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초입에 대전 계족산성과 대전 일대를 걷다.
겨울의 초입에 대전 계족산성과 대전 일대를 걷다.
대전 근교에 신탄진 나루가 있습니다. 금강변의 이름난 나루, 그 나루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신탄진’이라는 담배가 그곳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신탄진과 대청댐, 그리고 대전시내가 한눈에 조망되는 산이 계족산이고, 그곳에 계족산성이 있습니다. 그 산성을 12월 둘째 주에 갑니다.
산길에 황토흙을 깔아서 맨발로 걷기가 좋은 곳으로 소문이 자자한 계족산성에 올라 내려다보는 대청댐과 대전 시내는 그야 말로 경관이 빼어납니다.
그 아래 대전 시내에 위치한 남간정사는 기호학파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 선생의 자취가 있는 곳이고 동춘당은 송시열 선생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송준길 선생의 옛집의 별당입니다.
그곳을 답사하고 옥천에 있는 정지용 생가를 답사하고 하루를 마무리 할 예정입니다.
“금강을 건너 대평리 거쳐 신탄진으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하다. 금강의 지류로서 대전시내를 지나는 갑천을 지나고 신탄진에 이른다. 금강의 나루터였던 이 신탄진이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된 것은 신탄진이라는 담배 이름 때문일 것이다. 신탄진에 있던 연초제조장에서 온 국민이 피우던 신탄진을 만들어대면서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나루터가 아닌 담배로 신탄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조그마한 신탄진 읍이 급속도로 팽창한 대전광역시에 편입되고 경부, 호남선 열차와 고속도로가 교차되는 교통의 요충지로 변모되면서 몰라보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신탄진읍 장동리에서 대덕구 장동으로 변한 장동은 본래 회덕군 일도면의 지역으로 진(긴) 골짜기가 되므로 진골, 전골, 또는 장동이라 불렀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성산리를 병합하여 장동리라고 바꿨다.
계족산성으로 올라가는 자동차 안에서 나는 헨델의 하프협주곡을 듣는다. 그 현란함 뒤에 밀려오는 아련한 슬픔, 그 슬픔을 어찌할 것인가. 가도 가도 또 밀려오는 그 슬픔은 언제쯤이나 내 안에서 융해되고 잠재워질 것인가. 문득 길 위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 떨어지는 나뭇잎 사이로 잊어버린 기억들이 하나 둘씩 그리움처럼 떠오를 즈음 계족산성 입구에 도착한다.
장동 자연휴양림 입구에 차를 세우고 배낭을 준비한다. 앞서온 차들이 주차장을 빼곡이 채우고 벌써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한결 여유가 있다. 아침 산행이 좋은데 오늘은 너무 해찰을 했구나. 장동 휴양림에서 산성으로 오르는 길 옆 나무들에 아직 노랗고 붉은 나뭇잎들이 매달려 있고 길은 평탄하다. 엠티(MT)인지 수능을 끝낸 고등학생들인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건너편 산허리에서 왁자지껄하고, 천천히 노란 낙엽송 나무들이 사열하듯 서있는 길을 걸어간다. 순환도로를 따라가다 계족산성이라고 나무 팻말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오르막 산길이다.
그곳에서 한참 나무숲길을 헤쳐나가자 다시 순환도로가 나타나며 봉황정에 이른다. 계족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그곳에서부터 가파르기 이를 데 없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발에 밟혀 부스러진 채로 자연으로 돌아가고 나는 발걸음을 옮긴다.
가파른 길이라선지 문득 땀이 나고 얼마쯤을 갔을까. 이윽고 계족산성에 오른다. 계족산성(鷄足山城)은 대전시 대덕구 장동리의 계족산(423m)에 있는 백제시대의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약 1,200미터이며 사적 제 35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계족산 위에 있는 테뫼형 산성으로서 현존하는 성벽의 안쪽 높이는 3.4미터, 외벽 높이는 7미터, 상부 너비는 3.7미터이다. 가장 잘 남아있는 북쪽 성벽의 높이는 10.5미터, 서쪽 성벽의 높이는 6.8미터이다. 성의 동·서·남쪽에 너비 4미터의 문지(門址)가 있다. 또 길이 110센티미터, 너비 75센티미터, 높이 63센티미터의 장방형 우물터가 있는데, 그 아래로 약 1미터의 수로가 있다. 상봉에 봉수지(烽燧址)로 추정되는 곳이 있으며, 건물지와 주초석이 남아있다. 금강 하류의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성은 백제가 웅진에 도읍했을 때 청원의 문의와 청주로 통하는 길목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던 성으로 추정된다. 백제시대 토기조각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백제의 옹산성(甕山城)이었을 것으로 여기고 있는 이 성은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군이 이 산성을 근거로 한때 신라군의 진로를 차단시키기도 하였고, 조선 말기에는 동학농민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성벽은 납작한 자연활석을 석재로 사용한 내탁공법(內托工法)으로 축조하였으나, 동쪽 성벽 약 200미터 정도는 안과 밖으로 석재를 쌓아올리는 내외협축공법(內外夾築工法)을 이용하였으나, 현재 남문지 밖에는 지름 12센티미터, 깊이 12센티미터의 구멍이 뚫린 문초석(門礎石)이 있으며, 성내에서 백제시대는 물론 신라·고려·조선시대의 토기와 자기조각이 출토되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된 산성임을 증명해 준다. 특히 가뭄이 심할 때 이 산이 울면 비가 온다하여 비수리 또는 백달산이라고 불리며 조선시대에 봉수대가 있어서 동쪽의 옥천 환산의 봉수를 받아 문의현 소이산 봉수에 응하였다고 한다. 이 산성은 그 아래에 견두성(犬頭城)과 같은 보루가 있는 것이 특징이며, 부근에 질현성(迭峴城)·능성(陵城)·내사지성(內斯只城)·우술성(雨述城)·진현성(眞峴城)·사정성(沙井城) 등이 있다.
계족산성에 서서 아래를 굽어본다. 산아래 대전을 지나 금강에 합류하기 위해 천천히 흘러가는 갑천과 경부고속도로에서 호남고속도로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한 눈에 들러난다. 하지만 그보다도 온 산을 물들이는 노란 낙엽송의 물결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성을 따라 거닐며 바라본 계족산성은 대전시 문화유산 해설사인 민종순씨의 말대로 옛 산성의 모습보다는 21세기형 산성으로 쌓여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어쩔 수 없지. 산성을 쌓던 기술자도 사라지고 그 대체인력으로 불도저들이 나섰으니.“
<신정일의 한국의 산성 기행> 중 <계족산성 기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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