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6

술 마신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름답다.’?

산중산담 2019. 6. 26. 15:02



역사에서 배우는 세상의 지혜

역사에서 배우는 세상의 지혜

 

사람이 언제나 심각하기만 하고 재미와 휴식을 전혀 취하지 않는다면,

자기도 모르게 미치거나 불안해질 것이다.“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글이다.

현대인들이 매일 매 순간 느끼고 있는 문제를 2,500년 전 그 당시에도 느꼈다는 것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기원 전 5세기에 페르시아에서 살았던 헤로도토스가 지은 <역사>에는 그가 살았던 당시의 역사와 풍속, 그리고 그 지역에 얽힌 이야기들이 총 망라되어 있다.

2,5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그 당시의 생활상과 엄연히 괴리되어 있는 것도 많지만, 오늘날의 상황과 비교하게 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신은 인간의 오만에 대해서 보복할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쓰게 된 원인을 말하는 것으로

페르시아가 패망하게 된 원인을 크세록스의 오만 때문이라고 보았다.

 

<오만과 편견>을 지은 제인 오스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오만은

어느 시대에 그 누구라도 경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용어중의 하나다.

<역사>에는 그 당시의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가 다음의 이야기이다.

바빌론의 여자는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아프로디테의 신전에 앉아서 낯선 남자에게 몸을 바쳐야만 한다. 그런데 돈이 많은 여자들은 자존심이 강해 다른 여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꺼려서, 많은 시종을 거느리고 덮개가 있는 마차를 타고 들어가 그 상대를 기다린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들은 아프로디테의 신역神域 안에, 엮어서 만든 끈(신과의 연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일이 끝나면 끈을 풀었다)을 머리를 두르고 앉는다. 새로 도착한 여자도 있고 떠나는 여자도 있어 그 수가 대단히 많다. 여자들 사이로 모든 방향으로 통하는 통로가 줄로 구분되어 있고, 남자들은 이 통로를 지나면서 여자를 물색한다.

여자는 일단 여기에 나온 이상은, 누군가 은화銀貨를 여자의 무릎에 던져서 사원 밖으로 나와 그 남자와 몸을 섞지 않는 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은화를 던진 남자는 밀릿타 여신의 이름으로 라고 말해야 한다. 아시리아인은 아프로디테를 밀릿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돈의 액수는 얼마라도 괜찮다. 적은 돈이라도 한 번 던지면 신성한 것이 되기 때문에 거절하거나 돌려주어서는 절대 안 되는 법이다. 여자는 은화를 던진 최초의 남자를 따라가야 하고, 결코 거절해서는 안 된다. 남자와 몸을 섞은 여자는 여신에 대한 봉사를 다한 것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 후로는 아무리 돈을 많이 주어도 그 여자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용모가 뛰어난 여자는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용모가 시원치 않은 여자는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계속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3.4 년씩 앉아 기다리는 여자도 있다. 키프로스의 몇몇 역에도 이와 비슷한 풍습이 남아 있다.“

<역사> 2권에 실린 글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데,

왜 우리나라에는 헤로도토스와 같은 역사가가 없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입니다.

그때 그러니까 기원 전 5세기 사람이 지은 <역사> 속의 지명들이나 역사가

지금의 이 시대에도 그대로 남아 있고 이어지는데, 우리나라의 역사 고조선이나 고구려, 심지어 후백제의 역사까지도 왜 안개 속처럼 아스라하기만 한 것인지,

그렇게 된 원인을 정약용 선생의 책에서 엿볼 수 있다.

 

고구려가 단절한 후에 발해가 그 뒤를 이어 구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하였었는데, 그것이 다시 거란에게 공멸되고, 그 영토의 절반 이상이 거란으로 들어가서 고려 태조가 그것을 완전히 통일하지 못하였으니, 우리 국토의 발전에 진실로 한이 많다.” 다산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우리나라 편찬 지리서들로 말한다면,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는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상未詳이라고 덮어 놓은 것이 많고, 정인지의 <고려사지리지>는 착오된 것이 허다하며, <동국여지승람.>은 연혁의 사실들을 정확하게 실지 못한 것이 많으며, <문헌비고 여지고>에는 누락된 명론들이 적지 않다. 대개 국가에서 무슨 편찬 사업이 있을 때마다 당쟁의 이해에 끌려 기사의 취사선택을 그르치는 일이 허다하다. 이것은 지리서 하나에도 오직 사람들의 신뢰를 받을 만한 결정판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로 되어 있다.

무릇 얻기 어려운 것은 때요, 잃기 쉬운 것은 기회인데, 지금 다행히 성세를 만났으니, 과거의 우수한 성과들을 참작하고 현재의 여러 사람들의 지혜를 모아 일대의 권위 있는 지리서를 편찬하는 것이 어떠한가?“

<여유당전서> 1집 제 8()에 실린 글이다.

 

다산 선생이 살았던 시대로부터도 200년이 지났는데도,

누구에게나 갈채를 받을 역사서는 쓰여 지지 않고

여러 갈래로 나뉜 마음들이 서로 자기만 옳다고 허공에 떠들어대고 있다.

안시성이 어디인지, ‘국내성, 또한 전주에 자리 잡았던 후백제의 도성은

어디쯤인지,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보내는 세월,

이래도 좋은 것이 역사인지, 우리는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지




어렵고 어려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렵고 어려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여기 저기, 이 곳 저곳 말 때문에 말이 많고,

삶이 어렵다고 말한다.

내가 옳으면 남도 옳고 내가 그르면 남도 그른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곳은 옳고 어느 한 곳은 그르기 때문이지만,

그것 역시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세상살이를 두고 부처님은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사람에게는 스무 가지 어려움이 있다. 가난하고 궁해서는 보시하기 어렵고,

건장하고 귀해서는 도를 배우기 어려우며,

목숨을 버려 죽기를 기약하기는 어렵다.

부처님의 경전을 얻어 보기 어렵고, 살아서 부처님의 세상을 만나기 어렵다.

과 욕심을 참기 어렵고, 좋은 것을 보고 구하지 않기 어려우며,

욕을 당하고 성내지 않기 어렵다. 권세를 가지고 뽐내지 않기 어렵고,

일에 부딪혀 무심하기 어렵다. 널리 배워 두루 연구하기 어렵고,

아만我慢을 버리기 어려우며, 무식한 사람을 가벼이 여기지 않기 어렵다.

마음을 평등하게 쓰기 어렵고, 남의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기 어렵다.

선지식善知識을 만나기 어렵고, 자성自性을 보아 도를 배우기 어려우며,

사람을 따라 그대로 되어 구제하기 어렵고,

환경을 보고 움직이지 않기 어려우며, 방편方便을 잘 알기 어렵다.“

<사십이장경>에 실린 부처님의 말씀이다.

 

세상에 모든 것들 중 어렵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는가?

그래서 삶을 고해苦海라고 하였고,

그 고해의 바다를 헤쳐 나가면서 만나는 도타운 인연,

그 도타운 인연 몇 사람 만나고 사는 것을 행운 중의 행운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그 몇 사람과 살아가면서 어떤 것을 지키며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무릇 때에 임하여 어리석은 체()하고, 덤비지()말고,

말조심()하고이 세 글자 뜻대로 용을 삼으라.

만약 경솔하게 남의 말을 듣거나 내가 말을 경솔히 하면,

반드시 나쁜 사람의 속임에 빠지느니라.

이로써 공부하여 나아가면 공은 반드시 닦은 데로 돌아가고,

일은 반드시 바른 데로 돌아갈 것이다.“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 선생의 말이다.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

그 삶을 잘 살고 못사는 것은 운명이기도 하지만,

결국 내가 삶을 잘 살려고 매 순간 노력해야

대과大過 없이 잘 살다가 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날 위한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이 아니면 나는 누구란 말인가?”

<탈무드>에 실린 랍비 힐렐의 말을 바꾸어 말한다면,

 

내가 모든 사물을 위하지 않으면, 사물이 무엇을 위한단 말인가?

그리고 사물이 사물 자신이 아니면, 사물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내가 사물도 되고,

사물이 나도, 그대도 되는 세상, 그렇게 마음과 마음으로 통한 세상,

그 세상이 바로 평화로운 세상이 아니겠는가?



현자에게 삶에 대하여 물었다.

현자에게 삶에 대하여 물었다.

 

탈레스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가장 어려운 일인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다.”

용이한 일이 무엇인가?”

남에게 충고하는 일이다.‘

가장 즐거운 일은 무엇인가?‘

목적을 완성하는 일(뜻을 달성하는 일, 성공하는 것)이다.”

 

어렵다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용이한 일은 참으로 조심스러운 일이지요,

그래서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탈레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아는 일이고,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남에게 충고하는 일이다.”

 

또 하나 가장 즐거운 일, 내가 소망한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가 지난하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그러자 메피스토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항상 악을 탐내면서도 오히려 늘 선을 이룩하는 힘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겐 악이 있다면 선이 있습니다.

두 가지가 양립하면서 생애가 이루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한 없이 악하고 한 없이 선합니다.

 

한 없이 강하고 한 없이 약한 인간,

그래서 생의 한 순간 한 순간이 가시밭길이며,

바꾸어 생각하면 꽃길인지도 모릅니다.

거역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삶, 그런데 여기저기서 삶을 부정하고

유린蹂躪하고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하고 있습니다.

그 삶을 산다는 것을 도대체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한 생각을 ‘탁’ 하고 깨뜨려야 하는데,

한 생각을 하고 깨뜨려야 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일까?

고금古今도 아니고, ‘황금黃金;도 아닌,

지금只今바로 이때이고,‘ 이때이외엔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지금이 아닌 먼 미래, 그리고 지나간 과거에 얽매어

지금을 잘 살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할 때가 많다.

그래서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가장 잃기 쉬운 것도 바로 지금이다.

그렇다고 전제할 때 바로 지금 이 순간,’ 순간순간이 생과 사

갈림길이고, 순간 속에 생과 사가 갈리고 있으며,

그 순간을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운명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만일 생사를 막아내려고 한다면, 한 생각을 깨뜨려야

비로소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서산대사 휴정의 <선가귀감>에 이렇게 말한 뒤 다시 말을 잇는다.

 

!’ 하는 것은 어두컴컴한 칠통을 깨뜨리는 소리다.

무지의 칠통을 깨뜨려야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한 생각, ‘하고 깨달은 후에도

반드시 지혜의 스승을 찾아가 과연 옳게 깨달았는가?

아닌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서산대사 휴정이 이렇게 일갈했지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생각한 생각이 과연 깨달음에 이르는 생각이었는가를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는 큰 바다와 같고, 여러 갈래의 길과 같다.

그러므로 들어갈수록 깊어지고,

나아갈수록 길이 많아져 어디로 갈지 갈피를 못 잡고

허둥거리다가 마는 것이 인생이다.

 

서산대사 휴정은 다시 말한다.

원컨대 학생들은 자기 마음을 깊이 믿어, 스스로 굽히지도 말고,

높이지도 말아야 한다,”

 

누구나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살 것이다.

그 초심을 잃지 말고, 바람직한 세상을 향한 마음의 끈을 놓지 말고,

순간순간을 잘 살아야 하는데,

어떤 위치나 상황에 다다르면 마음이 먼저 그 마음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초심을 잃고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서 수습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르는 것이다.

휴정은 다시 말한다.

 

말 말아라. 말 말아라.

붓 끝에 올라갈까 두렵다.“

 

세상의 덧없는 이름을 탐하는 것은 쓸데없이 몸만 괴롭히는 것이요,

세상 이익에 따라 허덕이는 것은 업의 불길에 장작을 더하는 것이다.”

<선가귀감>에 실린 글이다.

 

잠시 살다가 금세 간다.

그것만이 중요하다.

그렇게 살아 있는 어느 순간,

미몽迷夢에 사로잡힌 마음을

하고 깨뜨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



가고 싶은 자 가게하고, 오고 싶은 자 오게 하라.‘

가고 싶은 자 가게하고, 오고 싶은 자 오게 하라.‘

 

맹자가 등나라에 가서 상궁上宮에 머물고 있었다.

상궁에 있던 한 사람이 만들고 있던 신발 한 켤레를

창가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없어졌다.

아무리 찾아 봤으나 눈에 띄지 않았다.

당신을 따라 다니는 사람이 감춘 것이 틀림없다

라고 그 상궁에 있던 그 사람이 맹자에게 말하자 맹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를 따라 다니는 모든 사람들의 도적질이나 하는 줄 아십니까?

혹시 그럴지도 모릅니다. 나는 제자를 받아들일 때

가는 자를 쫓지 않고, 오는 자를 막지 않는다.’‘는 주의였으니까요,

누구나 배울 의사만 있다면 제자로 받습니다.”

맹자에 실린 글이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우주라고 여길 때

한 우주가 가고 오는 것을 한 우주가 어떻게 막고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는가.

저마다 다른 우주, 그 우주의 이치에 따라 바라 볼 수 있을 뿐이다.

 

세상을 하찮게 여기면 정신이 자유롭고,

만물을 하찮게 여기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삶과 죽음을 같은 것으로 보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회남자에 실린 글이다.

생과 사를 하나로 보고 자유롭게 세상을 살다가 가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 매 순간 변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인간 의지의 자유에 대해

점심식사 전에는 비관주의 적 결정론자가 되고,

점심식사 후에는 낙관주의 적 신봉자가 될 수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말과 같이 매 순간 변하는 사람의 마음,

하지만 살면서 견지해야 할 마음의 자세,

가고 싶은 자 가게하고, 오고 싶은 자 오게 하라.‘

그것이다.




서울 서촌에서 이상을 만나다.

서울 서촌에서 이상을 만나다.

 

서울 도성과 서촌 일대를 걸었다.

천천히 걸으며 보았던 풍경들, 겨울 성곽은 쓸쓸하면서도 애잔하다.

평택의 한 장정이 성을 쌓다가 새겨놓은 글씨도 보이고,

부여에 편입된 홍산에서 온 장정이 새겨 놓은 홍산이라는 글씨도 보이는

낙산에서 혜화문에 이르는 성곽을 걷고 도착한 서촌에

날개의 작가 이상이 살았던 이상의 집이 새롭게 수리되어 내 눈에 파고 들엇다.

박재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그래, 쓸쓸한 천재의 표상인 이상은 잘 있는가?“

하고 들어선 집, 창문 너머에 이상의 부조물이 있고,

또 하나의 문을 열자 캄캄한 공간 속에 희미한 한 줄기 빛이 보였다.

<날개>에서 금홍이가 일을 나가고 그를 기다리는 긴긴 하루,

캄캄한 방에는 손수건만한 해가 잠시 들어왔다가 나가는,’

내 유년시절의 그 집 같은 방이 내 앞에 펼쳐지고,

그 암울했던 시절들이 두루마리가 펼쳐지듯 아득하게 되살아났다.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추하지는 않지만,

마음 깊은 속에 깊이깊이 침잠해 있던 시절들이

어느 한 순간, 이렇게 되살아나는 것은 또 무슨 연유인가?

 

중요한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을 어딘가에 남기는 일이다.

관습이 그렇고. 집안의 잔치가 그렇고 추억이 깃든 집이 그렇다.

중요한 것은 되돌아오기 위해 사는 것이다.”

생텍쥐페리가 <인간의 대지>에서 토로한 것이 맞는 지도 모르겠다.

 

가고, 오고, 다시 가는 그 반복의 흐름 속에서

나는 다람쥐가 체 바퀴를 굴리는 것처럼 살다가

다시 옛 추억 속으로 들어가 그 세월들을 되새김질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방에서 나와 살펴보니

이상의 자화상이 보였다.

한 시대를 격정적으로 살고, 역사가 된 시인, 이상, 아니 김해경,

그가 나를 바라보고, 나도 그를 바라본다.

그 차이, 30cm쯤의 거리,

그는 내가 바라보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까? 모를까?

누군가 문을 열었고, 겨울이 내 곁으로 휙 하고 다가오고 지나갔다.

 

 

인간이 재능과 미덕으로 이룩한 모든 일은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1560년 경 알베르티라는 사람이 <자화상>을 두고 한 말은 맞는 말인가?




역사는 희미한 별빛이나 달빛으로 풍경을 보여준다.

역사는 희미한 별빛이나 달빛으로 풍경을 보여준다.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가지 못하는 곳이 있다.

전주 국립 박물관이 그런 곳이다.

시간이 조금 나서 둘러보는데, 이런 저런 유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려청자도 그렇고, 채용신 선생이 그린 매천 황현의 초상화가 사진과 함께

나란히 있어서 나는 그 앞에서 한 참을 머물렀다.

사람은 나면 가는데, 잠깐 사이에 무엇인가를 남겨두고 가는 사람도 없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홀연히 사라져 가기도 한다.

그 남은 자취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로 남아 있는 곳이 박물관인데

프랑스의 작가인 앙드레 말로는 <왕도의 길>에서 클로드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그 박물관을 묘사하고 있다.

저는 박물관이란 과거의 예술품들이 제 각기 하나의 신화가 되어

후세의 예술가가 나타나서 자기네들을

이 세상으로 다시 불러 내 주기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역사적 삶을 산다고 해도 되지요)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일 그 작품들이 직접 내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면,

그것은 그 작품을 창조한 예술가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누군가의 가슴 속을 흔들어 놓는다.”

그것이 유물이건, 사람의 마음이건, 사물이건,

그것이 중요하다.

일생을 통해 그런 시간을 많이 만나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닐까?

그런 시간을 통해 인간은 한 단계, 한 단계 상승해 가는 것이고,

그런 상승을 통해 자기를 구원하고 인류를 구원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 중에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다.

그는 이 세상에 사랑을 전하려고 왔고,

사랑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왔지만,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 세상을 떠났다.

 

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슬프고도 슬픈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이 세상을 하직하고,

다시 부활하였다는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난 지 2 천 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도 이 땅은 반목과 그에 따른 전쟁과

불평등이 심화되어 곧 터질 것 같은 세상이다.

어둠이 깊어야 새벽이 온다는 말은 진실인가?

하지만 그 말의 진위를 알 수도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땅에 평화와 사랑을 주기 위해 왔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

그것만을 알 뿐이다. 예수도, 부처도, 아니 공자나 마호메트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이미 이 세상에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은 이 땅을 살다간 현자들에게

유형무형의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모든 사람의 일생은 자기에 이르는 길이다.....

자기실현을 이룩한 인간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누구나 다 최선을 다하여 그것을 구한다.

어떤 사람은 부지런히, 어떤 사람은 게으르게,

모든 인간은 탄생의 유물인 진흙과 알의 껍질을

끝까지 몸에 지녀 나른다.“

헤세의 <데미안>의 한 소절이다.

 

나를 찾아가는 여행, 사람의 일생이 그렇다.

길의 끝에는 자유가 있다. 그때 까지는 참으라.“

부처가 말했던 사람이 걸어가는 그 역사의 길을 두고

R. 초트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희미한 별빛이나 달빛으로 풍경을 보여준다.” ,

내가, 그리고, 그대가 이 세상을 살면서 보고 있는 풍경은

어떤 풍경인가?




술 마신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름답다.’?

술 마신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름답다.’?  

 

술자리에서 한 잔이나 두어 잔 마시고 취하는 나에게

지인들이 물을 때가 있다.

지금쯤은 술이 늘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술에 대한 경계심이 많아서 그런지 술이 절대 늘지 않는다.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는

한 두 잔이면 포만상태가 되어 더 이상 들어가지를 않는다.

어찌 보면 적게 마시고 많이 취하니 아주 경제적인 주법酒法일 수도 있지만,

진짜 주당들에게는 못마땅한 주법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옛 사람들의 주법은 어떠했을까?

 

대개 술이 거나해지고 나면 계속 마시고 싶은 마음이 매우 간절해져서 자제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꼭 곤드레만드레 취하게 되는 것이다. 대개 술이 얼근해지면, 기분은 화창해지는 반면에, 마음은 혼미해지게 마련이다.

술맛을 좋아하던 차에 기분이 화창해지면 좋아하는 게 심도深度가 더욱 깊어지기 때문에, 더욱 간절하게 마시고 싶어지게 되고, 이에 따라 마음이 더욱 혼미해지기 때문에, 평소에 경계하고 근신하던 뜻을 완전히 잊게 되는 것이다.

무릇 술에 대한 욕구가 절실해질수록, 경계하고 근신하는 뜻을 잊게 되므로, 엉망으로 취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스리는 방도로는, 거나해지지 않는다면, 이런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다.

다만 한 잔이나 두 잔만 들고, 그 뒤로는 더 이상 입에 넣지 않고서 술잔을 손에 쥐고 있기만 한다면, 자연히 거나해지지 않게 될 것이다.“

포저 조익趙翼<술에 곤욕을 치르지 않으려고 지은 글(不爲酒因說>이다.

 

술의 끝이 어디인지를 알기라도 할 듯,

세상의 술을 다 마셔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이 술을 마셨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어린 시절을 회고해보면 나의 아버님도 그 중에 한 분이셨다.

술 때문에 빚어진 여러 추억들이 결국 내 몸에 많은 술이 아니고

소량에 술만 받아들이게 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술을 아주 맛깔스럽게, 그리고 은근하게 마셨던 사람들과

그 술을 마시는 분위기를 사랑했던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마음 맞는 친구하고, 막걸리든 소주든 맥주든 술을 앞에 놓고 마주앉으면,

내 속에서 잠자고 있던, 그리고 사실은 나 자신도 내 속에서

잠자고 있는 줄 몰랐던 말들이 줄줄, 아니 술술 나올 준비를 한다.,(...)

복 지느러미를 넣은 정종에 불을 붙여본 이후에 나는

불꽃이 조그마한 소리를 내며 알코올 표면으로 내려가는 것,’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 불타는 술이 위 속으로 들어가면

말의 성감대를 움직여 사람의 입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술 마신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래서 아름답다.

그것은 조그마한 소리를 내는 불꽃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혀를 불태운다.

술 마시며 하는 이야기는 불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 중에서도 사랑의 이야기가 가장 아름답다.

사랑이야말로 불 중의 불이기 때문이다.”

작고한 문학평론가인 김현 선생의 <불꽃의 말>이라는 글이다.

 

적당히 맛있는 술을 마시며 나누는 이야기,

그 이야기가 얼마나 소담스럽고 아름다운지를 아는 사람은

아름답다.

한 잎 한 잎, 눈이 내리는 날, 가슴 안에 빨갛게 숯불이 타는

화로를 앞에 두고,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그런 밤이 무르익는 풍경,

문득 이 새벽에 내 마음을 스쳐가는 데,.....





자기 재능을 세상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자기 재능을 세상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다지 내 놓을 것이 없다.

누구나 잘 걷는 것을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걷는 것뿐,

달리 잘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가끔씩 내가 뭐라도 아는 것처럼 타인 앞에 나섰던 것은 아닐까?

그랬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면 부끄러워 한 밤 내내 잠을 설치는 때가 더러 있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할 일이다.

 

자기 재능을 세상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남의 재능을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칭찬과 격려를 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시기와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특히 똑 같은 일로,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증오나 원한을 사게 된다.

자신의 뛰어난 재능이란 과시하는 순간 공격의 표적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이미 말했지만 인간의 가장 큰 본능은 쾌락과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일이다.

이 쾌락과 허영심은 남과 자기를 비교한 우월감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함께 어울려 있는 가운데 어느 누가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모욕삼이나 피해를 주는 일이다.

이 미움과 분노는 어떤 식으로든 보복하려는 의지로 나타난다.

따라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재능을 감추는 위장 가면을 쓰는 일이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자신이 남들과 똑 같이 평범하다는 것을,

애써 보여야 한다.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 미움을 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돈이 많은 사람은,

남들의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합당한 존경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아마 그런 사람들은 성인군자들의 사회에 살아야 제대로 존경을 받을 것이다.

사람은 따뜻한 체온을 원한다.

그래서 햇빛이나 난로 곁에 가까이 가려고 한다.

이런 현상은 본능적인 충동과 같아서 사람들은,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과 만나려는 본능이 있다.

그런 사람이란 누구인가?

남자는 지능이 좀 모자란 사람이고, 여자는 미모가 좀 떨어지는 사람이다.

뛰어난 미모를 가진 사람은 친구가 없다.

누가 뛰어난 미모를 가진 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가려고 하겠는가?

하지만 못 생긴 여자들 곁에는 미인 친구들이 많다.

특히 못 생긴 여자가 지위나 신분이 높은 경우에는

더욱 크게 환영을 받는다.

남자 역시 머리가 뛰어난 천재에게는 친구가 모여들지 않는다.

이렇게 남자들은 좀 바보처럼 보여야 하고,

여자도 외모가 떨어져야 다른 사람들이 친밀감을 느낀다.“

쇼펜하우어의 <재능 있는 사람이 할 일은

평범하게 보이는 일이다.>라는 글이다.

 

이 말도 쇼펜하우어가 오늘의 시대에 살면서 했다면

여기저기서 책을 잡히기 가장 좋은 말이지만,

구절구절이 옳은 말이다.

 

젊은이의 마음에는 앎과 원칙과 진실함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헛된 생각들이 침범한다네......

것들이 억지로 마음이 주인이 되어 부끄러움을 어리석음으로......

겸손을 비겁이라 부른다네.....

그들은 또한 온갖 쓸데없는 욕망을 동원하여

규모와 절제를 촌스러운 절약이라 여기면서 추방한다네....

그들은 오만무례함을 잘남으로, 무정부 상태를 자유로,

낭비를 관대함으로, 파렴치를 용기라고 부른다네.”

플라톤이 <국가>에서 한 말도 마찬가지로 맞지만

오늘의 시대에는 논란이 될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주저주저하게 만드는 이 시대도

정상적인 시대는 아니지만 거듭거듭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살아갈 일이다.

 

뽐내는 것은 겸손하고, 평범함으로 치료하고,

재주가 넘쳐흐르는 폐단은 깊이 있고 침착함으로,

실속 없이 과장하는 병은 충실함으로 치료한다.”

<취고당검소>에 실린 이 말처럼

사는 것이 삶을 잘 사는 법이다.



나는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았고, 그리고 지금도 모른다.

나는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았고, 그리고 지금도 모른다.

 

나는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았다.

세상은 너무 내게 가혹하다는 것을

그러나 달리 말하면 나는 너무 세상을 모르고 살았다.

지금도 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을 보면,

그 길의 끝자락, 마지막 지점에서 내가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내 짐작만으로는 텅 빈 허허벌판,

그것뿐이지 않을까?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무이한 재능과

타고난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에머슨은 말했고,

 

자기 존중, 자기 지식, 자제심,

이 세 가지만이 삶을 최고의 경지로 이끈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은 이렇게 말했다.

 

나 역시 그와 같은 긍정적이면서도 완벽한 삶을 살고자 했지만,

지금의 내가 나를 모르듯이 내 삶을 잘 모르겠다는 것,

그것만이 진실이다.

청소년 시절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을 무던히 떠돌다가 보니,

이 시간에 이르렀고,

내 삶이 얼마만큼 이어질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그래서 미완성, 하나 여기 서 있노라.’

말하는 나여,

 

그렇다면 내 나이 열일곱부터 내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니체는

행복한 삶을 어떻게 정의했던가?

 

덧없고 개별적인 존재를 넘어선 시야를 가지게 되면,

자신이 자신의 집, 자신의 종족, 자신이 도시의 정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말한 니체는 여행 중에 오래된 건물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신이 완전히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과거로부터의 상속인이자 꽃이자 열매로서 성장해왔으며,

따라서 자신의 존재는 용서받을 수 있고,

또 정당화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온전해야 세상이 온전하다.’

 

세상을 오래 살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깨닫고, 현자가 되기도 하고, 다시 미혹迷惑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자신의 존재를 정직하게 즐길 줄 아는 것은

절대적 말하자면 신적인 완성이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하는데,

나는 내 삶을 정직하게 즐기며 살아왔던가?

순간순간을 너무 허비하지는 않았던가?

 

물음표(?) 만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한 밤중,





작고도 큰 우주인 내 방에서,

작고도 큰 우주인 내 방에서,

 

늦은 밤에 돌아와

작고도 큰 우주와 마주한다.

책장 위에 펼쳐진 몇 권의 책,

여기 저기 쌓인 책,

무수히 널려 있는 볼펜 들,

쓰다가 미룬 메모지,

내 삶의 일부, 아니 전체가

이렇게 방 안에 널려 있구나.

주워 담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딘가 구석진 곳에

밀쳐둘 수도 없는 나의 삶,

 

지지부진하고, 떠밀려가는 삶은

정처가 없고,

그 정처가 없음에서 정처가 있음까지의

시간과 공간이

이 우주에서 숨을 쉰다.

가쁘게 혹은, 가냘프게,

내 쉬는 내 생애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초침 속에서 자꾸 분해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내 안에 숨어 있다가 나온 분신,

몇 편이 보인다.

 

인생을

하루가 끝나는 저녁 무렵

산책을 하듯이 산다면 어떨까?

문득 숲속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

산 위에 구름은 노을빛에 물들고

어디선가 새 한 마리

푸드득 날아가는데,

 

천천히 걷는 발걸음 소리에

놀라

발걸음을 멈추는 시간,

 

내가 나인지, 내가 자연인지,

구분이 안가는 그런 시간 속으로

서서히 스며드는 시간,

 

그런 시간 속에,

어둠이 서서히 내리는 길 위에서

꿈에서 깨듯 나를 돌아보는

그런 산책을 하듯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좋을까?

<저녁 무렵 숲속을 산책을 하듯>

 

스스로 자,

그러할 연,

자연!

이보다 아름다운 말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내가

자연自然!’

이라고 부르는

그 이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가끔씩, 내가 무엇을 썼는지도 모르는

글들이 나와서 내 마음을

어지럽힌다.

늦은 밤 탓인가,

세월 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