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6

시간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보면서도 시간을 축내고 살다 죽는다

산중산담 2019. 6. 26. 15:20



시간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보면서도 시간을 축내고 살다 죽는다.

시간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보면서도 시간을 축내고 살다 죽는다.

 

오랜 만에 아무런 일정이 없이

오로지 나만을 위한 나만의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다가, 온 몸에 힘을 다 빼고 누워서 죽은 시체놀이를 하다가

살기 위해 무언가를 먹고 그러다가 잠시 쉬면서 보낸 시간들,

 

아침이 오고, 점심때가 오고, 저녁이 오는

그 언제나 보내는 그 날들과 똑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있다고 여기는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간을 보냈고, 그리고 그 시간의 흐름이 멎은 듯한 시간 속에서

시간을 생각한다.

 

삶이 매순간 시간과 대면하면서 그 시간 속에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시간과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벌이면서 이어지는 것이

시간일 진대, 나는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 것인가?

수많은 사람 중에 단 하나인 내가 그럴진대, 하물며 수많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시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토마스 만은 그의 대표작인 <마의 산>의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를 통해 그 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두 개의 지침指針이 저마다의 방향을 가리키고, 가느다란 초침은 자기 담당의 작은 원의 주위를 분주하게 돌고 있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그 초침을 바라보면서 시간의 걸음을 이삼 분만 멈추게 하고 늦추게 하여 시간의 꼬리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초침은 빨리 전진할 뿐, 차례로 다가오는 수자는 보지도 않고 오직 그것에 닿아서 지나갔다. 그것을 뒤로 하고 멀리 물러가서는 다시 가까이 와 거기에 이르렀다. 초침은 목표, 구분, 도수의 수자에는 관심이 없었다.

60이라는 수자가 붙어 있는 곳에서 잠깐만 멈추어서인지, 적어도 일 한 가지는 끝마쳤다는 눈짓을 했으면 좋을 텐데, 초침은 60이라는 수자가 붙어 있지 않은 선과 마찬가지로 황급히 지나갔다. 그 상태를 보고 있으면 초침에게는 도중의 어떤 수자나 구분도 그저 나란히 있을 뿐으로, 초침은 한 눈을 팔지 않고 달리고 있을 뿐이라는 걸 느꼈다. 이리하여 한스 카스토르프는 글라스 휘테제의 시계를 다시 조끼 주머니에 집어 놓고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미소한 시간 단위에 의해 살고 있는 그 짧은일생에서 볼 때, 우리들의 초침秒針의 바쁜 총총걸음도 장침長針의 느릿하고 완만한 걸음처럼 느껴지는 생물이, 지구보다는 작은 유성에 살고 있는 것을 상상해보는 것은 황당무계한 공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또 다음과 같은 생물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생물이 살고 있는 공간에는 거대한 걸음 폭의 시간이 결부되어 있어서, 그들의 시간 경험에 있어서 방금’; 조금 뒤에, ‘어제’ ‘내일이라는 구분의 개념은 한없이 확대된 의미를 갖고 있는 생물을, 우리들에게 그러한 상상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관대한 상대주의의 정신에서 판단해도, 장소가 다르면 습관도 다르다.’는 법칙에서 보아도, 올바르고 건전하고 훌륭한 상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 하루, 일주일, 한 달, 한 학기라는 시간이 또한 큰 의미를 가지는 연령, 그러한 시간 단위가 생활의 여러 가지 변화와 진보를 가져오는 연령의 인간이, 어느 날 ‘1년 전어제’ ‘1년 뒤내일이라고 부르는 좋지 않은 습관에 젖는다든지, 가끔 그러한 습관에 빠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시간의 구분, 공간의 구분이 뒤범벅이 되어 구분을 지을 수 없게 되고, 현기증을 느끼게 하는 상태로 되는 것이 말하자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휴가 중이라면 그런 마력에 끌려 들어가도 허락해 줄 수 있는 경우, 즉 풍경 적 환경이 있는 법이다. ”

 

이렇게 흘러가고 또 흘러가는 그래서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강물과 같이 흘러가는 시간을 면밀하게 본적이 있었던가, 아니, 그 시간이 내가 한 눈 팔고 있는 시간에도 잡담을 하는 시간에도, 잠을 자거나 어정거리는 그 시간에도 흐른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고 산다면 그 삶을 과연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견디는 것이 아니라 미칠지도 모르고, 미쳤을 때에만 온전히 살 수 있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구름과 같이, 아니 강물과 같이 흐르고, 그 흐름 속에서 흐름을 감지하지 못하는 둔한 의식이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흐른 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을 맞추지 못하여, 만나지 말아야할 사람을 만나고,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을 겪으면서 사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을 나도 그대도, 모르면서 사는 것은 아닌지,

그렇지만 결국 시간의 흐름이 멈출 때 또 다른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 우리들,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 우리들,

 

금세 하루가 간다. 몇 권의 책을 읽고,

몇 편의 글을 쓰고, 그리고 서성거리고 누웠다가 일어났다가

문득 돌아서서 이미 지나간 지난날들을 이렇게 저렇게

회상하는 사이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그래 20191월도 그 마지막 날이 멀지 않았구나.

가는 것이 가는 것만이 아니고, 가는 것은 또 오는 것,

오고 가는 그 톱니바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돌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1802122일에 독일의 시인 휠덜린은

뵐렌도르프에게 다음과 같은 보낸 자의 편지를 보냈다.

단호하게 이 한가지만은 변하지 않는다. 대낮이든, 또는

한밤중이든, 언제나 하나의 기준이 존재한다.

만인에게 공통되면서도, 그것은 각자에게 독자적으로 주어져서

사람들은 각기 나아갈 수 있는 곳까지 가고 온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고난 속에 유배 중이던 때,

독일의 시인 훨덜린은 가고 오는 우주의 이치를 설명하면서

비탄과 슬픔에 가득 찬 글을 남겼었다.

 

나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니다.

즐거워서 사는 것도 아니다.“

 

어디 훨덜린만 그럴까?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이 금세 닥친다.

 

세월은 새가 나는 듯 재빠르게 지나가고,

세상사는 바둑같이 매 판마다 새롭다.

年光似鳥翩翩過. 世事如棋局局新

 

이름을 알 수 없는 옛 사람이 노래한 시 구절처럼,

세월은 화살보다 더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세상은 눈이 부시게 변하고 또 변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하나도 없다.

두 번의 똑 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 같은 입맞춤도 없다.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폴란드의 시인 심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라는 시와 같이

순간순간 전체를 걸고, 살아야 하는데,

나는 가끔씩 멍한 채 세상을 바라보고, 쓸데없는 일에 분노하고,

그런 사실조차 가끔씩 까마득하게 잊고서

사는 것은 아닐까?

 

바보처럼, 얼간이처럼, 그렇게,.....





보아도 볼 수 없는 아득한 그 길,

보아도 볼 수 없는 아득한 그 길,

 

매일 하고 또 해도 물리지 않는 것,

그것이 길을 걷는 것이고,

매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

식사 시간이다.

가장 지독한 사랑이라고 내가 부르는 걷기와 식사,

그것만이 인생에서 중요할까?

 

기다리지 않아도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온다는 봄과는 다르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그 시간 사이로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것,

가서 잡으려 하면 물러서고, 다 잡았는가 싶으면 저만큼

물러서서 내가 다가오기만 기다리는 것,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무용지물이면서도

꼭 필요한 도라고 부르는 그 깨달음에 대하여

노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저 도의 아득한 실상實狀긴 끈처럼 면면히 이어지지만,

그 무엇이라 이름 할 수 없다.”

 

그렇다. 그 길, 오매불망 찾는 그 길은

형체도 없고, 이름을 지을 수도 없는 것,

그래서 밤도 낮도 모른 채 세상 어느 곳,

어느 하늘 아래에 있는지도 모른 채

헤매면서 찾는 것이 길이다.

길에서 길을 찾고, 길에서 길을 묻는 마음이여!

그 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대저 지극한 도는 형상 이외의 것까지 포함 하나니,

보아도 그 근원이 보이지 않으며,

참으로 큰 소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진동하나니,

들어도 그 울림이 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설假說에 의지해 펼쳐서 참 진리의 심오한 뜻을 보며,

신종新鐘을 매달아 울려서

한 진리(일승一乘)의 둥근 소리(원음圓音)를 깨닫는다.”

경주 국립박물관에 내 걸린 성덕대왕신종,

에밀레종의 한 면에 새겨진 글이다.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이름의 길이다.

그 길을 찾아 한 세상을 바쁘게 살아도 찾을 수 없고

한가하게 아니 게으르게 살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느 날, 아니 어느 순간 문득,

그 길을 찾고 무릎을 탁 칠 때가 있다.

아하! 그렇구나.

하고 돌아서는 순간 사라지는 그 길,

길은 항상 먼 곳, 안개처럼 아스라한 그곳에서

나를 오라고 손짓한다.





슬픔에 젖은 채 대동사상 강연을 하다.

슬픔에 젖은 채 대동사상 강연을 하다.

 

서울 왕십리 교보생명빌딩에서

정여립과 대동사상에 대한 강연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전주를 출발했다.

어느 집안이나 대동소이한 것이 문중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다.

나 역시 우리 집안 영산 신씨 문중 회의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아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 문중의 대소사를 챙기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산, 고성. 대구, 포천, 인천 광주, 전주 전국의 각 지역에서 160여명 모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눈의 띠는 사람들이 정언신, 정언지 형제의 집안이었다.

정언신은 정여립과 구촌 간이었는데, 기축옥사 당시 정언신은 우의정

정언지는 공조참판을 지내고 있었다.

 

잘 나가던 집안, 정언신과 정언지는 기축옥사로 인해

집안이 쑥대밭이 되었는데, 정언신은 선조 16(1583)

여진족(야인(野人)인 이탕개(尼湯介)가 쳐들어오자

함경도 순찰사에 임명되었다.

그 때 데리고 갔던 장수들이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과

충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신립 그리고 진주성 싸움의 명장 김시민(金時敏)

이억기(李億祺) 등 뛰어난 명장들을 거느리고 적을 격퇴한 사람이다.

정언신이 이탕개의 난을 평정하고 함경도 관찰사로 북쪽 변방을 방비하면서

관북 일대의 안정과 복지를 위해 정성을 다하자,

여진족들은 아기를 낳기만 하면 정언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 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 사건이 났을 때 옥사를 담당하였는데,

호남의 유생 양천회(梁千會)가 올린 상소에 의해 역모 혐의를 받아

파직되고 갑산으로 유배를 갔고, 정언신은 몇 달도 안 되어

통한의 한을 품고 죽고 말았다.

한편 정언신의 막내아들 정율(鄭慄)

아버지는 역적 괴수와 친밀하지 않았다는 상소를 올렸었는데,

아버지가 큰 화를 입자 부끄러움과 한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을 하였다.

죽은 정율과 교분이 있었던 백사 이항복은

정율을 추모하는 글 한 편을 지어 무덤 속에 넣었다.

그 후 정율의 아들 세규(世規)가 장성한 후에 묘를 이장하면서,

그 만장을 꺼냈는데, 아래의 글은 거기에 쓰여 진 내용이다.

 

대저 사람은 본래 잠깐 우거하는 것과 같으니,

오래고 빠른 것을 누가 논하랴.

이 세상에 오는 것은 곧 또 돌아감을 뜻함이니,

이 이치를 내 이미 밝게 아나 자네를 위하여 슬퍼하노니.

내 아직 속됨을 면하지 못하여 입이 있으나 말할 수 없고,

눈물이 쏟아져도 소리 내어 울 수도 없네.

베개를 어루만지며 남이 엿볼까 두려워서,

소리를 삼켜가며 가만히 울고 있네.

어느 누가 잘 드는 칼날로 내 슬픈 마음을 도려내어 주리.”

 

이 보다 더 진한 슬픔이 어디 있을까?

나는 처음 그 글을 읽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조선에 붕당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나를 대신할 사람은 오직 정언신 밖에 없다고 칭찬하였고,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였던 황정욱(黃廷彧)

탄금대에서 신립마저 패했다는 소식이 올라오자,

남대문에 올라가 정언신이 살았다면 왜적에게 그토록 허망하게

국토를 짓밟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여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었다.

 

세월은 강물과 같이 흐르고 흘러

그 사건이 일어난 지 430년이 흐른 지금,

전주 인후동에 정언신로가 들어서고,

혁신도시에 정여립로가 들어섰으며,

정여립 동상과 대동사상기념사업회를 만들기 위해 초석을 놓고 있는 때

기축옥사로 피해를 입었던 후손들이

그 쓰라린 세월들을 서로 주고받는 광경을 보며

역사란 인간에게 무엇인가?

강연 내내 내 가슴을 후비면서 파고들던 물음이었다.

 

정여립이 꿈꾸었던 대동세상이 어느 날 불현 듯,

짠하고 나타날 날이 과연 있기는 있을 것인가?





세상의 모든 것은 그물코처럼 촘촘히 짜여 져 있다. -2월의 소망-

세상의 모든 것은 그물코처럼 촘촘히 짜여 져 있다. -2월의 소망-

 

조금 전, 2019년의 한 달이 갔다.

누군가 정한, 그래서 인간이 시간이라고 정한 그 시간이

흐르는 가물과 같이, 아니 쏜 살 같이 지나갔다.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아니, 어떤 흔적도 없이,

간다는 인사도 없이, 메아리도 없이

총총 사라지는 시간,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 시간은 갔는가 싶으면 되돌아오고,

되돌아왔는가 싶으면 어느 새 떠나고 없다.

 

시간의 이음매에서 벗어났다.“

이럴 수도 있지만 그 이음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간의 한 가운데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숙명이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 피어 난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흘러간다.

존재의 영원한 집은 영원히 세워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다시 인사를 나눈다.

모든 순간에 존재는 시작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은 회전한다.

중심은 도처에 있다.

영원히 오솔길은 굽어 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영원히 가고 오는 영원회귀의 순리,

그 속에서 모든 인간은 꿈을 꾸고, 좌절과 절망도 하며

앞으로, 앞으로 나가기도 하며,

어느 순간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기도 한다.

그리고 누구나 저마다 삶의 규칙을 정하고 산다.

그 규칙이 어느 날 바뀌기도 하고, 그 규칙을 평생 신념처럼 지닌 채

살기도 하는데,

<자본론>을 지은 마르크스의 삶의 규칙이

재미있다.

 

당신이 가장 혐오하는 것은 무엇인가? 굴종!

인간에게 가장 불행한 것은 무엇인가? 굴복!

당신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오로지 하나의 목표를 추구해 나가는 것!

당신의 좌우명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의문시하라.‘

당신이 남기고 싶은 격언은 무엇인가?

사람 사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결코 나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

 

살아가면서 비굴하게 굴종이나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대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강변하는데,

마지막 물음과 답에 마르크스가 추구한 인생의 핵심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물코처럼 촘촘히 엮여져 있다는 것,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사람과 세상과의 관계,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 유와 무,

그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 말과 청나라 초기를 살았던 사상가

왕부지의 말은 울림이 있다.

눈으로 보지 못했다 해서 색깔이 없는 것이 아니며,

귀로 듣지 못했다고 해서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안다는 것이나 모른다는 것이

알고 보면 거기서 거기, 백지장 한 장 차이라고 여기며,

앎을 향해 나아가고 나아가는 것,

그래서 새로 맞은 한 달, 2월을 새롭다고 여기며 최선을 다해 사는 것,

그것이 바른 삶이지 않을까



한 해가 저물어 가나니 비바람조차 처연凄然하고,

한 해가 저물어 가나니 비바람조차 처연凄然하고,

 

설날을 앞둔 거리가 부산하다.

고향으로 가기 위해, 섣달 마지막 마무리를 위해

부산한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고향 생각,

그 속에 내 어릴 적, 후견인처럼, 아니

바람막이처럼 내 곁에 항상 있었던 할머니가

당신이 겨울의 초입에 풀을 쑤고, 댓잎을 덧댄 다음

창호지를 바른 문 앞에 앉아서

먼 듯 가까운 듯 나를 바라보고 있다.

쓸쓸하면서도 그윽한 고향 풍경 속에

떠오르는 한 편의 시가 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나니 비바람조차 처연凄然하구나.

종이 창문 대 대나무 집엔 등불이 파르스름하게 빛나네.

때로는 이러한 풍경 속에서 자그마한 정취를 얻기도 하지.“

<취고당검소>에 실린 한 편의 시다.

 

다 잊었는가 싶으면 한줄기 봄바람처럼 떠오르는 옛 추억들,

그래서 그랬던가,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연연 해 하는 것들이 <취고당검소>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가슴속에서 연연해한다.’자를 떨쳐 버리면

상쾌하고 말끔하게 정말 자유로워진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집착하는 이 마음이다.

물을 길어 오면서 진흙을 잔뜩 묻혀 오듯 깨끗이 떨어내지 못하고,

집착하게 되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명쾌하게 잘라버릴 수가 없구나.“

 

그래, 삶이 그렇다.

매 순간 결단하고 또 결단하면서도

맺고 끊을 수가 없는 그 무엇,

그것들이 추억이기도 하고, 미련이기도 하고, 회한이기도 한 것은,

인생 자체가 끝나기 전까지 이어지는 그 연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항상 처음처럼 서툴고, 어렵고 한 것이

세상을 사는 것이라서 다음과 같은 글을 있는 것이다.

내 몸 조차 친숙하지 않은데,

하물며 내 몸 밖의 사물들이야 어떻겠나.”

땅덩어리조차 허상인데,

하물며 이 땅덩어리 안에 사는 미물이야 어떻겠나?“

 

나도 우주, 당신도 우주,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우주라서

무엇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삶은 매 순간이 낯설고, 어려운 것이다.

살아가면서 갈수록 절실하게 느끼는 것,

낮은 곳에서 살기도 어렵고, 높은 곳에 올라 살기도 어려운데,

달리 생각해보면 중간 적 위치에서 사는 것도 역시 어렵다.

하지만 요즘 세상의 이치를 들려다보면

높이 오르는 것은 더 없이 위태로운 것이다.

그래서 항상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과 같이

매 순간을 불안 속에서 사는 것이다.

너무 높으면 탈이 많고, 너무 튀면 시기를 받는 법,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심해졌구나.“

옛 사람의 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아서

틈이 날 때마다 책속으로, 고전 속으로 몸을 숨긴다.

 

내가 갈 곳, 내가 기댈 곳,

책 밖에 없구나. 지금 이 시간,





자살을 할까, 커피나 한 잔 할까?

자살을 할까, 커피나 한 잔 할까?

 

자살을 할까, 커피나 한 잔 할까?”

문득 펴든 책갈피에

알베르 카뮈의 글 한 줄이 보인다.

깊은 밤도 아닌 한 밤중,

잠은 달아났는데, 나는 뭐를 하지,

책을 볼까? 아니면 나도 카뮈처럼 커피를 한 잔 할까?

아니면 발소리 죽이고,

어둔 거실을 산책할까?

 

불 꺼진 방을 눈 감았다가 뜨면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는

좁은 공간을 서성이는 것,

칠흑같이 어두운 산길을 걷는 것과 같이

아니면 불빛도 없는 긴 터널을 걸어가듯이

그렇게 어정거리다가 보면,

문득 걸어가면서 잠이 들지 않을까?

 

, 밤이여, 신들의 축제여

 

오래 전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어째서 밤을 요정들의 축제라고 하지 않고,

신들의 축제라고 했을까?

잠 못 드는 사람들의 축제라고도 하지 않고,

이런 저런 쓸 데 없는 생각 속으로

깊어가는 밤에





섣달 그믐날에 그리움처럼 떠오르는 사람,

섣달 그믐날에 그리움처럼 떠오르는 사람,

 

내 유년의 섣달 그믐날,

그 추억 속에 할머니가 있다.

작은 체구, 백말에 곱슬머리였다.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이른 아침에 나 물 길러 간다.” 하시고

물동이를 이신 채 아랫집으로

물을 길러 가셨고,

찰랑찰랑 넘칠 듯 넘칠 듯한 물동이를

두 개의 검은 솥 옆에 내려놓고서

하얀 사기그릇에 물 한 그릇 떠서

장독대의 바위위에 놓고서

허리 굽혀 여러 차례 절을 하셨다.

 

그리곤 부산하게 설 차례를 준비하던

나의 할머니, 박심청,

일찍 자면 눈썹이 희어진단다.”

마당에 눈 쓸어라.”

호롱불 심지 갈아라.”

눈 속에 묻어둔 고구마 꺼내 오거라.”

어서 밥 먹어야지, 우리 큰 손주

 

지나간 추억 속에

할머니와 찍은 사진은커녕

꼬장꼬장한 할머니의 사진 한 장 없으니,

그뿐인가,

지금은 시간 속에 사라진

내 어릴 적 고향집, 툇마루에서 바라보던,

그 때 그 시절, 그 시절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을까?

 

우리의 기억 중에서 가장 좋은 부분은,

비가 오늘 날의 촉촉한 미풍에, 통풍이 되지 않는 공간의 냄새에,

벽난로에 처음 불을 지폈을 때 나는 향기에.

그러니까 나중에 우리가 자신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곳에 존재한다.

우리의 이성은 이러한 감각적 기억들을 쓸모없다고 거부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들은 우리의 눈물이 마르면,

다시 눈물을 나게 해주는,

우리의 과거를 담은 마지막이자

가장 훌륭한 비축고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꽃 파는 아가씨들 그늘에서>와 같이

할머니와 함께 보낸 내 어린 날,

눈물도 멎고 기억조차 희미한

내 추억의 비축고備蓄庫

어느 시공時空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는 나를

주시하고 있을까?





한가하고, 느긋하게, 만사를 내려놓고,

한가하고, 느긋하게, 만사를 내려놓고,

 

만사를 내려놓고, 책에서 책으로,

방에서 방으로, 오고 가다가 보니

섣달 그믐날이 가고 설날입니다.

오고 간다. 이보다 더 진실한 말이 있을까?

싶지만, 진실이 어디 그뿐이 아닙니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그리고 어둔 밤이 오고,

그 사이에서 느끼는 여러 생각,

그 생각을 접고 가만히

만사를 내려놓습니다.

 

만사가 느긋하니

웃기는 일도 많다.

초당에 봄비 오기에

사립문 닫았더니,

뜻 밖에도 갓 돌아온

밭 너머 제비 녀석,

날 보고 와 닫았냐?’

따지고 드네 그려.“

택당 이식의 <갓 돌아온 제비>라는 시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사를 내려놓으니,

오히려 또 다른 것들이 눈에 띄어서 쉴 사이가 없습니다.

여태껏 보이지 않던 잡다한 것들을

걸러내고 걸러내면서 집 밖으로 들어내고,

그래도 남는 시간. 한가하다고 여기며

드러눕기도 하고, 잠깐 쪽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나는 시간을 축내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마음껏 게으름을 피는 중일까요?

 

너는 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느냐?

넌 정말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으름뱅이냐?”

아이고 나리, 그럼 제가 대체 이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낮이니까 일을 하러 가야지

왜요? 대체 왜지요?”

돈을 벌어야 할 것 아니냐.?‘그러자 원주민은 더 의아해하면서 다시 물었다.

근데 대체 왜 돈을 벌어야 하나요?”

당연히 여유롭게 휴식도 취하고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돈을 버는 거지.”

그러자 원주민은 몹시 불쾌하고 분한 듯 다음과 같이 소리치며 다시 돌아누웠다.

하지만 그게 바로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이잖아요.”

 

계몽이라는 영국인과 나무그늘 밑에서 잠을 자고 있던 원주민과 나눈

농담같은 이야깁니다.

 

잠깐이라도 가만히 있으면 몸살이 날 것 같이 살아온 오랜 품성 때문인지,

게으름조차 마음 내키는 대로 피지 못하는 것.

그것이 나의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입춘은 어제 지났고, 오늘은 설, 금세 정월대보름,

곧 이어 남쪽에선 꽃 소식이 들려오겠지요.

모쪼록 아름다운 명절 설날엔,

몸은 비록 부산하지만 마음만은 한가하게, 여유롭게

<취고당검소>에 실린 구절처럼 자연스럽게 노닐기를 기원합니다.

 

객에게 약방문을 써달라고 하지만 병이 많아서가 아니라네.

문 닫아 걸고 야사를 듣지만, 그저 한가함을 얻으려는 것뿐,“

 

길 위에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도반들에게

마음 깊이 세배 올립니다.





못 난 놈들은 못 난 놈 얼굴만 보아도 즐겁다.

못 난 놈들은 못 난 놈 얼굴만 보아도 즐겁다.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친절과 아량, 포용, 정직, 이해, 공감 등, 우리가 칭송하는

인간의 자질을 우리 시회에서는 실패자들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교활, 탐욕, 소유욕, 인색, 자만, 이기심 등

우리가 혐오하는 온갖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실패자의 자질을 칭송하면서도

성공이라는 결과를 원한다.“

<분노의 포도>의 저자인 존 스타인벡의 글이다.

 

우리 주변에서, 아니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도처에서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왜 그럴까?

못 난 놈들은 못 난 놈 얼굴만 보아도 즐겁다.”

라는 우리네 속담과 같이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은 못난 사람들끼리 서로 나누고, 이해하고

협력하며 살았던 것이 우리네 전통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가난을 벗어났거나,

아니면 애시 당초 가난을 모르고,

실패나 절망과 고난을 모르고 부유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활양식에 따라 남을 도울 줄도 모르고,

중요한 것은 자기들은 어떤 선택된 계층이라는 것이 은연중에 몸에 배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우선 마음속의 욕심부터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 원이 있으니, 안으로는 신령스럽고 강하기를 원하고,

밖으로는 부귀를 원한다. 하지만 귀하기는 벼슬하지 않는 것보다

더 귀함이 없고, 부하기는 욕심내지 않는 것보다 부함이 없다.

또한 강하기는 다투지 않는 것보다 더 강한 것이 없고,

신령스럽게는 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신령스러운 것이 없다.“

 

네 가지 모든 것이 욕심을 부리지 않고 조금 내려놓을 때에 가능한 일,

그래서 <회남자>에서도 그 점을 경계하고 있다.

 

욕심이 많아지면 의리가 적어지고,

근심이 많으면 지혜가 손상을 받고,

두려움이 많으면 용맹이 떨어진다.”

 

세상에 일어날 일이 다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하지 말 것,

나는 나에게 다짐한다.

루스벨트도 말했지 않은가?

 

즐기지도 않고, 고통을 인내하지도 않는 소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보다는 실패로 끝날지언정

영광스런 승리의 경험을 위해 엄청난 일을

저질러보는 것이 훨씬 낫다.

왜냐하면 소인들은 승리도 패배도 모르는

회색의 불확실성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인이면 어떻고 대인이면 어떠랴,

다만 어차피 한 번 사는 삶, 소신껏 나만이 살 수 있는 삶을

살다가 가야하지 않겠는가?

내 것이라고 해서 다 내 것이 아니다.

갈 때는 다 두고 가는 것이다. 세상에 너무 미련두지 말고,

살다가 가야지

누구나 인생이라는 강은 죽음을 향해

흘러간다. 쉬지 않고, 그침이 없이,

그 삶을 향해 일로 일로 매진하자.

두려움 없이





순간순간, 매순간이 생의 전체인데,

순간순간, 매순간이 생의 전체인데,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삶, 실패의 연속을 살았던 분이다.

어머니가 어린 시절 수도 없이 나에게 들려주셨던 말이,

너그 아버지가 속이 없어서

과연 속이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너무 기반이 없었거나

운이 뒤따라주지 않아서 그랬을까?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생애는 나에게 지금도 수수께끼다.

아버지처럼 살았던 사람이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의 아버지다.

 

그는 늘 아버지가 사업에서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 적도 없지만,

그레고르 역시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당시 그레고르의 유일한 관심은

온 가족을 절망의 나락에 빠뜨린 사업 실패의 아픔에서

식구들이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는 정말 열심히 일한 덕분에 순식간에 창고직원에서

외판원으로 올라섰고, 덕분에 돈을 더 벌 수 있게 되었다.

이내 수당으로 받은 뻣뻣한 현금 다발을

가족들이 둘러앉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가족들 모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레고르가 가족 전체의 생계를 꾸려나가기에

넉넉한 돈을 벌어 와도 과거의 행복한 시절을 되돌아오지 않았다.

예전만큼의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가족들과 그레고르 모두 새로운 환경에 길들여진 것이다.

기꺼이 돈을 내놓고 모두 고맙게 돈을 받았지만

예전의 온기와 특별한 감정은 사라져 버렸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의 일부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는 한 마리 파충류로 변하였고,

출근을 안 하하니까 그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은 처음엔 안타까워 하다가 어느 순간 귀찮아했다.

그리고 여동생이 던진 사과에 맞아 몸이 썩어가다가 죽고 말았다.

슬픔에 겨웠던 가족들은 금세 그 아들이자,

오빠를 여윈 슬픔에서 벗어나 야외로 놀러나가는 것으로

소설은 결말을 짓는다.

이런 일들은 이 세상에서 비일비재하다.

가족 간의 사랑도 그렇고 금전만이 아니라 이성간의 사랑도 그렇고,

동성 간의 우정도 그렇다.

처음엔 작은 것에도 너무 감격해 하고 고마워 하다가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모든 것들이 식상해버리는 것이다. 고마울 것도 신기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그 어떤 것도 새롭지 않고, 구태의연한 삶,

그것이 권태일수도 있고, ‘귀찮음일 수도 있지만,

그 때 사람들은 그 따사로웠던 온기가 사라지면서

무관심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매 순간이 기적이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삶인데,

그 순간의 고마움을 느끼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생기는 일들, 그 알들에 파묻혀 잇다가

새삼 나를 생각하는 그 시간에야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게 되지만,

그 때는 이미 흘러 간 과거가 되는 것,

 

어떤 일부분의 사람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 모두가 그렇고,

인간의 역사가 그렇다.

 

책과 씨름하며 보낸 긴 연휴가 끝나고,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데,

무엇을 더 추구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그냥 계산하지 않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

그것을 나의 삶의 목표 아닌 목표로 삼는다면

너무 사소한 목표일까?






천국과 지옥이 아주 가깝게 그대에게 열려 있나니

천국과 지옥이 아주 가깝게 그대에게 열려 있나니,“


사는 것이 지옥과 같다는 사람이 있고,

사는 것이 천국과 같다는 사람도 있다.

같은 시대,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서로 상반된 말을 하는 것은

삶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마음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삶은 똑 같은 삶인데,

극과 극의 삶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이라고 여기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지옥을 그냥 내버려 둔 채 떠나고 싶기는 한 것일까?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지옥이건, 천국이건,

그곳을 두고 과감히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런 말이 있다.

 

지옥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그 곳 이외에

더 좋은 곳이 없다고 믿고 산다.”

 

마찬가지로 천국도 그렇다. 천국에서의 나날도, 어느 순간

지겨워지고, 그래서 결국 권태의 늪에 빠져드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그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생은 시계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인간이 온갖 고뇌와 고통을 지옥으로 옮겨 놓은 다음,

천당에는 오직 권태가 남았을 뿐이다.”

 

천국과 지옥은 남극이나 북극처럼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백짓장 한 장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래서 괴테의 시 <행복한 동경>

큰 울림을 준다.

 

나 이제 다시 만나 무엇을 바라리.

오늘도 피지 못한 꽃에서

천국과 지옥이 네게 열려 있나니,“

 

“”나쁜 사람들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아니?“

지옥이요.” 나는 주저 없이 뻔한 대답을 했다.

그럼 지옥이 뭔지? 말해 볼래?”

벌겋게 타오르는 불구덩이죠,”

그 구덩이에 빠져 영원히 불타고 싶지 않지?”

그럼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거든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잠시 생각했다. 마침내 내뱉은 나의 대답은 엉뚱했다.

“”건강해서 죽지 않아야지요.“

샬롯 브론테의<제인 에어>에 나오는 글이다.

 

영원히 죽지 않고 건강하게 산다.

꿈은 꿀 수 있지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좀 빠르고, 좀 느리고 시간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다 죽는다.

 

그렇다면 지옥이나 천국은 과연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마음은 천국에서도 지옥을 만들 수 있고,

지옥에서도 천국을 만들 수 있다.”

존 밀턴은 말했지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이라 여기는 곳에서도

지옥이라 여기는 곳에서도 삶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 지옥의 지붕 위를 걸으며,

꽃구경을 하네.“

일본의 하이쿠 시인 이싸의 짧은 시 한 편 같이

그 순간에 뛰어드는 불나방 같이

계속 되는 우리들의 삶,

신기하지 않은가?

 




다시 떠오르는 한강의 추억들,

다시 떠오르는 한강의 추억들,

 

그새 오래 전 일입니다.

200210,

금강, 섬진강, 한강, 낙동강, 영산강을 다 걷고,

그 주체하지 못할 쓸쓸함으로, 마음이 무너져 갈 때,

처음 컴퓨터 자판을 한 자 한 자 두드려 쓴 글이

아래의 글입니다.

 

강물이 흐르듯 내 마음도 흐르고

강물 소리 듣기

 

친구여 강은 여러 가지 소리를 갖고 있군요!

무척이나 많은 소리를 말이오. 강은 왕자의 목소리, 전사의 목소리, 황소의 목소리, 밤에 우는 새의 소리, 산모의 목소리를 갖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탄식하는 자의 목소리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밖에도 다른 수천의 소리를 갖고 있는 게 아닐까요?"

 

바스테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강물의 소리 안에는 삼라만상의 목소리가 다 깃들어 있지요"

 

그가 강가에서 배운 것은 기다리는 것참는 것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중에서

 

그렇습니다. 하나의 일에 마침표를 찍은 뒤, 삶이 환희나 기쁨이 아니고 삶이 팍팍해서 슬픔이 강물처럼 밀려올 때, 강가에 나가 싯다르타처럼 흐르는 강물소리에 귀를 기울여 볼 일입니다.

강은 처음엔 그대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대가 강과 하나가 될 때, 그 강은 스스럼없이 그대에게 말을 건넬 것입니다.

"잘 왔네 친구여" 그대 어깨 두드리며 그대의 영혼, 깊숙이 강은 스며들 것입니다.

"강을 보라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그 근원인 바다로 들어가지 않는가."라고 외치는 니체의 목소리가 잔잔한 강물에 파문을 일어도, 그 강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냐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다.

미친 듯이 소리쳐 옛 사람에 물어보자.

옛사람도 이랬더냐, 이게 아니더냐,

산아 네 말 물어보자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이냐,

그림자는 돌아다봤자 외로울 따름이고,

갈림길에서 눈물 흘렸던 것은 길이 막혔던 탓,

삶이란 그 날 그날 주어지는 것이었으며,

살아생전의 희비애락은 물 위의 물결 같은 것 ,

그리하여 말하지 않았던가,

이룩한 미완성 하나가 여기 있노라고,

혼이여! 돌아가자! 어디인들 있을 데 없으랴 ,

 

매월당 김시습의 시 한편이 가슴을 후비고 지나가는 가을밤입니다.

 

이렇게 시작했던 글이 4, 5천편의 글이 되었습니다.

넋두리 같기도 하고, 혼잣말 같기도 한 글이

강을 따라 천천히 걸었던 그 여력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한 방울의 물이 모이고 모여

강물이 되고, 그 강물이 화엄의 바다로 들어가는 그 풍경을 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강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사실을,

 

이 밤, 다시 걷게 될 한강,

태백에서부터 서울 거쳐 김포, 보구곶리에 이르는 전 구간이

활동사진처럼 펼쳐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물이 흐르듯 내 마음도 흐르는데,

그 마음의 강물도 어느 곳에선 가만히 멈추고

흐르는 세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테지요.

그 사이에 꽃이 피고, 지고, 무서리가 내리고,

자욱했던 안개도 서서히 걷힐 테지요.

 


삶의 이모저모,

삶의 이모저모,

 

한 빔 중에 무심코

손에 잡히는 책을 펼친다.

 

자공이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옳지 않다.“

다시 자공이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싫어하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 또한 옳지 않다. 마을 사람이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착하지 못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만 못하다.”

<논어>에 실린 글이다.

 

사람이 너무 착해도 문제고,

악해도 문제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먼저 마음을 선하게 가지라.’

여기에서 출발하자.

 

번지樊遲가 공자에게 물었다.

이란 무엇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번지가 공자에게 물었다.앎이란 무엇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물었다.

벗과 사귀는 것은 무엇입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충성으로 고하여 착하게 인도하되, 듣지 않으면 그만두어

스스로 욕되게 하지 말 것이다.”

 

너무 가까워도 문제고,

너무 멀어도 문제다.

서로 사랑하는 것도

너무 무심한 것도,

그래서 사람과 사람의 만나서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래도, 한 번 사는 삶,

우정도 사랑도

인생 전체를 걸고 해야 하지 않을까?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삶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데,

인간의 삶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데,

 

가끔씩 인터뷰를 끝내고 거의 비슷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왜 머리가 좋으신데, 사법고시나 공무원 시험을 보지 않았습니까?”

머리가 좋으면 사법고시를 봐야 한다는 말이

어떤 경전이나 백과사전에 씌어 져 있는 것일까?

궁색하게, 나는 답하곤 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했고,

그 뒤로 한 번도 그 꿈을 버린 적이 없었고,

더 중요한 것은 내 주변에 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동기부여를 해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공식적인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이었을까?

고려의 천재 시인 이규보는 수도 없이 시험에 떨어지다가

결국 최충헌에게 글을 써주고서야 전주부에 말단 직원에 채용되어

벼슬살이를 시작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대 학자인 율곡 이이는 이규보와 다르다.

그는 시험에 아홉 번을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란

별칭을 받았던 사람이다.

결론은 천재들도 시험을 잘 보는 천재가 있는 반면,

시험을 잘 못 보는 천재가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이규보처럼 시험을 잘 못 보는 사람에 들었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어느 때, 어느 시절에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

그것이 인생을 결정짓는다.

 

선택이란 언제나 고통스러운 것이며,

가장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온

나의 생은 처참하다.”

앙드레 지드의 말이다.

 

어느 때 어떤 것을 선택하는 순간

그 선택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영혼은 자기 사람을 고르곤

그리곤 문을 닫죠(...) 전 알았죠.

영혼이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하나만 고르곤 그리곤 관심의 판막을 닫아버렸죠.

돌처럼,“

 

에밀리 디킨슨의 <영혼은 자기 사람을 고르곤> 이라는

시 구절처럼,

선택하고 나머지를 닫아버리는 용기,

그것이 나이가 들수록 어렵다.

어딘가 벗어날 돌파구도 없는데,

앞으로 어떤 것을 더 선택하고,

몰두할 것인지,

 




마음이 넓어야 시야가 넓다.

마음이 넓어야 시야가 넓다.

 

가난했던 사람이나, 불행했던 사람들이

그 시절을 극복하고서, 두 갈래로 나뉜다.

너무 돈에 연연하면서 좁은 울타리 속으로 파고드는 사람이 있고,

돈에 연연하지 않고, 더 큰 꿈을 위해 삶을 펼쳐나가는 사람이 있다.

어차피 한 번 사는데, 두 번 살 수가 없는데,

더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어떨까?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 삶의 테두리 속에서 어떤 사람은

큰 꿈을 설계하며 펼치며 살고자 한다.

 

사물로는 하늘과 땅, 해와 달만큼 큰 것이 없으나,

두보는 해와 달은 새장 속의 새이고,

하늘과 땅은 물위의 부평초라고 말했다.

인간의 일로는 나라를 선양하고, 정복하는 것만큼 큰 일이 없으나.

소강절은 요 임금과 순임금은 석 잔 술을 사양하듯 나라를 선양했고,

탕임금과 무왕은 바둑 한 판 두듯이 정벌했다.“ 고 말했다.

사람은 이처럼 마음과 시야만 가지고서도

천지사방을 삼켰다 토했다 하고 천 년의 시간을 오르내린다.

일이 닥쳐올 때는 큰 바다에 거품이 이는 듯하고,

일이 지나갈 때는 넓은 하늘에서 그늘이 사라지듯 하며,

스스로 만 자기 변화를 만들어 내면서도

티끌 하나 움직이지 않게 된다.“

<채근담>의 한 소절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살아 볼만한 일이 아닐까?

그런데, 그렇지 않게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모든 세상이 같은 수레의 바퀴자국 같아서

만물은 일체를 이루어 원래 너와 나의 구분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진실에 어둡고 허망한 것을 좇아서

평탄한 길 위에 제 스스로 함정과 장애물을 만들고,

굴 안에 들어가 제 스스로 울타리를 치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이 역시 <채근담>에 실린 글이다.

 

두 갈래 길이거나 아니면 세 갈래 길이거나

길은 누가 선택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지나간 시절이 가난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오로지 돈돈하며 살기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는데,

왜 그럴까?

그 해답이 서머 셋 모옴이 <달과 6펜스>에서 화자가

스트릭랜드의 부인을 만나고 술회 한 글에 나와 있다.

 

고생이 사람의 성격을 고상하게 해준다는 말은

결코 사실이 아니었다. 행복이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고생은, 대개의 경우,

마음을 좁게 만들고 앙심을 품게 만들어줄 뿐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그렇게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사람마다 그 나름대로의 지니고 있는 도량,

도량 탓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마음이 넓어야 시야가 넓다.”

조금은 넓게, 작은 일에 매몰되지 않고,

살다가 가야겠다.

내가 걷고 또 걷는 대지와 온갖 사물들을 사랑하면서





변산 앞바다로 지던 저녁노을.

변산 앞바다로 지던 저녁노을.

 

겨울의 잔해가 남은 서해 바다에

별무리같이 쏟아져 내리던 햇살,

조금 있다가 다시 바라본 바다는

붉고도 붉게 타오르다가 지쳐서

가만 가만 소리죽여 물살이 되어 울고 있고,

바람은 슬픔에 겨운 듯 가다가 오고,

오다가 간다.

 

산 너머 저쪽엔

별똥이 많겠지.

밤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산 너머 저쪽엔

바다가 있겠지.

여름내 은하수가 흘러갔으니.“

 

대천이 고향인 이문구 선생의

<산 너머 저쪽> 이라는 글이

불현 듯 떠올라 가슴 아린

추억에 잠기는 시간,

터짓듯 말 듯, 저물어 가는

태양을 보며.

나직하게, 목소리 죽여 노래를 불렀다.

 

하늘은 붉게 타오르고

그 아래 바다는 붉고도 붉은 기둥 아래

핏빛으로 물들면서 번져 간다.

 

어둠이 내려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 시간,

사람은 억겁의 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겨울나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