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걸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고창읍성과 문수사를 지나 장성 편백나무 숲을 거닐다.

산중산담 2019. 6. 26. 13:55


걸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고창읍성과 문수사를 지나 장성 편백나무 숲을 거닐다.

걸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고창읍성과 문수사를 지나 장성 편백나무 숲을 거닐다.

 

어느 때나 가서 걸으면 몸과 마음이 평안해지고, 이런 저런 생각이 정리 되는 길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고창읍성을 천천히 거닐고, 다시 문수사에서 장성 편백나무 숲 사이를 거니는 것입니다.

올해는 초겨울 사각사각 밟히는 나뭇잎들의 함성과 도란다란 내는 소리를 들으며 129일 일요일에 고창으로 갑니다.

 

조선시대의 학자이며 전라감사를 지냈던 이서구가 지었다고 전해지는호남가고창성 높이 앉아 나주 풍경을 바라보니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고창성을 이 고장 사람들은 모양성이라고 부른다. 해미읍성, 낙안읍성과 더불어 나라 안에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모양성은 단종 1(1453)에 세워졌다고도 하고 숙종 때에 이항이 주민의 힘을 빌려 8년간에 걸쳐 쌓았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성벽에 새겨진 글자 가운데 계유년에 쌓았다는 글자가 남아있으며동국여지승람둘레가 3008척 높이가 12척이고 성내에 3개의 연못과 세 개의 하청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이 성종 17년에 발간되었기 때문에 그 전에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고창성은 여자들의 성벽 밟기로 유명한데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의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게 되며 세 바퀴를 돌면 저승길이 환히 보며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윤삼월이 가장 효험이 좋고 초엿새 열엿새 그물엿새 등에 성 밟기를 하기 위해 도처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지금은 가을에 열리는 고창 모양성 축제 때에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의 높이가 만만치 않아 떨어지면 불상사를 입는다. 그 예가 오래 전에산골소녀 옥진이 시집이라는 시집을 펴냈던 김옥진씨는 고창여고 재학 중 성 밟기 중에 떨어져 반신불수가 되어 시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모양성에는 여름햇살만 남아있고

모양성 바로 입구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초가집 한 채가 있다. 그 집이 판소리 여섯 마당 중춘향가,심청가,흥보가,적벽가,변강쇠가등의 판소리 이론을 정립한 신재효의 집이다. 그 자신이동리가에서 시내 위에 정자 짓고 / 정자 곁에 포도 시렁 포도 곁에 연못이라........”했던 것처럼 그는 본래 광대 노릇을 한 사람이 아니었고 재산이 넉넉한 양반이었는데 풍류를 즐기는 성품을 타고나서 판소리와 함께 민속음악들은 연구하고 체계화시키는데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신재효는 집안에 노래 청을 만든 다음 수많은 명창들과 교류를 나누었고 김세종, 정춘풍, 진채선, 허금과 같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신재효와 진채선 사이에는 애틋한 이야기가 한 토막 전해진다.

고종 4년에 경복궁景福宮이 세워지자 경회루慶會樓에서 축하잔치가 벌어졌다. 그 자리에서 진채선이방아타령을 불러 이름을 날리게 되자 대원군大院君은 진채선을 포함한 기생 두 명을 운현궁으로 데려간 다음 대령 기생으로 묵어 두었다. 갔다가 금세 돌아올 줄 알았던 진채선이 돌아오지를 않자 외로움을 느낀 신재효는 그 외로움을도리화가라는 노래로 엮어 진채선에게 보냈다.

그때 신재효의 나이는 59세였고 진채선의 나이는 스물넷이었다. 진채선의 추천으로 대원군에게 오위장이라는 벼슬을 받은 그는 1876년에는 흉년이 들어 사람들을 도와준 공으로 통정대부를 받기도 하였다. 신재효는 판소리 여섯 마당의 사설뿐만이 아니라도리화가,광대가,오십가,어부사,방아타령,괘씸한 양국 놈가같은 풍부한 표현력으로 분명하고 완벽한 사설을 정리한 한국의 세익스피어라고도 하고 한편에서는 그가 정리한 판소리 사설이 지나치게 한 문투로 만들어져 민중적이고 토속적인 판소리의 맛을 크게 줄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봄날에 약간은 쌀쌀하고 적적한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지, 천천히 걷다가 보면 나타나는 고창군 고수면의 문수사文殊寺는 문수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절로 사지(寺誌)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 의자왕 3(643)에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자장율사는 당나라의 청량산에 들어가 삼십칠 일 기도를 거듭한 끝에 지혜를 표상하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깨닫고 귀국하였다. 우연하게 이곳을 지나가던 자장율사는 이곳의 산수山水가 중국의 청량산과 너무나 흡사한 것을 이상하게 여겨 산기슭의 암굴을 찾아 칠일기도를 올렸다. 그 때 문수보살이 땅 속에서 솟아나오는 꿈을 꾸고 그 자리를 파보니 화강암으로 된 커다란 문수보살이 나왔다. 그래서 이 산을 청량산 또는 문수산文殊山이라 이름 짓고 절을 세운 후 문수사라 이름 지었다.

 

?〔壺? 등산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문수산(630m)은 고창의 진산 방장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여러 봉우리를 지나 양고살재, 솔재, 검곡재를 이루고 전 남북을 가르며 뻗어 내린 곳에 우뚝 솟은 산이다.

 

문수사에서 길은 나라 안에 소문이 자자한 장성 편백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추암리는 추서와 충암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추서에는 고려때 글씨로 유명한 운묵雲?스님이 만든 석탑石塔과 큰 석종石鐘이 있었다는데, 그 종을 일제 때 일본인들이 가져갔다는 취서사터가 남아 있다. 추암리 망월리는 망월암望月庵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이곳 추서리로 부르는 취서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마을을 없앴던 곳인데 현재 드문 드문 있는 집들은 그 뒤에 새로 된 마을이다. 망월 북쪽에 있는 백련白蓮마을에 백련암의 터에는 백련암의 축대만 남아 있고, 백련 북쪽에 있는 골짜기에는 백련암의 법당터가 남아 있다. 백련 북쪽에서 전북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너무 가팔라서 오르는 것이 되다는 뜻을 지닌 된재이다

그래서 이 고개를 넘지 않고 조림왕 임종국씨가 심은 편백나?? 숲길을 따라서 넘는 길을 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