기의 생生?? 망각한 후에 능히 아침 공기처럼 맑은 경지에 들어가고,
아침 공기처럼 맑은 경지에 들어간 후에
능히 단독 자가 드러난 후에 능히 고금을 초월하고,
고금을 초월한 후에
능히 생生도 없고 사死도 없는 경지에 도달한다.“
<장자 <대종사 편>에 실린 구절이다. 그처럼,
그렇게 자유자재로 살다가 보면 그런 경지를 맞이할 수 있을까?
어디선가 들리는 그 소리,
어디선가 들리는 그 소리,
“초저녁,
어둠이 아직 깊지도 않은데,
눈은 졸음에 겹고,
너무 이른 시간이라
차마 눕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마음의 창에
점점이 번져오는 그리움,
여기 저기 쌓인 책들은
어서 읽으라고 아우성,
아서라, 눈을 감으니,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 그대 목소리,“
누구나 그런 시간이 있을 것이다.
문득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되어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과 같을 때
그런 때,
문득 들리는 듯싶은 소리.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이 가장 진실 된 마음이다.
그럴 때 아무 것이나 불쑥 집어서 펼친다.
“대나무 숲 사이로 난
세 갈래 오솔길에
햇살이 어렴풋하니,
실로 산에 사는 사람에겐
좋은 시절이요,
한쪽 벽 창문 아래로
비바람 세차게 지나니
이 또한 은자에겐 좋은 경치로다.“
<취고당검소>의 한 편이다.
지금이 어디인지, 몇 시인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그런 시간에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
“산골짜기
물소리
말이 가뭇없다.
물소리,
아주 흘러가버린 내 혓바닥“
정현종 시인의 <물소리> 전문이다.
말도, 마음도, 그리고 생각까지도
가없고, 정처도 없는 그런 시간,
지금이 도대체 몇 시지?
우물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하늘 좁다 하네.
우물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하늘 좁다 하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있다.
우물 안에서만 살다가 보면
우물 밖에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스스로 우쭐하다가 부끄러움을 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고려 때의 대 문장가인
목은 이색이 처음 원나라 조정에 들어갔을 때,
그곳 문사가 그를 얕잡아 보면서 조롱하였다.
“잔 들고 바다에 들어오니 바다 넓은 줄 알겠구나.”
이 말을 들은 이색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우물에 앉아 하늘 바라보며
하늘 좁다 하는구나.“
서거정이 편찬한 동인시화에 실려 있다.
큰 나라에 살기 때문에 작은 나라를 무시해도 되고,
작은 나라에서 온 선비에게 지식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느냐고
깔보고 무시하다가 크게 당한 일화다.
지식인의 병폐는 자신의 지식의 깊이를
너무 과대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조금만 더 자신을 더 들여다보고 겸손하면 되는데,
그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
“문장은 자신을 낮추어 남에게 겸손해야 하는 것이니
자신의 재능을 과장되게 자랑하는 것은 화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성석린의 아버지 성여완의 말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경계하여 말하였다.
“예부터 한 가지라도 조그마한 재주를 지니게 되면,
비로소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없게 되고,
스스로 한쪽에 치우친 지식을 믿게 되면 차츰 ,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겨서 작게는 욕하는 소리가 몸을 덮게 되고,
크게는 화환禍患이 따르게 된다.
이제 그대가 날로 글에다 마음을 두니,
힘써 남을 업신여기는 자료를 마련하자는 것인가?”
하였다. 내가 두 손을 모으며 공손히 말하였다.
“ 감히 조심하지 않겠는가.”
<주역>에 이르기를
“분노를 참고 욕심을 억제하라.”
또 “말을 삼가고 음식을 절제하라.”
하였다. 대저로 이 네 가지는 인생의 큰 방축 防築이요.
심학心學의 큰 대업이다.
수신과 섭생이 어찌 이 두 가지 길이겠는가?
마음의 불을 타기 쉬우니, 그것을 끄는 것은 분노를 참는 것이요.
정수는 새기 쉬우니 그것을 새지 않게 하려면 욕정을 억제해야 한다.
비장은 기를 기르는 곳이다.
기가 흩어지지 않고 위로 올라가게 하는 것은 말하는 것을
삼가는데서 부터 시작되고, 또 기가 체하지 않고
아래로 새어나게 하려면 음식을 절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목구심서’ 3에 실린 글이다.
옛 사람의 말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기기를 좋아하기에
이기려는 마음으로 대응하면 반드시 패한다.
사람의 마음이란 겸손을 좋아하기에
겸손한 마음으로 처세하면 도리어 이길 수 있다.“
졌다고 생각 되었을 때 참 승리가 찾아오고
이겼다고 생각 되었을 때 패배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이겼다고 너무 기뻐하지 말고,
졌다고 너무 슬퍼할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 다 정해진 운명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나무는 나무 이상의 것이다.
하나의 나무는 나무 이상의 것이다.
대전에서 '산림문화자산 선정'을 위한 산림청 회의를 마치고 버스에 실려 돌아와
집으로 가는 길, 비가 내리다 멎은 대지는 불가마처럼 덥다,
더운 것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나무 그늘을 의지해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생각하니 조금 그렇다.
잠시, 그래, 잠시의 더위도 참지 못해서 그늘을 찾는 ‘나’와
장거리 도보답사에서 하루 종일 뜨거운 강 길을 순례자처럼 걷는 ‘나’는
다른 나인가? 아니면 같은 나인가?
알 수 없다. 하지만, 여름의 더위를 조금이라도 덜 느끼도록 하는 것은
고맙게도 나무 그늘이다.
그런 의미에서 질베르 쏘까르가<세계에 충실한>이라는 책에서
“하나의 나무는 나무 이상의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어떤 면에서 더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더울 때 그늘을 드리우고, 외롭고 고독할 때
기대고 싶은 나무, 바람을 막아주기도 하고,
그 살랑거리는 나무 잎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며 오롯한 명상에 잠길 수도 있는 나무,
그 나무를 고맙다고 여기면서도 가끔씩 살면서 너무 익숙한 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마움을 모르기 때문에 나무의 고마움을 망각한다.
그것 역시 매 순간이 기적이고, 모든 사물이 다 귀하고 귀한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사람이 천태만상이듯,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저마다 다른 특색이 있고 향기와 ?깔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숲의 모든 나무는 각각 독특한 색채와 매력이 있다.”
저마다 모양이 다르고, 잎이 다르고, 향기가 다른 나무를
아름답고도 신성하게 묘사한 글이 있다.
“나는 내 아이에게
나무를 껴안고 동물과 대화하는 법을
먼저 가르치리라.
숫자 계산이나 맞춤법보다는
첫 목련의 기쁨과 나비의 이름들을
먼저 가르치리라.
나는 내 아이에게
성경이나 불경보다는
자연의 책에서 더 많이 배우게 하리라.
한 마리 자 벌레의 설교에 더 귀 기울이게 하리라.
지식에 기대기 전에
맨발로 흙을 딛고 서는 법을 알게 하리라.
아, 나는 인위적인 세상에서 배운 어떤 것도
내 아이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를 내 아이가 아닌
더 큰 자연의 아이라 생각하리라.“
조안 던컨 올리버 <뉴 에이지 저널 편집장>의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이라는 시 한 편이다.
이렇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이 이렇게 자라준다면 얼마나
고마울까? 하지만 저마다 우주인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훈육할 것인가?
내 버려두는 일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너무 일찍 터득해버린 것은 슬픔인가, 즐거움인가?
그래도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 숲에서
너도 자연, 나도 자연 하면서 유유자적 노니는 것을
꿈꾸는 것만 해도 마음이 편하다.
내일은 어느 나무 밑에서 잠시 소요하고 어정거리다가
까실 까실한 나무를 품안 가득 안아도 주고,
흔들리는 나뭇잎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돌아올까?
고향에 가기 전 고향을 회고하네.
고향에 가기 전 고향을 회고하네.
고향을 간다. 토요일엔 내 어린 날의 기억의 자취들과
섬진강의 근원을 보러 가고, 월요일엔
고향 백운에서 나보다 훨씬 늦게 태어난
중학교 학생들에게 지난 시절의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고향에 간다. 이것은 설렘인가, 막연한 두려움인가?
어린 시절 우울하고 쓸쓸했던 소년시절을 함께 한
윤남식이라는 친구 아버지가 기술자로 일했던
기와공장터에 세워진 백운중학교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어떻게 사는 게 좋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다. 나는 그저 지난 일들을 가감 없이 들려주고,
순간순간에 충실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리라.
순간이 일생을 좌우하고,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
살아가면서 수도 없이 절감하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다소 서투르게 내가 늘어놓은
저 유년 시절로부터 나에게 온 감정,
생각건대, 그것은 고독이었다.”
내가 아직 세상을 많이 겪지 않은 어린 고향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보스꼬의 말이다.
그랬다. 나는 어린 시절 고독하면서도 막연한 꿈을 꾸었다.
‘작가가 되겠다.’ 고, 작가가 확실하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느 날 문득 운명처럼 계시처럼 다가온
1 퍼센트도 되지 않는 그 꿈을 꾸고 또 꾸면서
얼마나 깊은 절망과 좌절을 맛보았던가?
‘내 꿈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포기해라, 아니 포기하자,’
하면서도 내려놓을 수 없던 꿈, 나는 말하리라.
“그 꿈을 놓아버리지 말고 계속 꿀 것,”
성공도 실패도 좋은 일이다.
무한한 가능성이고, 그 가능성에 전체를 건 다음엔
후회할 것도, 억울할 것도 없다.
나는 말하리라.
‘가끔씩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것,
재능은 정적 속에서 형성된다.“ 괴테가 말하지 않았던가?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지금, 현재에 충실할 것,
그렇게 살다가 보면 꿈이 이루어지고,
기적 같은 일들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그랬다. 나의 고독, 나의 우울, 나의 슬픔이
그토록 깊고도 깊었기에,
이 나라 이 땅에 대한 글을
포기하지 않고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견디기 힘들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웠던 말이 있다.
“나는 역경에 처했을 때 가슴이 뛰어논다.”
니체의 말이다.
또 키르케고르는 말했다.
"그러나 내가 그렇듯 우울했다는 것이 내게는 행운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자칭 ‘우울증 환자’였는데, 잘 견뎌 낸 것이다.
지나고 나니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던 그 우울증이
나를 이렇게 살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여간 남들이 볼 때도,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게 살다가 보니,
고향에 가서 고향에 대한 강연을 하는 별 일이 다 일어난 것이다.
“나의 수줍은 램프를 격려하려고
광대한 밤이 그 모든 별들을 켠다.“
인도의 시성 타골의<반딧불>과 같이
이런 저런 인연들이 모여 걷고 또 걷다가 보니,
삶의 변곡점變曲點을 만나기도 하는 것이다.
강물이 여러 지류의 물이 모여 바다로 흘러가듯
수많은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망망茫茫한 화엄의 바다를 향해 노 저어 내려가야겠다.
매사를 조심스럽게 살아가야하지만, 그러나
어떤 때는 ‘전체를 걸고 나아가라.’고
말해줘야겠다. 나직하게, 그러나 또렷하게,
역사 속을 거닐다 돌아와 한숨 자고 일어난 새벽의 회상.
역사 속을 거닐다 돌아와 한숨 자고 일어난 새벽의 회상.
역사 속에 실재했다가 사라진 옛 터나,
사람이 살았던 곳이 옮겨져 그 형체가 변모한 것을 목격할 때
느끼는 감정은 여러 갈래다.
인생이란 것이 무상하다는 것은 고금 이래의 것이지만,
그 사람이나 장소에 대한 애잔함, 또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에
한참 동안을 그 자리에서 싸아하고도 야릇한 슬픔에 잠기곤 한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백사살 계곡의 정자토와 세검정,
그리고 석파정과 무게정사터로 알려진 비해당이 그렇다.
추사 김정희의 별장터라고 추측은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백사실 계곡의 주춧돌만 남은 집터도 그렇지만,
옛 모습은 간데없고, 새로 지어져 자동차만 다니는 세검정,
그리고 연산군이 원도 끝도 없이 잘 놀았다는 탕춘대 터에는 빌라가 들어서고,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석파정은 대원군과 김홍근이 살았던 데가 아닌 곳으로
옮겨져 요짓집으로 변하고 말았으니,어디 그뿐인가. 안평대군이 도원에 들어간 꿈을 꾸었던 비해당 터,
무게정사터는,남의 소유로 넘어가
굳게 담긴 문안에 언뜻언뜻 보이는 표삭만 남아 있으니,
역사도 인생도 쓸쓸하고 무상한 것이 어찌 그리도 깊고도 넓다는 말인가?
나는 안평대군이 꿈을 꾸었던 곳, 훗날 현진건 선생의 소유가 되었다가
남의 손으로 넘아간 그 집 앞 도로에서 안평대군의 꿈을 이야기했다.
“정묘년(1477) 4월 20일 밤, 내가 막 베개를 베고 누우니 이내 정신이 아득해지며 깊은 잠에 빠져들고 꿈을 꾸게 되었다. 문득 보니 인수(仁? 박팽년)와 더불어 어느 산 아래에 다다랐는데 겹친 봉우리는 험준하게 우뚝 솟고 깊은 골짜기는 아련히 그윽하였으며, 복사꽃 수십 그루가 서 있는 사이로 오솔길이 보이는데 숲 가장자리에서 갈림길이 되고 있었다.
오솔길이 숲 가장 자리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를 몰라 우두커니 서서 머뭇거리고 있던 차에 마침 시골 옷차림을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공손히 인사를 하며 말하길, “북쪽으로 이 길을 따라가다 골짜기를 들어서면 바로 도원입니다.”하는 것이었다. 나와 인수가 말을 채찍질 하여 들어가니 절벽은 깎아지른 듯 하고 수풀은 울창하고 빽빽하였으며, 시냇물은 굽이쳐 흐르고 길은 휘도는데 백 번이나 꺾여 금세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 골짜기를 들어서니 골 안은 드넓게 트여 족히 2, 3리는 되어 보이고 사방이 벽처럼 산으로 둘러싸였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히 피어오르고 멀고 가까운 복사꽃 숲에는 햇살이 비쳐들어 노을인양 자욱하기만 했다. 또 대나무 숲 속에 띠풀집이 있는데 사립문은 반쯤 닫혀있고 흙으로 만든 섬돌은 이미 무너져 내렸으며 닭이며 개, 소와 말 따위도 없었다. 앞 냇가에는 조각배만 물결 따라 흔들거릴 뿐이어서 그 소슬하고 쓸쓸한 정경이 마치 신선이 사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며 바라보다가 인수에게 말하였다. “‘바위에 나무 얽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짓는다(架巖鑿谷開家室)’ 함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정녕 이곳이 무릉도원이로세!” 그때 누군가 몇 사람이 뒤에 있는 듯하여 돌아보니 정보(貞父 최항), 범옹(泛翁 신숙주) 등 평소 함께 시를 짓던 이들이었다. 이에 신발을 고쳐 신고 오르락내리락 하고 이리저리 두루 돌아보며 여유롭게 즐기다가 홀연히 꿈에서 깨고 말았다.
아! 사방으로 통하는 큰 도회지는 참으로 번화하여 이름난 고관대작들이 노니는 곳이요, 절벽 깎아지른 외진 골짜기는 조용히 숨어사는 은자(隱者)들의 거처이다. 그러므로 몸에 화려한 관복을 걸친 자들의 자취는 깊은 산림(山林)에 미치지 아니하며, 뜻을 자연에다 둔 사람들은 꿈에도 궁궐의 높은 집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개 성품이 고요한 사람과 번잡함을 좋아하는 사람은 서로 길이 다른 까닭에 자연스런 이치로서 그렇게 된 것이라 하겠다.
옛사람이 말하길 ‘낮에 한 일이 밤에 꿈이 된다’ 하였다. 그런데 나는 궁중에 몸을 기탁하여 밤낮 일에 몰두하고 있건만 어째서 산림에 이르는 꿈을 꾸었더란 말인가? 또 갔더라도 도원에까지 이르렀더란 말인가? 또 내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은데, 하필이면 도원에 노닐면서 이 몇몇 사람들과만 함께 하게 되었던 말인가? 그것은 아마도 내 성품이 그윽하고 외딴 곳을 좋아하여 평소에 자연을 그리는 마음이 있었고 이들 몇 사람과 사귀는 것이 두터운 까닭에 그렇게 된 것이리라.
그리하여 가도(可度 안견)에게 명하여 내 꿈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그렇지만 옛날부터 일러오는 도원이라는 곳은 내가 알지 못하니, 이 그림과 같은 것일지는 모르겠다. 훗날 보는 사람들이 옛 그림을 구하여 나의 꿈과 비교해 본다면 반드시 무언가 말이 있으리라.
꿈을 꾼 지 사흘 뒤에 그림이 완성되어 비해당(匪懈堂)의 매죽헌(梅竹軒)에서 쓴다.“
안평대군이 글을 지은 뒤로 549년이 지났다. 그 사이
안평대군은 형제간인 수양대군에 의해 체포되어 교동도로 유배를 갔고,
그 곳에서 한 많은 세월을 마감했고,
꿈속에 등장하는 박팽년과 신숙주는 격랑의 한 가운데에서
서로 철천지 원수가 되어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삶과 죽음이 어찌 그리도 가깝고도 먼 것이란 말인가.
하루 종일 걷고 또 걷고 돌아와 한 숨 자고 생각하니
인생도 역사도 흐르고 흐른다는 것,
나도 그대도 가고 또 가다가 어느 날 사라진다는 것이
이리도 쓸쓸하게 다가오는데,
지금도 홍제천변에 오간수문으로 시냇물은 무심히 흐르고 있을 것인가?
자연의 모든 압력은 더 높은 고향에 대한 추억이다.
자연의 모든 압력은 더 높은 고향에 대한 추억이다.
자연의 모든 압력은 더 높은 고향에 대한 추억이다.
고향에 갔다가 온 밤의 꿈은 어김없이 고향에 대한 꿈이다.
어린 시절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금의 나도 아닌
어중간한 시절의 내가 골목을 서성거리다가 문득 깨고 나면
고향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데, 너무 먼 나라 이야기처럼 아득할 뿐이다.
고향, 그 고향을 두고 <푸른 꽃>이라는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노발리스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자연의 모든 압력은 더 높은 고향에 대한 추억이다.“ 라고,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들도 있지만 쓸쓸하고도 슬픈 기억들을 많이 간직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고향은 설명이 불가능한 어떤 불가항력적인
인과관계를 지니고 있는 묘한 것이다.
그 <고향>을 두고 의미심장한 글을 남긴 사람이 전광식이다.
“첫째 고향의 ‘고故’라는 문자가 ‘예스러움’ 내지 ‘오래됨’을 의미하는데서 나타나는 것처럼 고향은 우리가 적응하기에 바쁜 급변하는 세계가 아니라 예스러운 안정된 삶의 세계를 가리킨다.
둘째, 고향의 ‘고故’라는 문자에는 ’떠나온‘ 이란 의미가 있기에 고향은 내가 떠나왔지만 그리워하는 추억의 장소를 가리킨다.
셋째, 고향은 무엇인가 은닉되어 있고 순수한 삶의 세계를 가리킨다. 고향은 도회지처럼 노출된 때 묻은 공간이 아니라 감춰져 있으면서 아직 순수성을 간직한 세계를 의미한다.
넷째 고향은 자연을 압도하는 대도시와는 달리 자연에 안겨 있는 아늑한 곳을 가리킨다. 이러한 고향이란 가정의 연장이며, 익명의 타자들이 모여 사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군중 속의 고독이 아니라 사랑과 정, 그리고 혈연적, 자연적 유대감과 서로에 대한 애정이 지배한다. 또한 고향은 동일한 언어와 관습, 그리고 전통을 공유하는 곳이다.“
전광식의 <고향>이라는 글이다.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고향을 두고 라로슈코프 역시
다음과 같이 말했지 않은가?
“고향 사투리의 억양은 말뿐만 아니라 정신과 마음속에도 도사리고 있다.”고,
하나의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을 마시고 한 들판에서 생산된 곡식을 먹고,
한 공간에서 생산된 과일들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흐르는 구름, 스쳐가는 바람을 맞으며 한 시절을 보낸 고향 사람들,
그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서, 그 자리를 지키며 남아 있는
사람은 없마. 마찬가지로 고향은 변하고 변했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고향의 그 산길, 그 들길도 옛 모습을 잊어버렸는데,
고향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 느끼는 생각은 애잔함이고,
그래서 독일 철학자인 하이데거의 <들길>이라는 시를 읽으며
이 깊은 밤에 고향의 산천을 회상한다.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따라 소리 없이 들길을 걷노라면,
어느 사이에 발걸음은 메마른 땅, 환히 트인 들녘을 거닐고 있다.
....
들길을 따라가다 보면 환히 트인 들녘을 뚫고
한 가닥 외줄기로 뻗힌 길이 바로 오솔길이다.
사색에 잠긴 사람의 발길에 들길이란
이른 아침 풀 베러 가는 농군의 발길에서처럼 가까운 것,
...
들길이 외치는 오랜 내력 속에
사색에 잠긴 사람의 발길은 고향의 품에 안기고 있다.“
이 한 밤에 내 영혼이 휘적휘적 고향으로 돌아가
이슬내리는 그 들길을 거닐다가 돌아오면
새벽이 문득 어느 순간에 열리기는 할까?
살아가면서 서로 배역을 바꿔가면서 살아간다면 어떨까?
살아가면서 서로 배역을 바꿔가면서 살아간다면 어떨까?
세상은 어느 때부턴가
잘 난 사람들부터 앞으로 서게 하고,
못난이들은 뒤에 서도록 했고,
그것이 세상의 질서가 되다가 보니
여기저기 주눅이 든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만들어진 속담이
“못난 놈들은 못난 놈 얼굴만 보아도 즐겁다.”
참으로 지당한 말이고, 백번 천 번 맞는 말이다.
못난 사람들은 못난 사람들끼리 놀아야 편하고,
마찬가지로 잘 난 사람들은 잘 난 사람끼리 놀아야 편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것도 정답은 아닌 모양이다.
잘 난 사람들은 자기보다 좀 모자란 사람들이 있어야 폼을 잡을 수 있고,
못 난 사람들 역시 못난 사람들 중에도 위계질서가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다 불평등하고 그래서 소란스럽다.
“앞줄에 섰던 이를 뒤로 보내라.
뒷줄에 있던 이름 앞으로 나가게 하라.
고집통이, 얼간이, 때 묻은 이들로 하여
새 제안을 내도록 하고,
낡은 제안을 뒤로 미루고,
사나이로 하여 자기 자신이 아닌
도처에 기쁨을 찾게 하라.
여자들로 하여 자기 자신이 아닌
도처에서 기쁨을 찾게 하라.“
휘트먼의 <거꾸로>라는 시와 같이
삶을 살아가면서 가끔씩 배역을 바꾸어 산다면 어떨까?
서로 앞과 뒤를 바꾸고, 그러면서도 모든 사람이 행복한 나라,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조건에서
행복한 세상 그런 세상이 가장 보기가 좋고 살기도 좋은 세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한 여름 밤의 꿈과 같이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오매불망 기다리다가
올 수 없는 꿈이라고 느끼며 가끔씩 쓸쓸할 때가 있다.
우리가 기다리는 세상은 항상 바랄 수 없는 꿈일까?
하면서도 나는 그러한 꿈을 꾸고 또 꾼다.
나의 이니스프리 호도는 어디인가?
나의 이니스프리 호도는 어디인가?
사람들에게 가끔씩 묻는다,
살아가면서 일생일대의 전환기가 있는데, 당신은 어느 때가
전환기였는가?
저마다 자기가 겪어 낸 오랜 나날을 회고하다가
문득 멈추는 때, 그 때가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때였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그 때를 예이츠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나는 슬라이고에서 살았던 10대 때에 생긴 것이지만,
소로를 본 받아, 이니스프리에서 살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 향수를 안고 어느 날 플리트 가街를 걷고 있을 때,
나는 무슨 물소리를 들었고,
어떤 상점 진열장에 설치해 놓은 샘물(분수)을 보았으며,
호수의 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리고 느닷없는 기억이 <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를 쓰게 했다.
“나, 이제 일어나 가리, 이니스프리로로 가리,
거기 외 엮어 진흙 바른 오막집 짓고,
아홉 이랑 콩을 심고, 꿀벌 통 하나 두고,
벌들 잉잉대는 숲 속에 홀로 살으리,
또 거기서 얼마쯤의 평화를 누리리, 평화는 천천히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리 우는 곳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한 밤은 희미하게 빛나고, 대낮은 자줏빛으로 타오르며,
저녁엔 흥방울새 날개 소리 가득한 곳,
아 이제 일어나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의 잔물결 소리 듣고 있으니,
한길이나 잿빛 포도에 서 있으면,
가슴 깊은 곳에서 그 소리 듣네.“
예이츠의 시 <이니스프리 호도> 전문이다.
나는 어떤가,
38년이라는 세월을 살고 있는 전주,
1980년 10월 제주에서 나와서 정착한 전주가 운명적으로
내 삶과 직간접적인 맺어지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전주는 더도 덜도 아닌
운명이라는 것,
그것만을 알 뿐이다.
그 때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였고, 그 때 전주에서 정착할 수 없었던 것,
그,게 바로 운명이었다.
언제까지 내가 전주에서 살지는 모르지만,
누구에게나 자기 자인의 운명과 맞는 장소가 있고,
그래서 그 곳에서 살거나 그 살고 있는 곳을 글로 남기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마지막 <이니스프리 호도>는 어떤 장소인가?
폭염 속 낙동강을 걷고 돌아온 날 아침에
폭염 속 낙동강을 걷고 돌아온 날 아침에
이미 오래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역시 그렇게 여름은 덥습니다.
십 년 전 두 번째 낙동강을 걸을 때도
7월에 구미부근을 걸었습니다.
얼마니 햇살이 따가웠던지 입술에 화상을 입어
몇 달을 두고 고생을 했었습니다.
그늘은 없고, 오죽하면 포크레인의 그 기다란 몸체 아래 그늘에
전깃줄에 늘어선 제비들과 같이 서 있기도 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름은 더운데, 행여 하는 마음으로 나선 것이 아니라
안 걸으면 안 될 그 운명으로 인해 이틀간을
37도의 폭염 속에 함께 걸은 도반들에게 뜨거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라는 북한 식 표어가 아니고,
“자는 길 푹푹 쪄도 웃으며 가자”를 마음속으로 외치며 걷던 길,
그 길 위에서 족히 서너 말의 땀을 흘리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땀을 흘리고 기진맥진했는데도 정신이 맑아지는 것,
그것이 더운 날 걷기의 매력입니다.
이것은 그냥 그 따가운 햇살 아래를 걷고 난 뒤
그 시간들을 잊고서 ‘매급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도개의 도리사에서, 금오서원에서,
그리고 태고장과 삼가헌의 하엽정에서 보낸 시간들이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던 낙타처럼 걸어가던 그 시간들도
이미 추억이 된 시간, 열대 야 속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 아침,
지나간 그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는 것은
그 시간들이 가끔씩 떠오를 그런 징조일 것입니다.
더위, 그 더위 속에서 옛 사람은 어떤 상념에 잠겼을까요?
“오랜 가뭄에 더위마저 기승을 부려,
사람들을 굽고 태우는 듯
맑은 바람은 도대체 어디에 숨었는지,
풀과 나무는 미동도 않네.
어떻게 더위를 피할까?
시끄러운 세상을 벗어나는 게 제일이지,
발걸음 재촉해 성문 밖에 이르니
절의 누각이 진정 우뚝하구나.
청량함은 높은 곳에 가까우니 생겨나고
무더위는 고요함에 한풀 꺾여 수그러든다.
옷깃을 열고 난간 밖에 앉으니
큰 정신이 선득선득 돌아오네.
백낙천의 <달밤 누각에 올라(月夜登閣避暑)>
그렇습니다. 날 더운 날, 그곳이 정자 위거나,
아니면 큰 나무 그늘 아래 몸을 누이고 잠을 자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는 그 피서 법을 오래 전에 작고하신 나의 아버님은
터득하셨는지, 기억 속에서 아버님은 여름을 모정에서 나셨습니다,
정자도 아닌 고향의 마을 모정에 나가면
아버님의 그림자도 없는데, 기억 속에 내재된 아버님의 코고는 소리가
사방에서 두런두런 들리는 것 같은,
그런
여름 여름입니다. 여름을 잘 나시고,
건강하게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다수가 아닌 소수의 삶을 산다는 것은 어렵다.
다수가 아닌 소수의 삶을 산다는 것은 어렵다.
작금의 시대에서 홀로 선다는 것,
학연, 혈연, 지연 없이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어딘가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하고,
힘 들 때 나 힘들다 도와 달라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도와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집단이 있다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요긴한 일이다.
이 세상을 소수로 산다는 것 그것도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고 홀로 살아간다는 것,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대개 이 세상에선 다수의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법이 되고 진리가 되고,
소수는 항상 사회 구석에서 불평만 하는 불순분자 취급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폐단을 <인형의 집>의 작가인 입센은 다음과 같이 풀어썼다.
“우리 사이에서 진리와 자유를 가장 위태롭게 하는 적은 ‘무리를 이룬 다수입니다.....그, 빌어먹을 떼거지로 무리를 이룬 다수, ’다수‘는 불행히도 힘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의는 아닙니다. 정의란 ‘나 자신이나 나 이외의 소수에게만 해당되며 소수만이 항상 옳습니다......,
나는 다수 속에 진실이 있다고 하는 미신을 깨뜨릴 하나의 혁명을 시도할 생각입니다. 일반적으로 다수가 신봉하는 진리란 어떤 종류의 지리일까요? 그것들은 너무나 낡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삐그덕 거리는 그런 진리입니다. 그러나 일단 진리가 그렇게 낡은 것이 되어버릴 때 그것은 역시 허위가 되어 버립니다.....관습에 따라 이루어진 진리는, 글쎄요. 한 17년 내지 18년 정도 갈까, 기껏해야 이십년이고 그 이상 가는 것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해묵은 진리는 항시 천박해지는 법입니다. 그런데도 다수는 단지 그러한 단계에 있는 진리만을 가까이 합니다. 이러한 모든 다수의 진리란 부패하고 역한 냄새를 풍기는, ‘햄’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 주의의 도처에서 맹위를 떨치는 도덕적 괴혈병의 원천입니다.“
입센의 책 <민중의 적>에서 의사인 토머스 스토크만의 말이다.
그는 말하기를 ‘ 독립적인 인간은 가장 강한 인간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어렵지, 독립적인 인간이 되고서부터 얼마나 큰 자유를 얻게 되는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수 속에 속하고 싶어 하지 극소수 속에서 힘들게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부터 내가 무리를 이룬 다수와 대립된 존재이며 그들에 의해 배척당할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로이트의 말이다. 그의 말과 같이 오늘의 이 시대에서도
그와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이 힘들지라도 자기가 원하는 삶,
그렇게 살아야 사는 것 같이 사는 게 아닐까?
나무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시간,
나무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시간,
한 여름 모든 것이 타버릴 것 같은 한 낮에
구름 한 점 없는 길을 걸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길 위에 서 있는 작은 나무 그늘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그것도 살랑살랑 부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무 잎 새가 그림자를 드리운 그 아래를 걷는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즐거움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행복한 것이라는 것을,
한 걸음 한 걸음 금세 지나가는 그 순간이
십분, 아니 한 시간이나 되는 것 같이
소중하고 고맙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 것이
성하의 계절에 따가운 햇살아래를 걷는 것이고,
나무의 소중함을 가슴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나무,
언제나 가까이 있는 것이면서도
그 존재가치를 알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사랑하고, 경외하고 더욱 더 그리워하는 나무,
그 나무를 순수하게 예찬한 사람이 있다.
“나무보다 아름다운 시를
나는 결코 알지 못할 것 같다.
대지의 달콤한 가슴에
허기진 입술을 대고 있는 나무,
하루 종일 신을 우러러보며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기도하는 나무,
여름에는 머리 위에
개똥지빠귀의 둥지를 이고 있는 나무,
가슴에는 눈이 내려앉고
또 비와 함께 다정히 살아가는 나무,
시는 나 같은 바보가 짓지만,
나무를 만드는 건 신만이 할 수 있는 일“
조이스 킬머의 <나무들>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아름다운 시를 짓는 시인보다도
온전히 서서 모든 것을 이롭게 하는 나무가 더 위대하다는 것을
가끔씩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나무는 자라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온갖 세상의 풍파를 맞으며
더 높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오르며 경배하는 나무,
나는 나무를 보면, 나무가 되고 싶어진다.
그래서 가끔씩 그 나무를 끌어안고 나무에게 이 것 저것을 묻는다.
“저 소리는 무슨 소리지?
저 구름은 어디로 가지?
너도 가끔 외롭니?“
하고 물어도, 물어도 대답도 않는 나무,
그러다가 문득 바람이 불면 그 바람결에 한 마디 말을 건넨다.
가만히 기다려 봐,
지금 저 소리는 무슨 소리지?
너는 항상 외롭니?
섬진강변 수선루에서 한 여름 한 참을 보내다.
섬진강변 수선루에서 한 여름 한 참을 보내다.
데미샘에서 내려온 섬진강이 운교리에서 백운동천을 만나고,
도르메 물레방앗간을 지나고 손가정을 거쳐온 물이 마령을 지나며
마이산에서 내려온 마이산천을 받아들인다.
그 뒤 진안 성수면으로 가기 전인 강정리에
수선루睡仙樓라는 아름다운 누각이 있다.
연안송씨 제각에서 보이면 언뜻 보이는 정자. 가까이 가서야
제대로 눈에 차는 정자가 수선루다.
이 정자는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었는데,
자연 상태의 암굴을 적절히 이용하여 2층으로 건립하였고,
2층 중앙에 ‘수선루睡仙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정자는 1686년(숙종 12), 우애가 돈독하고 학문이 높은
연안송씨(延安宋氏) 4형제 진유(眞儒)·명유(明儒)·철유(哲儒)·서유(瑞儒)가
조상의 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자다.
수선루라는 이름은 목사(牧使) 최계옹(崔啓翁)이 지은 것으로,
이들 4형제가 80세가 되어서도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마치 옛날 중국에서 전란을 피하여 상산(商山)에서 은거한
4신선(하황공·동원공·용리선생· 기리수)의 기상과 같다고 하여 붙였다.
그 뒤 1884년(고종 21) 후손 송석노(宋錫魯)가 중수하였고,
1888년(고종 25) 한말의 우국지사 송병선(宋秉璿:1836~1905)이
새롭게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더운 여름날 더위를 식히고, 섬진강과 옛 사람들의 풍류를
알리기 위해 진안여중 학생들과 찾아간 정자는
천연 암굴과 바위를 있는 그대로 살려서 아름답기 이를 데 없었지만,
관리가 허술하고 터줏대감인 모기들의 등살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이렇게 후미진 곳에
이렇게 아름답고 고즈넉한 정자를 지은 옛 사람들의 풍류가
대단하다고 여기면서도, 너무 한적한 시골이라 찾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횃불을 밝힌 채 밤고기를 잡던 손가정으로
향하면서 나는 송익필의 시 <산길을 가며>라는 시 한편을 떠올렸다.
가면 쉬는 걸 잊고, 쉬면 가는 길 잊어,
솔 그늘에 말을 매고 물소리를 듣노라.
뒤에 오던 몇 사람이나 나를 앞서 갔는지,
누구나 가게 될 걸 다투어 무엇 하나.“
그러니까 말이다.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나타나는 것들.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나타나는 것들.
어느 순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사람을 보는 눈도 그렇고, 사물을 보는 눈도 그렇다.
어느 순간, 사랑하는 것, 미워하는 것이 변하게 된다.
“내 젊은 시절에는
기쁨만을 찾았었다.
그리곤 산꼭대기에 올라
슬픈척하고 노래를 짓곤 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슬픔도, 시달림도, 아픔도 다 겼었고,
이제 적당한 말로
부를 노래를 찾지 못한 채
“정말 가을의 황금빛은 아름답구나.”
라고만 할 뿐이다.“
중국의 시인 신기질辛棄疾이 노래한 것과 같이
어느 순간 삶을 대하는 마음,
사물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이다.
길도 그렇다.
어떤 사람이 보아도 딴지를 걸 수 없는
쭉 뻗은 아름다운 길이 아닌,
질서정연하지도 않고 비뚤어지고, 어설픈 길을 보면서
문득 저 길을 걸어가고픈 충동이 생기는 것,
오랜 나날을 슬픔과 절망에 차서 걸어 본 다음에야 이해가 되면서
그 길을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밀양시 삼랑진 낙동강가의 돌로 쌓은 잔도가 그렇다.
어느 때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깎아지른 벼랑에 소꿉놀이하듯 쌓아올린,
그러나 지세히 보면 볼수록, 어디 한 군데 나무랄 것이 없는
절묘한 아름다움이 숨어 있는 잔도를 보면
이 땅을 살다간 선조들의 삶이 애잔하면서도 곁에 있다면
꼭 안기고 싶은 사랑이 물씬물씬 피어 오르는 길,
낙동강 잔도 길이다.
문득 달려가서 그 길을 걷고 싶은
낙동강 잔도 길이 숨어 있다가
4대 강 사업을 하면서 들어났으니,
세상은 어느 한 편에선 항상 아이러니칼하다는 것,
그것이 정설이다.
낙동강 잔도처럼 지금도 숨어 있는 것이 도처에 있는데도
찾지 못하는 것, 눈을 부엉이처럼 뜨면 그 숨어 있는 것들이 보일까?
이 세상을 사는 세월이 얼마나 되나,
이 세상을 사는 세월이 얼마나 되나,
이 세상을 사는 세월이 얼마나 되나,
어린 시절은 그렇게 세월이 가지 않는 것 같더니,
사십, 오십 넘어서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강물이 여울져 흐르듯
금세 가고 또 가는 것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 같다,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살아 있는 날을 금 쪽 같이 아껴서 써야 하는데,
그렇게 잘 살았다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정답은 없지만,
한 나라 때의 악부민가 <서문을 나서며>을 보면
어렴풋이 그 실마리를 붙잡을 수가 있다.
“서문 밖을 나서, 걸으며 생각하네.
오늘 즐기지 않는다면, 언제를 기다려야 하나.?
얼른 즐겨야지, 얼른 즐겨야 해,
때가 된 거야.
어찌 슬퍼하고 있을 건가?
이런 때가 다시 오길 기다릴 건가?
맛있는 술 빚고 기름진 고기 구워,
좋아하는 사람 불러오면 근심걱정 풀 수 있지,
백 년도 안 되는 우리네 인생,
언제나 천년의 걱정을 안고 살지,
낮은 짧고 고통스러운 밤은 길어,
어찌 촛불 켜들고 밤새워 놀지 않으리,
노닐어봐야 구름 사라지듯 곧 사라질 터이지만,
낡은 수레 야윈 말일지언정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잖아.“
백 년도 못살면서 천년의 걱정을 하고 사는 우리네 인생,
그래서야 어디 쓰겠는가?
그냥 잊어버리고, 순간을 잘 놀고 잘 살자고 다짐한다.
아침에 출발하여 점심 때 서귀포에 도착하고
서귀포 학생들과 성읍미속마을과 성산포 일대 답사를 하고,
서귀포 밤공기에 취했다가,
다시 일요일 돌아오는 제주 일정,
모든 것 잊고, 서귀포와 성읍,
그리고 제주의 바다만 바라보고 생각하자.
사는 것, 그냥 사는 것을,
나도 당신도 너무 복잡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서,....
모든 하루는 한 편의 아름다운 소네트다.
모든 하루는 한 편의 아름다운 소네트다.
어떤 날의 하루는 길고,
어떤 날의 하루는 너무 짧다.
그렇다면 ‘어제‘ 라는 날은 어땠을까?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읽다가
서귀포 등기소 앞에서 800번 버스를 타고
제주공항으로 향했고, 한 시간 10분의 시간 끝에 도착한 공항에서
시간을 기다리다가 아홉시 반 군산 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도착한 군산 공항에서 둘째 아들 지원의 차에 실려 전주로 왔다.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24일에 떠날 여행준비와 강의 준비를 하다가 보니
하루가 저물었다.
바쁜 듯싶기도 하고, 그렇고 그런 하루 같기도 한 날이었지만
찌는 듯한 더위 때문에 길고도 긴 하루였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야 하루가 가고
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여름이 간다고 스스로 자위하고,
안도하는 나날을 보낼 만큼 우리에게 많은 나날이 남아 있는 것일까?
아니다. 시시각각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라는
그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만 이 지상에서 가장 확실한 일이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법을 배우기 위해
‘시간’은 너무 짧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한 말이다.
시간, 이 지상에서의 시간이 너무 짧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세상에서 허비할 시간은 단 한 순간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시간의 중요성을 온 몸으로 깨달은 것이다.
일찍이 오스카 와일드도 말했지 않은가?
“모든 하루는 한 편의 아름다운 소네트이니.”
그리고 그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있다.
“당신이 진정으로, 완전하게, 완벽하게, 살 수 있는 시간은
겨우 몇 년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가 한 해와 같고,
그 한 해의 하루는 길고도 짧습니다.“
그렇다. 누군가의 인생은 짧고, 누군가의 인생은 길다.
오래 살고, 짧게 산 것으로 그 인생의 깊이를 가늠할 수는 없다.
‘어떻게 살았는가?’ ‘무엇을 남겼는가?’ 를 두고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해야 할 것이고,
이미 가버린 자는 그 평가에서 아무런 대응을 할 수가 없다.
단지 살아갈 뿐,
그러므로 남은 인생을 최선을 다해,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신이 정한 자신의 삶을 살다가 가는 것이 중요하다.
날이 덥다고, 날이 춥다고, 비바람 불고 눈보라 친다고
가만히 숨죽이고 있을 시간은 우리에게 없다.
그것만이 이 시간 속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이다.
‘시간!’ 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죽음이란 이 세상에 왔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
죽음이란 이 세상에 왔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
오래 사는 것이 좋은가? 빨리 죽는 것이 좋은가?
알 수 없다. 하지만 빠르게 죽지 않고 오래 살면서도
자신에게,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 그것이 잘 사는 것이리라.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고, 조금씩 아쉬움을 남기는 것,
그게 세상사의 이치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는 어떠한 축제가 아니다.
인간은 아직도 가장 아름다운 축제의 방법을 습득하지 못하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죽는 것이 너무 늦다.
또 어떤 자는 죽는 것이 너무 이르다. ‘때에 맞추어 죽어라.”
이렇게 말한 니체였지만 그의 죽음도 때를 잘 맞춘 것은 아니다.
미치지 않고 더 건강하게 살았더라면 니체는 인류를 위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남겨놓았을 것이다.
그런 죽음을 두고 하이데거는 이렇게 정의 하고 있다.
“죽음은 현 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가장 극단적이며,
다른 가능성에 의해서 능가 될 수 없고,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을 위해 한 사람이 죽음을 택했고,
하루 종일 이런 저런 말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죽음에 앞서 어떤 말들을 남겨놓았을까?
“어느 장소에서나 죽음은 순식간에 닥쳐오나니,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좋으리라.
우리의 함성은 어딘가에서 들어줄 귀에 닿을 것이고,
다른 이들의 손이 우리의 무기를 잡을 것이며,
다른 이들이 스타카토로 울리는 기관총소리와
전쟁의 승리의 함성으로 만가를 들려주리라.”
체 게바라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감하고
죽기 몇 개월 전에 쓴 글이다.
그러나 그 만가는 이 지상에 아직도 울려 퍼지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저렇게 시끄럽고 난리법석이다.
한 사람이 왔다가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
죽음이란 바로 더도 덜도 아닌 그런 것이다.
조금 있으면 조금은 더 의미 있는 여행을 위해
이 나라를 떠나야 하는데, 지금도 그 맑고 쓸쓸한 한 영혼의 존재가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니,
나 지금 이렇게 그 영혼을 위해 <엽연품>에 실린
한 마디 말을 건네는 그 밖에 할 일이 없음을 한 한다.
“사물이 생겨나매 다할 때 있고, 흥하면 으레 쇠하게 마련
만물이 모두 이렇게 무상 하느니.“
그림 같은 강산에서 돌아온 날 새벽에,
그림 같은 강산에서 돌아온 날 새벽에,
무슨 일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엊그제 떠났는가 싶은데,
그 사이 8박 9일의 여정을 마무리 하고 나는 지금 떠났던 장소인
내가 집이라고 생각하는 그 길 위의 의자에 앉아서
지나간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그림 같은 풍경이고, 노래 같은 순간들이었다.
언제나 갈까 기다리던 오대산과 면산,
그리고 덤으로 갈 수 있었던 불광사의 아름다움은 오래 도록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문득 마음이 허전할 때
떠올릴 수 있는 풍경이 된 것이다.
“인생에 순수하고 지속적인 즐거움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모두 책, 그림, 자연경치에서 오는 것이다.”
해즐릿의 말이다.
그렇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책이 강산이고, 강산이 그림이다.
그것을 이 세상을 떠돌면서 매 순간 느끼고,
느끼면서 체화한다.
하지만 그렇게 자연을 체화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 것도 아니고
누구나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움(美)이라고 하는 보물을 끌어오려는 자는
현자의 마술이라는 최고의 기술이 필요하니까요.“
최고의 기술을 습득하는 것,
가장 중요한 첩경이 바로 산천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네(詩中有畵 畵中有詩)."
가고 또 가다가 보면, 이런 감흥을 느끼고 내가 그림 같은 풍경 속에
주인이 되는 경지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떠나고 또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사람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
다시 사람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
“하나의 선은 기다린다.
하나의 선은 희망한다.
하나의 선은 하나의 얼굴을 다시 생각한다.“
앙리 미쇼의 말이다.
무언인가, 모르지만 그리워하는 것을 기다리고,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을 희망하고,
누구인가 확실하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면서 생각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희망‘ 이라고 여기면서 기다리는 세월이
너무 오래였고, 어쩌면 이 세상에서 다가가지 못할 것이고,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여긴 것들이 가끔씩 이루어질 때가 있다.
기적 같은 일이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고,
훗날에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다.
꿈만 꾸다가 꿈속에서 죽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가끔씩 주제넘게 꿈을 꾼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 오는 꿈,
기다리고 기다라는 사람을 만나는 꿈을
“마음(心)으로 도(道)를 안다.”
순자의 말이다.
그럴까? 하면서 이리 변하고 저리 변하는 사람의 마음
그 마음이 가는대로 가다가 보면,
결국 이르는 것은 세상의 마지막,
그래서 끊임없이 길에서 길을 묻고
길을 걷는다.
그렇다면 살아가면서 만나는 인간, 그 인간은 누구일까?
“우리는 인간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일반화를 시도할 수 있다.
즉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고, 수시로 변하며,
거짓말쟁이에다 사기꾼이다. 그들은 위험을 피하며,
이익에 대해서는 대단히 탐욕적이다.
당신은 그들이 당신편일 때는 잘 대해준다.
그들은 위험이 멀리 있을 때는 당신을 위해서 그들의 재산과
생명과 심지어는 가족들의 위험을 무릅쓰고 라도
당신을 위해서 죽을 것처럼 행동하지만,
막상 당신이 위험에 빠지게 되면 태도를 돌변해서
당신을 배반할 것이다.....인간이란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하는 자보다는 사랑을 베풀도록 하는 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을 덜 걱정하는 그런 존재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렇게 말하는데,
김지하 시인은 “사람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고 말하며
사람은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믿었던 사람들은 시인을 떠나갔고,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계신다.
정치는 금세 변하고 또 변하는 유한한 것이고,
문학과 예술은 세세토록 시공간을 초월해서 이어지는 것,
더 늦기 전에 날 잡아서 원주에 가, 선생님을 만나야겠다.
사람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 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야겠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자.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자.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인지 ‘놀이’인지
구별이 안 가는 일에 매달려 있다가 보니,
이틀이 지났다.
금세今世, 가고 또 가는 세상,
세월이 그처럼 가고 있다는 것은
‘삶’ 역시 그렇게 흐른다는 것이다.
“삶이 그대의 예술이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그렇게, 예술처럼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삶을 예술과 같이 산다는 것은
아무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삶’을 부여받는 사람 중,
불과 몇 사람만이 ‘삶’을 예술처럼
아니 불꽃처럼 살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스카 와일드는
더 진지하게 한 마디 말을 던진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삶을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죽는다.“
수없이 부서지고, 깨지고, 그리고 울고 웃고 통곡한 다음에야
오는 것, 진정한 삶의 축제다.
산다는 것이 항상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과 같다면,
내게 오는 그 어떤 삶이든 마다할 수 있으랴.
달게, 그리고 운명이라고 여기며 받아들이고 감내하자.
그리고 지금을 즐기자,
눈이 아프도록 책을 보고, 그것들과 하나가 되자,
이 새벽에 내가 나에게 건네는 최선의 위로이자 당부다.
자기 자신을 너무 찬미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기 자신을 너무 찬미하는 것은 위험하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지식이건, 힘이건, 아니면 삶에 대한 자신이든
자신을 대단하다고 여기는 사람과,
자신은 한 없이 나약하고 보잘 것 없다고 여기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어느 것이 더 나을까?
알 수 없지만, 백년 도 못 사는 인생,
알면 얼마나 알고 모르면 얼마나 모르겠는가.
그런데도 스스로를 찬미하는 사람이 있고,
주눅이 들어 사는 사람도 있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니체가 한 마디 잠언 같은 말을 들려준다.
어떤 현자가 어떤 바보에게 물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이 무엇인가?“
그 바보는 단순히 가장 가까운 도시로 가는 길을 묻는 것처럼
즉각 대답하였다.
“너 자신을 찬미하는 것, 그리고 거리에서 사는 것이다.”
“기다려!”
현자는 대답했다.
“너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자신을 찬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바보는 반격했다.
“하지만 어떻게 모욕을 느끼지 않고 계속적으로 찬미할 수 있는가?”
니체의 <즐거운 지식> 중 ‘행복에의 길’이란 글이다.
자기 자신에 도취되어, 아니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 것이 없다고 여겨서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자신을 찬미하다 못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과 같이 스스로에 도취되어 살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자신의 민낯을 제대로 바라볼 때
그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가를 깨달을 때
그 때가 인생에서 가장 모멸스런 순간,
슬픔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
그게 참 어렵다.
나는 아직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않고,
겸손하고 성실하게 순간순간을 잘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다.
더 빠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고,
새벽인데도 지치지도 않고 돌면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면서도
거들먹거리지도 않고, 자신을 찬미하지도 않는
선풍기에게 배운다.
세상을 사는 이치를,....
누가 언젠가 삶을 제대로 붙들 줄 알았는가?
누가 언젠가 삶을 제대로 붙들 줄 알았는가?
사람들 속에서, 그 혼잡함 속에 있는 것보다
혼자서, 그냥,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
느닷없이 이루어진 모임,
그렇다고 오랫동안 서로 친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모임이란
적절한 배합이 되지 않은 콘크리트처럼 제각각 놀다가
서로가 다르다는 것만을 획인한 채 헤어지는 것이 정해진 답이다.
어쩌다 한 번 만나는 모임만 그러한 게 아니라
인생도 그러하다.
우연일수도 있고, 필연일수도 있는 인생,
이왕 태어났으니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지만,
인생이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서 살다가 보면
크고 작은 회한만 남는 것이 인생이다.
“누가 언젠가 삶을 제대로 붙들 줄 알았는가,
누가 그 중 절반이라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꿈속에서, 열병에 잠겨, 바보들과의 대화에서,
사랑의 고통에서, 공허하게 시간을 탕진하면서,
그렇다. 평온하고 담담한 사람조차
무엇을 해야 할까 라는 의식과 함께 태어나고,
일찌감치 인생의 길을 고른 사람도,
인생의 모순 앞에서는 창백해졌다.
왜냐하면 누구나 행복이 자신에게 웃음 짓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 같은 것이 정말로 온다면, 행복을 견디는 일만은,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 우리가 단지 원하고 감히 시도할 뿐,
행복은 지붕에서부터 잠자는 사람에게 떨어지지 않고,
달리는 사람도 행복을 사냥할 수 없으니,“
그라프 플라텐의 글이다.
누구나 행복한 삶을 갈망하지만
그 행복은 항상 멀리 있기에 가다가 만나지 못하고
중지하는 경우가 더 많은, 그래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마저도
사치일 때가 더 많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하면서 살아가는 삶,
삶은 ‘그래도’ 하고 참는 그 순간 속에서
우리가 삶을 견디면서 이루어내는 그 것,
그것이 바로 삶이다.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다시 ‘여름걷기학교’가 열리는
강원도로 떠나서
삶을 재정비해야겠다.
천천히, 아주 재미나게, 의미 있게 살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고, 기이한 경치를 많이 보는 것이 남는 삶이다.
수많은 책을 읽고, 기이한 경치를 많이 보는 것이 남는 삶이다.
세상에는 기이한 사람들이 많고도 많다.
오늘날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옛 시절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만이 아니고, 온갖 사물들이 다 그러한데,
특히 기이한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 중 한 사람이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이었다.
"사마천은 기이한 것을 좋아하고, 경서經書에 반하는 허물이 있다.“
유협이 사마천을 평한 글인데, 그래서 그런지 <미공비급>에도
사마천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오입부吳立夫는 유람을 좋아했다. 그래서 중원의 경치가
기이한 곳 및 옛 사람들이 춤추며 놀던 곳과
싸움하던 전쟁터를 만날 적마다 술을 마시고
큰 소리로 노래 부르면서 스스로 즐겼다.
그야말로 사마천司馬遷의 유풍이 있는 사람이었다.
강남으로 돌아와서는 바닷가를 따라 교문협을 거쳐
소백화산으로 갔다. 반타석에 올라서는
바닷물을 새빨갛게 물들이면서 장렬하게 떠오르는 해의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리고는 안기생安期生. 선문羨門을 불러
그들과 함께 놀고 싶은 생각이 부풀었다.
이리하여 금회襟懷가 더욱 소랑疎朗해졌고,
문장도 더욱 웅장하고 기이한 기상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다.
“글을 잘 지으려면 3만 권의 책을 읽어야 함은 물론이고,
천하의 기이한 산천을 두루 구경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리 글을 잘 지었다 하다라도
아녀자들의 얘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미공비급>에 실려 있다.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고,
수많은 책을 읽어야 만이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말이다.
나 역시 천성적으로 유람을 좋아하고, 기이하거나
처음 보는 것들에 경도되는 습성이 있어서
산천 유람이 직업이자 일종의 사명감이 되었다.
어디 그 뿐인가,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바꾸어 말하면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산천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
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의 모토가 되다가 보니
우리 국토답사가 진정한 공부이자 삶의 자세가 되었다.
그런 자세를 가지고 출발했던 2018년 <여름 걷기 학교>가 마무리 되었다.
인제와 양구, 그리고 설악산 자락에서 펼쳐진 이 행사에서
나라 안에 기이한 경치로 알려진 여러 곳을 본 것은 큰 수확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의 마음과 제도의 불합리 때문에
마음이 이래저래 부산하고 스산했던 행사였다.
하지만 모든 것은 지나가고 또 지나가는 것,
가고 오는 것, 내게 다가오는 것,
그 모든 것들을 감내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곧 진리이리라.
세상의 이치는 지나가는 것,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진다는 것이다,
내일의 태양은 내일 또 다시 떠오를 테고,
다시 새로운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지,
함께 했던 모든 도반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수많은 책을 읽고, 기이한 경치를 많이 보는 것이 남는 삶이다.
수많은 책을 읽고, 기이한 경치를 많이 보는 것이 남는 삶이다.
세상에는 기이한 사람들이 많고도 많다.
오늘날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옛 시절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만이 아니고, 온갖 사물들이 다 그러한데,
특히 기이한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 중 한 사람이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이었다.
"사마천은 기이한 것을 좋아하고, 경서經書에 반하는 허물이 있다.“
유협이 사마천을 평한 글인데, 그래서 그런지 <미공비급>에도
사마천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오입부吳立夫는 유람을 좋아했다. 그래서 중원의 경치가
기이한 곳 및 옛 사람들이 춤추며 놀던 곳과
싸움하던 전쟁터를 만날 적마다 술을 마시고
큰 소리로 노래 부르면서 스스로 즐겼다.
그야말로 사마천司馬遷의 유풍이 있는 사람이었다.
강남으로 돌아와서는 바닷가를 따라 교문협을 거쳐
소백화산으로 갔다. 반타석에 올라서는
바닷물을 새빨갛게 물들이면서 장렬하게 떠오르는 해의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리고는 안기생安期生. 선문羨門을 불러
그들과 함께 놀고 싶은 생각이 부풀었다.
이리하여 금회襟懷가 더욱 소랑疎朗해졌고,
문장도 더욱 웅장하고 기이한 기상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다.
“글을 잘 지으려면 3만 권의 책을 읽어야 함은 물론이고,
천하의 기이한 산천을 두루 구경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리 글을 잘 지었다 하다라도
아녀자들의 얘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미공비급>에 실려 있다.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고,
수많은 책을 읽어야 만이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말이다.
나 역시 천성적으로 유람을 좋아하고, 기이하거나
처음 보는 것들에 경도되는 습성이 있어서
산천 유람이 직업이자 일종의 사명감이 되었다.
어디 그 뿐인가,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바꾸어 말하면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산천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
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의 모토가 되다가 보니
우리 국토답사가 진정한 공부이자 삶의 자세가 되었다.
그런 자세를 가지고 출발했던 2018년 <여름 걷기 학교>가 마무리 되었다.
인제와 양구, 그리고 설악산 자락에서 펼쳐진 이 행사에서
나라 안에 기이한 경치로 알려진 여러 곳을 본 것은 큰 수확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의 마음과 제도의 불합리 때문에
마음이 이래저래 부산하고 스산했던 행사였다.
하지만 모든 것은 지나가고 또 지나가는 것,
가고 오는 것, 내게 다가오는 것,
그 모든 것들을 감내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곧 진리이리라.
세상의 이치는 지나가는 것,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진다는 것이다,
내일의 태양은 내일 또 다시 떠오를 테고,
다시 새로운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지,
함께 했던 모든 도반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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