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젖은 채 대동사상 강연을 하다. 서울 왕십리 교보생명빌딩에서 정여립과 대동사상에 대한 강연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전주를 출발했다. 어느 집안이나 대동소이한 것이 문중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다. 나 역시 우리 집안 영산 신씨 문중 회의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아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 문중의 대소사를 챙기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산, 고성. 대구, 포천, 인천 광주, 전주 전국의 각 지역에서 160여명 모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눈의 띠는 사람들이 정언신, 정언지 형제의 집안이었다. 정언신은 정여립과 구촌 간이었는데, 기축옥사 당시 정언신은 우의정 정언지는 공조참판을 지내고 있었다. 잘 나가던 집안, 정언신과 정언지는 기축옥사로 인해 집안이 쑥대밭이 되었는데, 정언신은 선조 16년(1583)에 여진족(야인(野人)인 이탕개(尼湯介)가 쳐들어오자 함경도 순찰사에 임명되었다. 그 때 데리고 갔던 장수들이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과 충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신립 그리고 진주성 싸움의 명장 김시민(金時敏)과 이억기(李億祺) 등 뛰어난 명장들을 거느리고 적을 격퇴한 사람이다. 정언신이 이탕개의 난을 평정하고 함경도 관찰사로 북쪽 변방을 방비하면서 관북 일대의 안정과 복지를 위해 정성을 다하자, 여진족들은 아기를 낳기만 하면 ‘정언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 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 사건이 났을 때 옥사를 담당하였는데, 호남의 유생 양천회(梁千會)가 올린 상소에 의해 역모 혐의를 받아 파직되고 갑산으로 유배를 갔고, 정언신은 몇 달도 안 되어 통한의 한을 품고 죽고 말았다. 한편 정언신의 막내아들 정율(鄭慄)은 “아버지는 역적 괴수와 친밀하지 않았다”는 상소를 올렸었는데, 아버지가 큰 화를 입자 부끄러움과 한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을 하였다. 죽은 정율과 교분이 있었던 백사 이항복은 정율을 추모하는 글 한 편을 지어 무덤 속에 넣었다. 그 후 정율의 아들 세규(世規)가 장성한 후에 묘를 이장하면서, 그 만장을 꺼냈는데, 아래의 글은 거기에 쓰여 진 내용이다. “대저 사람은 본래 잠깐 우거하는 것과 같으니, 오래고 빠른 것을 누가 논하랴. 이 세상에 오는 것은 곧 또 돌아감을 뜻함이니, 이 이치를 내 이미 밝게 아나 자네를 위하여 슬퍼하노니. 내 아직 속됨을 면하지 못하여 입이 있으나 말할 수 없고, 눈물이 쏟아져도 소리 내어 울 수도 없네. 베개를 어루만지며 남이 엿볼까 두려워서, 소리를 삼켜가며 가만히 울고 있네. 어느 누가 잘 드는 칼날로 내 슬픈 마음을 도려내어 주리.” 이 보다 더 진한 슬픔이 어디 있을까? 나는 처음 그 글을 읽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조선에 붕당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은 “나를 대신할 사람은 오직 정언신 밖에 없다”고 칭찬하였고,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였던 황정욱(黃廷彧)은 탄금대에서 신립마저 패했다는 소식이 올라오자, 남대문에 올라가 “정언신이 살았다면 왜적에게 그토록 허망하게 국토를 짓밟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여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었다. 세월은 강물과 같이 흐르고 흘러 그 사건이 일어난 지 430년이 흐른 지금, 전주 인후동에 정언신로가 들어서고, 혁신도시에 정여립로가 들어섰으며, 정여립 동상과 대동사상기념사업회를 만들기 위해 초석을 놓고 있는 때 기축옥사로 피해를 입었던 후손들이 그 쓰라린 세월들을 서로 주고받는 광경을 보며 역사란 인간에게 무엇인가? 강연 내내 내 가슴을 후비면서 파고들던 물음이었다. 정여립이 꿈꾸었던 대동세상이 어느 날 불현 듯, 짠하고 나타날 날이 과연 있기는 있을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