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 밀양시 하남읍 반월리에서 양산시 물금나루까지

산중산담 2019. 6. 26. 13:37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열 번째

태백의 황지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열 번째 밀양시 하남읍 반월리에서 양산시 물금나루까지

 

2018년 정기기행 낙동강 기행이 1123()일에서 25(일요일)일까지 23일간 실시됩니다.

밀양시 하남읍 반월리에서 삼랑진을 지나 나라 안에서 유일한 보물 작원관 잔도를 바라보며 양산시 물금나루까지 걸어갈 이번 기행에 참여바랍니다.

 

<밀양지명고>명례리는 김해군 술미와 진영으로 건너가는 나루이다. 옛날에는 이 나루가 낙동강의 조운이 번성할 때 수상교통의 중심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며, 수산나루 다음으로 번성했던 곳이다. <밀주지>에는 용진이 명례촌 앞에 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서 명례나루가 용진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없어졌다.”고 실려 있는데 고려시대의 문장가인 정이오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팔월의 용진에는 강물이 질펀한데

물가에 깨끗한 흰 모래

눈을 도리어 밝게 하네.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두나루 멀리 있고

양쪽 물가의 푸른 산은

나그네를 보내는구나.

(...)

 

이제 강은 저 신촌마을에서 다시 한바퀴 휘돌아 간 뒤 밀양강을 받아들일 것이다. 멀리 영남루가 있는 밀양이 신기루처럼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밀양도호부 형승조에 밀양은 긴 내를 굽어 당기고 넓은 들을 팽팽히 얼싸안고 있으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밀양이 들이 넓고 기름져 살만한 땅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리라. 또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숭상한다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이곳 밀양에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과 함께 삼대 아리랑으로 알려져 있는 밀양라리랑이 전해온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조옴 보소 / 동지 석달 꽃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 정든 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 /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들으면 들을수록 눈물이 뚜뚝 떨어질 것 같은 정선아리랑과는 달리 흥이 절로 나는 밀양아리랑이 나룻배에 실려내려올 듯한 착각에 빠진 내 발길을 어느새 신촌마을에 이른다. 신촌마을은 시전 북쪽에 새로 만든 마을이고 신촌 동쪽에는 이승모팅이라는 모팅이가 있다. 김해시 한림면 시산리 신촌에서 나는 모정고개를 넘어야 한다. 지친 내가 손 흔들어도 차는 멈추지 않고 지치고 지친 몸으로 구부러진 고개를 넘어가자 생림면 마사리다. 낙동강가에 모래가 많아 마사라 이름 지은 마사리 1구 북곡은 두엄더미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부엉이가 살았다고 하고 그 아래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어 지은 이름이라는 솔밭마을이 있다. 고성에서 하남읍을 건너가는 고성나루를 지나 독산마을에 이른 마릿가라고 불리는 독산마을에서 밀양시 삼랑진읍으로 건너가는 나루였던 마릿가 나루에는 강물만 흘러서 가고 일제 때 만들었다는 인도교(700m)에는 드문드문 차들이 지나간다.

(...)

 

대구에서 삼랑진까지 한시간 삼랑진역 부근 여관에 여장을 풀고 이불 속에 몸을 들이민다.

삼랑리(三浪里)는 삼랑진 또는 삼랑이라 부르는데 본래 밀양군 하동면(삼랑진읍)의 지역으로서 밀양강과 낙동강이 합하여 마을을 싸고 흘러간다해서 삼랑진 또는 삼랑이라 부르기도 하고 세 갈래의 강물이 부딪쳐서 물결이 거센 곳이라 하여 삼랑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태백산 두메에 낙화한 진달래 꽃잎이

흘러 흘러 삼랑의 여울목을 떠 내릴 적은

기름진 옛 가락 백리 벌에

노고지리 노래도 저물은 때이라네.

나일이여, 유프라테스여, 갠지스여, 황하여,

그리고 동방의 조그마한 어머니 낙동이여.

저 천지 개안의 \득한 비로 삼날부터

하늘과 땅을 갈라 흘러 멎음 없는 너희는

진실로 인류의 예지의 젖줄.

이라고 청마 유치환이 <낙동강이여>에서 노래한 삼랑진은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삼랑리라고 이름지어졌다.

 

하부 아랫말 서북쪽에 있는 뒷기미 마을에서 상남면 외산리 오우진나루로 건너가는 나루가 낙동강 나루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뒷기미(오우진)나루이고 강 건너 오우진 나루에 있는 정자는 뜻이 맞는 민씨 다섯 사람이 세웠다는 오우정(五友亭)이다. 나는 기능을 잃어버린 뒷기미나루에서 노젓는 뱃사공이 부르던 뒷기미 뱃노래를 떠올려 본다.

뒷기미 나리는 눈물의 나리

임을랑 보내고 나 어찌 살라고

아이고데고...... 성화가 났네

(...)

 

내가 그 풍경을 몇 컷 찍고 있는데 카메라 찍지마. 카메라를 쪼아볼 것이니까라는 고함소리가 들린다. 왜 그랬을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철길에 서서 망서린다. 여기는 봉화일대의 한적한 철길이 아니라 오분 간격으로 십분 간격으로 상행선, 하행선 열차가 쏜살같이 지나는 곳이다. 이 구간을 아무탈 없이 지나갈 수 있을까? 갈 수 있다는 생각 하나로 최선을 다해 건너자. 생각하는 사이 3분여 차이를 두고 열차 두 대가 지나간다. 나는 터널 앞에서 혹시나 하고 소리를 듣는다. 아직 오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 100M 거리를 질주했던 것처럼 온 힘을 다해 나는 달린다. 온몸에 땀이 흐르고 드디어 터널을 지났다. 터널을 지났어도 철길의 갓길은 만만하지 않다. 길이 없다는 것을 택시요금 만오천원을 주고 돌아와야 할 길을 드디어 나는 넘어온 것이다.

(...)

이곳 가야진에 공주 웅진과 함께 신라 사독 중의 하나인 남독이 있었다. 해마다 공주 웅진과 같이 향촉과 사자를 보내 장병들의 무운장구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 하고 한발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다. 또한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잇는 비석골 지나 삼랑진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신불암동에 오의정(烏義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그곳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