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6

저마다의 다른 꿈이 있고, 가야할 다른 길이 있다.

산중산담 2019. 6. 26. 15:09



저마다의 다른 꿈이 있고, 가야할 다른 길이 있다.

저마다의 다른 꿈이 있고, 가야할 다른 길이 있다.

 

201812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을 생각합니다.

가당찮게도 너무 이른 나이에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살았던, ‘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스스로가 설정한 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글을 쓰겠다는 꿈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의사나 판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대통령, 어떤 사람은 바다를 누비는 선장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또 어떤 사람은 사람들의 머리를 다듬어 주는 미용사,

농사를 짓는 농사꾼, 꽃을 파는 꽃집 주인,

음식을 만드는 조리사, 등 저마다 간직한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나름대로의 꿈이 실현된 뒤, 그가 꿈꾸었던 꿈이 이루어진 뒤에 만족할까요?

만족한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자기가 꿈을 잘 못 설정했다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하고많은 사람들이 다 그처럼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중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세상을 위해

더 큰 업적을 남기고 가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세상에 대한 관심은 없고, 오로지 그 자신과 집안만

잘 건사하면서 살아간다. 그 두 부류의 사람들 중 어느 쪽이 잘 살았다고

규정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 중에

천하의 폭군이라고 알려진 진시황은 어떤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겐

천하에 둘도 없는 폭군이었지만,

역설적이지만 세상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기고 간 사람입니다.

서체書體와 궤(마차 사이의 거리)와 도량형의 통일을 시도한 후

다음과 같이 자신의 공덕을 바위에 새기도록 하였습니다.

 

나는 만물에 질서를 부여했으며, 분별없는 행동을 금지시켰다.

이제 모든 사물은 실질과 부합하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얼마나 자신만만한 말인가요? 하지만 그의 말은 대체로 맞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만리장성을 만들었고,

세상에서 죽지 않고 오래 살기 위해 불로초를 구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진시황이지만 그 나름대로 세상을 바꿨고,

그렇게 나름대로 세상의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들을 혹사시켰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현재는 중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문화유산을 남겨서

여러 형태로 유형무형의 이익을 주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역사 인물입니다.

 

선한 자는 흥하고 악한 자는 망하는 것이 세상의 진리이자 이치,’라는데,

역사는 항상 악한 자를 잘 살게 하고, 선한 자는 고통 속에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되뇌는 물음표? “역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도 몇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을 선하게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기원 전 4세기 말엽을 살았던 윤문자尹文子라는 사람의

기본신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세속에 얽매이지 않을 것,

물질로 자신을 꾸미지 않을 것,

다른 사람을 각박하게 대하지 않을 것,

대중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

 

참으로 간단한 신조지요.

그래서 지키기가 어렵지 않을 것 같지만,

네 가지를 지키는 것이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닌 그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세상의 이치에 순응하지 않거나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왕 따를 당하기 십상이고,

별의별 소리를 다 들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정답이 없는 것이 이 세상의 이치라는 걸 알고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데,

여기서도, 저기서도 그 답을 요구하기 때문에 삶이 괴롭습니다.

내가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버리고, 내가 이 세상에 주인이라는 생각이나,

그 무엇이라는 생각도 버리고, 하지만 불가능한 꿈하나는 가슴속에 지닌 채,

마음이 내키는 대로 걷고, 쉬고, 세상의 모든 사물을 관망하면서

나그네처럼 살다가는 것이 그나마 행복하지 않을까요?

 

기해년에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도반 여러분의 삶이,

좀 더 나아지기를, 그리고 의미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신정일 드림,




매화꽃이 피고, 또 눈 내리던 1월 초하루

매화꽃이 피고, 또 눈 내리던 1월 초하루

 

기해년 새해 첫날, 눈이 부시게 붉은 해를 보고

삼천포 대교를 걷고, 다시 지족해협의 죽방렴을 바라보며

다리를 건너 꽃내를 지나 독일인 마을에 이르렀다.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11일 새해 새 아침에 피어난 매화,

한 가지 꺾어 냄새를 맡자 그윽한 매화 향기가

가슴 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고, 그래!

이 겨울에 매화가 피다니, 이것은 분명 길조일 것이다.

그렇다면 매화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대저 매화는 꽃나무의 일종이다. 대체로 꽃나무는

봄철과 여름철에 무성했다가 추위가 닥치면 시드는데,

이는 자연의 이치상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지의 사이에 모든 만물은 철에 따라 피었다가 지고

무성했다가 시드는데, 유독 매화만 봄추위를 이겨내며

만물이 싹트기 전에 찬란하게 하얀 꽃망울을 터트리니,

이는 만물보다 먼저 천지의 생동生動하는 일양一陽의 기를

얻은 것으로서, 정말 뭇 나무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시인이나 고사高士들 중에

매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조선 초기의 정치가이자 문장가인 변계량의

<매헌기梅軒記>라는 글이다.

유독 봄 추위를 이겨내며 핀 매화를 보며

다시 떠올리던 매화에 대한 시 한 편이 있다.

 

눈 온 뜰에 몰래 든 봄, 잇달아 피는 매화,

말없이 웃고 서 있는 하얀 그 잇바디여,!

달 지고 별 비낀 이 밤 날 시름케 하누나.“

역시 조선 초기의 문장가인 강희안의 글이다.

 

예나 지금이나 매화는 한 겨울 눈 속에 피는 것이 제격이었던 모양이다.

그 향기로운 매화 향에 취해 천천히 걸어 내려간 물건리 어부 방조림은

잎이 저버린 활엽수들이 겨울을 겨울답게 보여주었고

미조항은 다른 곳과 달리 조용하기만 했다.

점심 식사 후 이어진 여정,

그 푸르고 하얀 모래사장이 일품인 상주 해수욕장은

태초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동해에 용화해수욕장이 있다면 남해에는 상주 해수욕장이 있어서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데,

옷깃을 여미고 찾아간 관음포와 충렬사에는

이순신 장군의 역사가 겨울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봄인 듯, 겨울인 듯싶던 남해를 떠나서

전주로 오던 길, 길과 산천에 내리던 눈발,

그 눈발을 바라보며 단원 김홍도가

어느 날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을 떠올렸다.

섣달 눈이 처음 내리니 사랑스러워 손에 쥐고 싶습니다.

밝은 창가 고요한 책상에 앉아 향을 피우고 책을 보십니까?

딸 아이 노는 양을 보십니까? 창가의 소나무에 채 녹지 않은 눈이

가지에 쌓였는데, 그대를 생각하다가 그저 좋아서 웃습니다.”

 

눈이 내리는데, 흩뿌리듯 내리는데,

그 눈발을 바라보며 세상의 끝까지 한 번 가보았으면 하는 마음,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마음인지,






평생에 즐거운 것은 무엇일까?

평생에 즐거운 것은 무엇일까?

 

달이 있으면 그만 술이 없고

술이 있으면 그만 달이 없네.“

매월당 김시습의 시를 접한 서거정은

나는 술독에 술도 있고,

나의 연못엔 잠긴 달도 있네.“

라고 노래했다. 그가 남긴 <태평한화>에 재미있는

이야기 한 편이 실려 있다.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더불어 서로 평생의 즐거운 것을 논하는데,

정도전이 말했다.

 

북방에 눈이 막 휘날릴 때, 가죽옷을 입고 준마에 올라타서,

누런 사냥개를 끌고 푸른 사냥매를 팔뚝에 얹은 채 들판을 달리면서,

사냥을 하는 것이 가장 즐거울 것이오.”

그 말을 받아 도은 이숭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산 속 조용한 방 안 밝은 창가에서 정갈한 탁자에 향을 피우고

스님과 차를 끓이면서 함께 시를 짓는 것이 제일 즐거운 일이지요.”

그러자 양촌 권근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흰 눈이 뜰에 가득하고 붉은 해가 창을 비치면,

따뜻한 온돌방에 병풍을 둘러치고, 화로를 안고,

한권의 책을 손에 들고, 그 가운데 쭉 뻗고 드러누웠는데,

미인은 수를 놓다가 때때로 바늘을 멈추고,

밤을 구어 먹으면 이것이 족히 즐거움이 아닐까요?”

 

이 말을 들은 정도전과 이숭인이 크게 웃으며

자네의 즐거움이 족히 우리들을 흉기胸鰭 시킬 만 하네.”

하였다.

 

대장부의 기개를 마음껏 펼치고자했던 사람이 정도전이라면,

이숭인은 세상을 멀리하면서 도를 닦는 생을 갈망했고,

권근은 세상의 잔잔한 즐거움을 누리고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지금이 아니고, 그 당시, 조선 전기의 상황이라서

어떤 즐거운 것들을 이야기했을지는 모르지만,

세상의 좋은 책을 다 보고, 세상의 좋은 경치 다 보고,

세상의 좋은 사람 다 만나고, 그렇게 살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 보다 더 즐거운 것이 어디 있을까?

옛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두고 천태만상이라고 하였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행동들을 하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불협화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런 가운데, 서로 화합하기도 하면서

인생이라는 한 편 연극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나도 그대도 연극 속의 엑스트라이기도 하고 주인공이기도 한 것이다.

 

너는 작가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된 인물인 연극배우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가 연극이 짧기를 바란다면 짧을 것이고,

만일 길기를 원한다면 길 것이다. 만일 그가 너에게

거지의 구실을 하기를 원한다면, 이 구실조차도 또한

능숙하게 연기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그가 절름발이를, 공직 관리를,

평범한 사람의 구실을 하기를 원한다고 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에픽테토스<엥케이리디온>에서 한 말이 어찌 그리도 딱 들어맞는 말인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작가(절대자)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르다가 보면 한 평생이 다 할 테지,

하고 돌아다보면 나를 주시하는 눈,

책 속에서 기어 나와 나를 바라보는 총총한 눈,

어서 일하고 일하라고 채근하는 눈,

 

아하! 내게는 그 작가가 책이로구나.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어느 시대나 사람들은 아무 탈 없이 편안한 삶을 살다 가기를

기원 한다 그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 까지도 고난의 세월을 보내기를

원치 않아서 평온하기를, 행복하기를 갈망한다.

 

잘 가시오. 우리들 인간으로서 탈 없이 살아가는 자,

고난을 만나 패하지 않는 자야말로 그 삶을 축복받은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엘렉트라>에서 마지막 부분 코로스에 실린

글처럼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평온한 삶은 권태를 수반하고,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삶이

고달파질 때, 그 고난을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절망하는 경우가 많다.

 

적당한 고난은 인간에게 필수품이다. 그런데, 그 고난까지도

다가오지 않게 하려다가보니, 무리수를 두고, 그래서 불행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여러 고난에 노출되어 전반기 생애를 살았고,

지금 이 시점에야 조금 편안한 삶을 살기 때문에 오히려 고난이 두렵지를 않다.

 

인생에 있어서 모든 고난이 자취를 감추었을 때를 생각해보라!

참으로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지 않은가.....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이다.

앞에는 언덕이 있고 냇물이 있고, 진흙도 있다.

걷기 좋은 평탄한 길만이 아니다.

먼 곳으로 항해하는 배가 풍파를 만나지 않고 조용히만 갈 수는 없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차라리 고난 속에 인생의 기쁨이 있다.

풍파 없는 황해, 얼마나 단조로운가!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뛴다."

니체의 글이다.

 

그렇다고 니체처럼 고난 속에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고난이건 그, 고난을 헤쳐 나갈 마음의 자세를 배웠다고 할까?

 

인생 그 자체는 기둥과 계단이며, 자기 자신을 건축하여 올라가려고 한다.

아득히 먼 곳에 눈을 부릅뜨고 이 세상 것이 아닌 아름다움을 보려고 한다,

때문에 인생은 높이가 필요하다.

높이가 필요하기 때문에 계단이 필요한 것이며,

계단과 그것을 올라가는 상극이 필요한 것이다. 인생은 올라가려고 한다.

올라가면서 자기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니체의 글이다.

 

누가 대신해서 그 고난을 감당해주지도 않고,

순전히 자기 스스로가 헤쳐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특히 젊은 시절의 고난은 그 어떤 약보다 더 값진 보약중의 보약이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 말이 맞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나는 무엇이나 가장 어려운 것을, 그러니까 가장 인간다운,

칭얼거리거나 애원하거나 구걸을 하며 돌아다니지 않는

인간다운 것을 원했다. 내가 원하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과 같이 그렇게, 내가 라는 자존심 하나로

살아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자존의 삶이리라.

언제 어느 때 다시 그 고난의 시절이 와도

의연하게 그 고난의 숲을 헤쳐 나가자,

의연하게, 슬기롭게,





저 모퉁이 돌아가면 어떤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저 모퉁이 돌아가면 어떤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문을 닫아서 걸고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사귈만한 훌륭한 인물이나 호걸이 책속에 있고,

정을 줄만한 인생의 모든 기쁨, 슬픔,

만남, 이별 등이 책속에 있었다.

책속에는 모든 것이 다 있었다.“

 

명나라 말의 사상가인 이탁오의 글이다.

나 역시 그와 비슷하게 살았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그 길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세상의 길로 나갔는데, 그 길이 곧 강이고, 산이고, 옛 길이었다.

그 길을 걷다가 나는 길에서 새로운 길을 만났고,

그 길이 글이 되고 삶이 되었으며,

역사 속에 사람들과 현존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만남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그 길로 나아갔는데,

그 때 나를 다독여주고, 힘이 되고, 주저앉고 싶어도 나아가게 했던 것,

저 모퉁이 돌아가면 어떤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것은 절망이자 희망이고, 설렘이자 체념이었지만 종래는

기다림이었다.

침묵하는 자는 잊혀 진다. 소극적인 자는 말꼬리를 잡힌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자는 뒤처진다.

멈춘 자는 추월당하여 뒤로 밀려 난 뒤 밟혀버린다.

성장을 멈춘 자는 이미 노화하기 시작한다.

중간에 그만두는 자는 단념한다. 정체 상태는 마지막으로 가는 시작이며,

죽음의 전초가 되는 무서운 조짐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이겨 내는 것,

우리의 물질적 정신적 존재의 절멸, 질병과 퇴영退嬰에 대해

자기를 긍정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산다는 것은 쉬지 않고 소망하는 것,

또는 날마다 자신의 의지를 새로이 하는 것이다.”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의 <아미엘의 일기>에 나오는 구절처럼,

무너지려는 나를 내가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내면서

달려 온 길, 그 길들이 저마다 꽃을 피우는 시기가 오는 중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조짐은 좋다.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일, 그 길 앞에서 나는 서성인다.

도대체 삶이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무심無心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무심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스스로 제멋대로 하지도 않고 자기 꾀를 쓰지도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무심無心이다. 그래서 성인은 무심하다.“

이 무심을 두고 정명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지는 언제나 그 마음으로 만물을 고르게 하니 무심하다.

성인은 언제나 그 정으로 만물을 좇으니 무정하다.”.

정이천은 말했다.

 

천지는 무심하지만 조화造化를 이루고 성인은 유심하나 무위無爲이다.”

 

그렇다,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善始善終)’

이 말을 명심하자,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을 명심하고,

처음 마음과 같이 한 발 한 발 걸어가자,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나 자신은 파멸해도 좋으련만

슈타레츠의 말이 아니고,

나도 행복하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그런 일을 하자.

천천히,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가는 행복의 통로를 찾아서,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가는 행복의 통로를 찾아서,

 

매일, 매일, 꿈을 꾼다.

매일 밤 꾸는 그 꿈이 너무 선명할 때도 있지만, 흐릿해서

무슨 꿈인지 종을 잡지 못할 때도 있다.

어떤 때는 그 꿈이 너무 무섭기도 하고 버거워서

제발 꿈이어서 빨리 깨어났으면 하는 꿈이 있고,

어떤 때는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서 꿈을 꾸다가 깨어나서도

아름답게 채색된 그 꿈을

다시 한 번 꾸었으면 하는 그런 꿈이 있다.

그 꿈을 두고 <푸른 꽃>의 저자 노발리스는

세계는 꿈이 되고 꿈은 세계가 된다.” 고 하였는데,

그 꿈을 가슴이 두근거리도록 묘사한 시인이 있다.

당신이 잠을 자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잠을 자면서 꿈을 꾸면 어떻게 될까?

또 꿈속에서 천국에 올라가,

신기하고 아름다운 꽃을 꺾으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잠에서 깨어날 때 손에 그 꽃을 쥐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 그러면 어떻게 될까?”

영국의 낭만주의자 콜리지의 글이다.

 

꿈을 꾸면서도, 그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

인간의 내면에는 다시 여러 형태의 길이 만들어지고,

그 길의 중심에서 이리저리 이어지는 길 앞에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하면서 때문에 겪게 될

마음의 고통 때문에,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 국부터 먹는다.’

우리네 속담처럼

미리 겁을 먹기도 하는 것이 대다수의 인간들이다.

 

외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그 금액을 그들 부부가 좋아하는 50여명에게

나누어 줄 생각이라고, 그들을 호명할 때 그들이 즐거워 할 것을 생각하니

그새부터 즐겁다.’ 는 우화 같은 이야기를 접하면서,

부럽기도 하고, 세상은 살아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끔씩 마음이 허할 때 복권을 사기도 하고,

막연한 행운을 바라기도 하는 것이 역시 대다수의 인간들이다.

 

그런데, 우문愚問이지만,

이 세상에 사는 일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행복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그 행복으로 다 함께 가는

행복의 통로가 있기는 있는 것일까?

나는 가끔씩 그 통로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린다.

노발리스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내면으로 통하는

비밀의 통로가 나 있다.‘고 하였는데,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그 길로 가는 통로도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을까?

 

나는 그 통로를 찾아 오늘도 내일도.

어정거리고 서성거려야겠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것이 삶이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것이 삶이다.

 

흔들리는 심야 버스에서 내려

찬 공기 마시고 돌아와

책상위에 펼쳐 진 수운 최제우선생의 글을 읽습니다.

 

세상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지만

하고자 하는 일은 어긋나기만 좋아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수운의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무엇을 얻겠는가,

도를 묻는 오늘, 주고받음만이 있으리로다.“

 

그러나 길은 여기 저기 있지만

그 길에 이른 길은 보이지 않는 게 세상의 이치라서

매일매일 그 언저리만 맴돌다 돌아오는 나날

 

수운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산을 넘으니 다시 산을 만나고 山外更見水

물을 건너니 또 물을 만나느니 水外又達水

 

길은 끝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길은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있고,

삶의 절망은 또 다른 삶의 희망이기도 할 것입니다.

 

수운이 그러한 시절을 보내고 깨달음을 얻었듯이

우리들의 삶도

매일 모자라고 슬플 때, 아니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

진지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애플 컴퓨터의 최고 경영자인 스티브 잡스가 조용하게 말합니다.

늘 배고프고, 늘 어리석어지라

 

나는 나에게 말합니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와야 할 것은 오고, 가야할 것은 가듯이

이루어 질 것은 이루어지고,‘

이루지 못할 것은 미완으로 남을 것이다.‘ 라고





어째서 나는 공허한 것을 좋아하는가?

어째서 나는 공허한 것을 좋아하는가?

 

우리들의 공허空虛한 마음 황혼 속에 젖어들면

지나간 날에 추구했던 이상마저 덧없어라.

어딜 보아도 보이는 건 죽는 계절에 아픈 상처

쓸어안아도 달랠 길 없는 이 마음을 어이하리.“

그 당시 유행했던 팝송 <고엽>을 내가 개사해서 부른

그때 내 나이 열여덟이었다.

 

그 당시 내 삶, 전체가 공허했고,

그래서 보는 것, 사는 것, 읽는 것 까지도 텅 빈 공허였다.

그때 내 마음은 공허로 가득 차 있었고,

내가 느끼는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과연 내 삶에 희망이 찾아올 것인가?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던 그 시절

내가 너무 어린 나이에 비관적이었던가,

내 안에는 치명적인 권태와 공허가 자리하는데,

어떤 것에 매혹되면 늘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어쩌면 나는 환상을 갖고 있을지도 몰라요,

사물들은 사라지죠.

남는 것은 오직 잿빛의 절망적인 세포뿐이죠.”

프란츠 카프카가 구스타프 야누흐에게 한 말과 같이

체념과 절망만이 나를 지배하던 시절이 어느 순간

지나고 다시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열자>를 읽으며 공허라는 것이

그다지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자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어째서 공허한 것을 귀히 여기십니까?

공허한 것은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열자가 대답했다.

가치는 거기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거요.

그보다 더 고요한 것이 없고,

그보다 더 빈 것이 없소.

고요하고 비어 있게 되면

우리는 제 자리를 얻게 되지만

움직이게 되고 싫게 되면

우리는 제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오.“

열자의 <천서 편>에 실린 글이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길을 읽으려고 한다.”고 말한

세낭쿠르의 말과 같이 길을 잃어야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고,

진실로 공허한 다음에야 그 빈 공간에 새로운 희망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말했다.

자유는 공허한 말이든가 심리적 인과성 그 자체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 모든 것은 자유이니까.

그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말이 있다.

 

인간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공허한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度一切苦厄)“

<금강경>에 실린 글이다.

 

공허란 무엇인가, 텅 빈 것 같지만 가득 찬, 무엇,

그래서 나는 공허를 좋아하고,

그래서 유치찬란하게 가사를 썼던 가끔씩 그 노래를 흥얼거린다.

쓸쓸하게, 혹은 공허하게,






대 자연이 잘 쓰여 진 한권의 책이고, 도서관인데,

대 자연이 잘 쓰여 진 한권의 책이고, 도서관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해서 소소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과 달리 전업 작가나 독립저술가로 글을 쓰는

사람들의 일상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낮에는 잠을 자거나 쉬고, 저녁 내내 글을 쓰거나 책을 읽고,

어떤 사람은 낮에는 글을 쓰고 밤에는 휴식을 취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전업 작가는 출근도 없고, 퇴근도 없다가 보니

생활이 들쭉날쭉하다.

나는 대체로 답사를 가거나 방송을 하거나 강연을 가지 않는 날은

아침 다섯 시 쯤에 일어나 식전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거나 뉴스를 보고, 여덟시 반부터 본격적인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그리고 저녁 아홉시나 열시쯤 눈이 아프면 하루 일과를 정리하고 잠을 청한다.

그리고 열두시나 두시 사이에 깨어나 두어 시간, 다시 글을 쓰고 책을 읽다가

다시 자리에 눕는다.

그런데 꿈을 꾸다가도 글이 떠오르면 일어나 쓰다가 보니

어느 때나 일을 한다고 할까, 글을 쓰면서 논다고 할까,

이렇게 산지가 오래다가 보니, 습관이 되었고, 그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은

답사를 갈 때뿐이다.

집이 일터고 답사는 휴식처라고 할까?

 

<자본론><공산당선언>을 지은 칼 마르크스의 삶도 나와 비슷했다.

언제나 아침 7시에 일어나서 블랙커피를 몇 잔씩 마셨으며, 그 후에 서재에 틀어박혀 오후 2시까지 읽고 쓰곤 하였다. 점심을 서둘러서 먹고 그의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때 까지 또 연구하였다. 저녁 식사 후 그는 햄프스테드 숲 속을 산책하거나 다시 서재로 돌아가곤 하였다. 거기서 그는 새벽 2~3시까지 또 다시 연구에 골몰하는 것이었다. 그의 사위였던 폴,라파크(Paul Lafargue)는 마르크스의 서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서재는 2층에 있었으며,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창문을 통해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벽난로는 창문 맞은편에 있었으며, 책장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책장 위에는 천장까지 닿는 높이로 신문과 원고더미들이 쌓여 있었다. 창문의 한쪽 옆에는 두 개의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잡다한 논문들, 신문, 그리고 책들이 쌓여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조그만 집필용 책상이 있었고, 이에 딸린 통 넓은 의자가 있었다. 이 의자와 책상 사이에는 가죽을 입힌 소파가 있었는데, 장인은 가끔 이곳에 누워 피로를 풀곤 하였다.

방바닥에는 더 많은 책들이 널려져 있었으며, 담배, 성냥갑, 종이 누르는 핀, 그리고 딸이나 아내, 엥겔스, 볼쯔 등을 찍은 사진이 너저분하게 흩여져 있었다. 장인께서는 자신의 책이나 서류에 그 누구도 손대는 것을 금하였고, 오직 장인만이 그 방의 책을 마음대로 볼 수 있었다.

우리와 대화를 할 때면, 장인은 언제나 적당한 문구를 인용하거나 참고 문헌을 읽어주기 위하여 종종 말을 멈추셨다. 장인이 책을 정리할 때에는 책의 외형을 무시하였다. 4절판과 8절판의 책들, 그리고 정치 팜플렛 등이 그 모양이나 크기에는 관계없이 난잡하게 배열되었다.

장인께서는 책의 장점이라든가 활자나 책장의 미적 감각은 거의 무시하였다. 장인은 책의 귀퉁이를 접고, 자유롭게 밑줄을 그었으며, 여백을 이용하여 주석을 달았다. 주석을 달지 않은 책은 거의 없었으나 장인은 매년 당신의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줄친 부분이나 주석을 달아 놓은 부분을 되새겨서 읽었다. 따라서 장인의 기억력은 날카롭고도 힘 있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헤겔이 외국어로 쓰인 시 구절을 암기할 때 사용한 것과 흡사한 방법으로 이 훈련을 계속하였다.“

 

아파트 8층에 있는 나의 집이고, 도서관이고 삶터인 내 서재는 어떤가. 다행히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재떨이나, 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술병이 눈에 띄지 않을 뿐,

내 집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온통 벽이고, 방안이고 빙 둘러 있는 것이 책장이고, 널려 있는 것이 책과 볼펜 들 뿐이다.

언제나 켜 있는 작은 라디오 하나, 그리고 좌우로 배치된 컴퓨터. 단조롭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복잡하기도 한 나의 집이자, 나의 도서관, 그리고 나의 서재를 두고 먼 길 떠나기 전에 바라보니 왠지 낯설다.

매월당 김시습은 한 번 읽은 책은 다 머리 속에 입력되어 어딘가를 떠날 때 책 한 권 보따리에 넣지 않고서 떠났다는데, 나의 기억력은 그렇지를 못해서 몇 권은 가지고 떠나야 하는데, 나는 어떤 책을 가지고 떠날 것인가?

 

중국 적수에 가면, 여기 저기 펼쳐진 풍경들, 곧 대자연이 다 책이고, 도서관일 것이니까, 되도록이면 그냥 두고 가자, 가서 새로운 책에 몰입하자.

발로 쓰는 글, 발로 순간순간 만나는 사물이 가장 아름다운 것일 테니까?





휴식을 취하면서 한가하고 자연스럽게 살아야 하는데,

휴식을 취하면서 한가하고 자연스럽게 살아야 하는데,

 

저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일로 바쁘기 때문에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바쁘기 때문에 쉬지를 못하고, 쉬지 못해서 피로하고,

피로하기 때문에 가끔씩 아프다.

아픔을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하소연도 못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바꿀 수없는 생활 패턴이 된지 이미 오래다.

그렇다면 옛 사람들도 사는 것은 오늘날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휴식을 취하지 못했을까?

 

사람이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은 네 가지 일 때문이다.

첫째는 장수, 둘째는 명예, 셋째는 지위, 넷째는 재물이다.

이 네 가지에 얽매인 사람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며,

권세를 두려워하고 형벌을 두려워한다.

이런 사람을 두고서 자연의 이치를 위반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죽음도 삶도 외부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운명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어찌 장수를 부러워하겠는가?

귀함을 대단하게 보지 않는다면 어찌 명예를 부러워하겠는가?

권세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어찌 지위를 부러워하겠는가?

부를 탐하지 않는다면 어찌 재물을 두려워하겠는가?

이런 사람은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사람이라 말한다.

그는 천하에 대적할 이가 없으며

운명을 지배하는 힘을 자신의 내부에 갖고 있다.“

<열자>양주편에 실린 글이다.

 

이렇게 살면 되는데, 이렇게 살지를 못하고,

오래 살고자, 명예를 얻고자. 지위를 얻고자, 더 많은 돈을 갖고자,

자기 스스로의 삶을 살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어느 날 문득 내가 잘 못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은

이미 늦은 시간이다.

 

나는 어떨까? 나는 그 네 가지에 연연하는 것은 아닌데,

단 하나 떠나고 또 떠나는 것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마저 버리고 자연스레 산다면 더 나은 삶을 영위할 것 같은데

그게 어렵다.

무엇보다 여유를 갖고,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 가장 편안한 삶이다.

열자에 실린 네 가지 것, 마음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에 연연하지 않으면 가끔씩 불평도 하고,

욕이라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본다면 대단한 특권이다.

그리고 다가오는 모든 것을 운명애로 받아들이고,

휴식할 때는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너무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사치처럼 여겨져 매일 매일 정신을 혹사시킨다.

 

나의 영혼을 속박하는 것을,

나는 침묵 속에 추구할 수 없고,

평화로운 휴식에 만족스레 머무를 수 없으며,

나는 쉬지 않고 폭풍을 일으킨다.“

마르크스가 지은 <아내 제니에게 바치는 시집>에서

<연모>라는 시에서처럼

산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가혹한 일이다.

 

오비드는 말했다.

휴식을 취하라. 휴식을 취한 땅은 풍성한 수확물을 준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모든 물체는 휴식하려고

땅으로 떨어지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렇다. 낮은 곳으로, 땅으로 돌아갈 운명!

어느 날 그렇게 휴식의 장소로 가지 않을 자 누구인가?

그때까지 되도록 쉬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다가 가야하지 않을까?



가만히, 가만히, 내면의 소리를 듣는 시간,

가만히, 가만히, 내면의 소리를 듣는 시간,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인연에 의해 존재 한다.

내가 있어서 그대가 있고,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

우연인 것 같지만 필연이고,

필연인 것 같지만 우연인 이 세상에서

가끔은 사랑하고, 미워하며, 어떤 때는 담담히

흐르는 세월을 지켜 볼 때가 있다.

 

누군가 열어놓은 문

누군가 다시 닫은 문

누군가 앉았던 의자.

누군가 쓰다듬었던 고양이

누군가 한 입 먹은 과일

누군가 읽은 편지

누군가 쓰러뜨린 의자

누군가 열어 놓은 문

누군가 계속 달리는 길

누군가 질러가는 숲

누군가 몸을 던지는 강물

누군가 죽은 병원,"

 

J 프레베르의 시

<메시지>와 같이

어디선가, 문득 불현 듯, 아니 갑자기

다가오는 것도 있지만 예정된 수순처럼

이어지는 것이 모든 인간들의 삶이다.

그 삶의 어느 지점에서

삶이 막막할 때가 있다.

 

인생의 나그네길 그 복판에서

문득 생사의 어두운 숲속을

길 잃고 헤매는 스스로를 보았노라

 

단테의 <신곡> 서두와 같이

막막하지만 체념할 수밖에 없는

그런 때가 있고, 그 때

불현 듯 새로운 문이 나타날 때가 있고,

고개 숙이며 그저 침묵할 때가 있다.

그 때 잠잠히 내가 나의 내면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으리라.

 

전쟁과 피하기 어려운 죽음에 직면해서

아타락시아

조용한 마음으로 만사를 방관하는 이외의 나은 지혜는 없다.“

고 말한 베이컨의 말과 같이

가만히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침묵하는 그 시간,

그런 시간이 있다.





이로운 친구와 해로운 친구

이로운 친구와 해로운 친구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로운 사람만 만나고 살 수가 없고,

해로운 사람만 만나고 사는 경우도 없다.

삶이 언제나 진행형이고, 길다 면 길고 짧다면 짧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순간순간 내 삶에 이로운 사람이 있고, 또 해로운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옛 사람의 글에,

세상에 이로운 친구가 세 명이 있고, 해로운 친구가 세 명이 있다.

곧고 마음이 넓고, 많이 보고 들은 친구는 이로우며,

편견이 있고, 우유부단하며 말만 잘하는 친구는 해롭다.”고 하였다.

많이 보고 들은 친구란 책을 많이 읽어서 견문이 넓은 사람을 만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묵자에게 지식知識이란 무엇인가 묻자 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식이란 문지聞知’, ‘설지說知’, ‘친지親知의 세 종류로 구분되네,

안다는 것은 들어서 아는 것, 유추해서 아는 것,

직접 경험해서 아는 것이 있네, 그런데, 지식이란

이론과 실질이 합쳐져 이루어진다네.’ <묵자>

경상편經上篇에 실린 글이다.

 

지식이란 것이 글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실천할 때

그것을 참지식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옛 선인들은 삶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자기를 아는 것은 총명의 시작이며, 그것으로 미루어 남을 알 수 있다.”

왕안석의 말인데, 순자는 정론에서 그보다 더 나아간다.

 

옅은 자와는 깊은 것을 같이 잴 수 없고,

미련한 자와는 꾀를 같이 도모할 수 없으며,

우물 안의 개구리와는 동해의 즐거움을 운운할 수 없다.”

 

요즘 세상사가 순자가 말한 세상과 같다고 할까?

여기저기 자신의 이익과 자신이 속한 단체의 이익에 눈이 멀어

서로를 옅다고 말하고, 미련하다고 말하며,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폄하하고 무시하다가 보니

세상이 소란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대동의 세상은 자꾸자꾸 멀어지고,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만 팽배해지는

것이 이 시대의 폐단이다.

부끄러움과 아름다움이 결코 손에 손을 잡고 나란히

이 지상의 푸르른 길을 함께 가는 일은 없다.”

서양 속담이다. 부끄러움과 아름다움은 공존할 수가 없다는 말로

그 뜻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정답이고 진실한 것이다.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부끄러움은 슬픔에 잠기고,

아름다움은 철면피한 생각을 하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의 진면목이라고 생각하면 세상이 너무 쓸쓸하지만

가끔씩 그런 생각에 잠기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진한 슬픔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