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천 삼백리 길을 한 발 한 발 걷는다. 두 번째, 정선군 임계면 서유동에서 정선읍 용탄리까지 2019년,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의 정기기행인 <천 삼 백리 한강을 따라 걷는다.> 두 번째 여정이 2019년 3월 22(금)부터 3월 24일(일요일)까지 실시됩니다. 정선군 임계면 서유동에서 정선읍 용탄리까지 걷게 될 이번 여정은 아름다운 구미정과 노일마을, 그리고 정선아우라지와 구절리를 거쳐 정선읍을 지나 동강의 초입 용탄리까지 이어질 예정입니다. 임계면 서유동마을에서 다리를 건넌다. 강은 바리골마을과 햇골마을에서 흘러오는 내를 합쳐서 흐른다. 어느 것 하나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이 강의 무한한 사랑법이여, 높은 곳이 있으면 휘돌아가고 차면 넘치는 그 여유로운 사랑법이여. 강을 따라 걷는 나도 그 사랑법을 터득해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사랑보다 미움이 더 많고 그렇지 않으면 방관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월탄리로 향하는 소로에 만들어진 수로에는 개구리가 알을 낳았고 그 옆에는 어미인 듯싶은 개구리가 눈을 껌벅거리고 앉아 있다. 수로가 말라버린 곳에는 도롱뇽 알과 개구리 알들이 물이 없어 말라가고 있다. 집을 짓는 것도 알을 낳는 것도 터가 좋아야 하는 법인데. 조금 돌아가자 물이 많은 곳의 올챙이들은 벌써 깨어나 새카맣게 헤엄을 치고 있다. 수로 아래로 물살 빠른 강변에서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독대로 고기를 잡고 있다. 월탄마을에서부터 혈천동에 이르는 물길은 8자형으로 굽이쳐 흐르며 강 건너 가파른 절벽과 동굴에서는 물오리 몇 마리가 날아오른다. 굴 속에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넓은 못이 있었기 때문에 혈천동이라 이름 지은 혈천마을의 혈천교를 지나자 조선조 때 임계역이 있었던 역평마을에 도착한다.(...) 소나무숲 우거진 산을 가로질러 내려가니 새로 만든 다리가 있고 그 다리에는 휴일이라 놀러온 사람들 몇 팀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서 사이다 한 잔씩을 얻어 마시고 나선 길은 이제 탄탄대로이다. 흐르는 물길을 따라 한참 내려가 구미정에 도착한다. 정선군 임계면 봉산리 골지천가의 넓은 암석 위에 세워진 구미정은 규모는 열 평 정도로 조선 숙종 때 이조참의를 지냈던 이치가 기사사화를 피하기 위해 이곳 봉산리에 은거하면서 세웠다고 하는데 기암절벽 위에 세워진 그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이 정자를 중심으로 주위의 경치가 아홉 가지 특색이 있다고 하여 구미정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항상 물고기가 많이 모인다고 하여 어량漁梁, 주위의 밭두렁이 그림보다 아름답다는 전주田疇, 주위에 있는 바위들이 섬과 같이 아름답다는 반서盤嶼, 주위 곳곳에 쌓아올린 돌층대의 아름다움인 층대層臺, 정자 한편에 위치한 연못이 바위가 뚫려 생긴 것이라 하여 붙여진 석지石池, 바위 하나의 넓이가 백 평 이상이 되고 평평하여 붙여진 평암平巖, 주위를 굽이쳐 흐르는 강물이 연못물같이 항상 잔잔하다는 징담澄潭, 주위의 기암절벽이 바위옷 이끼로 항상 푸르게 보인다는 취벽翠壁,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가 연이어 있어 아름답다는 열수列峀가 그것이다. 또 이곳을 중심으로 18경을 얘기하기도 한다.(...) 이곳 반천리의 노일 남쪽에는 산이 성처럼 높다고 하여 성북동이라는 마을이 있고, 어전 서쪽에는 서낭당 옆에서 달을 바라보면 다락 위에서 달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 하여 월루라는 마을이 있다. 나는 이 집 주인어른이신 변상철(73세) 옹에게 이곳저곳 지명들을 물어본다. 도둑골이 어디쯤이냐고 묻자 월루마을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그가 도둑꼴인디 도둑놈들이 망을 보다가 사람이 오면 뛰쳐나와 도둑질을 했다는 큰바위가 있어요. 바위가 하도 커서 이 집만이나 하지." 주인의 사위인 이장수 씨가 대화에 끼어든다. "요즘 환경 환경 하는데 사실 개판이에요. 동네사람들이 강가에다 염소를 매는 건 용납이 안 되고 상수원 보호구역 꼭대기에다 규석광산 허가를 내주는 건 괜찮대요, 가보세요, 산을 어마어마하게 마구 깎고 있어요. 엄청 많은 돌을 캐고 있죠. 설령 환경을 오염시키는 줄 모르고 허가를 내주었다고 하더라도 정선 사람들이 먹고 있고 한강의 본류인데 지금이라도 그 광산개발을 중지해야 할 것 아닙니까? 비가 오면 그 물들이 어데로 갑니까? 그 물이 한강으로 내려가지요. 그곳이 바로 정선소수력발전소 앞이에요."(...) 여정은 규석광산에 도착한다. 한강 상류의 푸른 산허리를 저렇게 발가벗긴다는 것이 잘못이라고 판단된 이상, 지금이라도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려야 할 것이 아닌가.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수없이 쌓인 바위들은 모두 대리석들이었다. 노다지가 별건가. 어렵게 얻은 노다지를 누가 내놓겠는가. 봉정광업소 출입구는 커다란 바위 두 개로 출입이 통제되고 그 옆에는 「상수원보호구역입니다. 정선군수, 정선경찰서장」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광업소를 돌아나오며 강 건너를 바라보니 '주식회사 정선소수력발전소'가 보인다. 저 아래로 흐르는 물은 봉정광업소에서 흘러나오는 폐수들과 뒤섞인 채 한강으로 흐를 것이다. 새치교를 지난 물길은 다시 넓고 깊게 흐른다. 새치마을에도 봄 풍경이 완연하다. 푸릇푸릇한 풀들 위로 거름 포대들이 띄엄띄엄 놓여져 있지만 빈 집들은 이 마을도 예외가 아니다. 바라보기 민망할 정도로 허물어져가는 저 빈 집들의 돌담들이여! 그래 내 어린 시절 우리 집의 돌담들도 저렇게 쌓여 있을 것이다.(...) 우리는 드디어 아우라지나루에 닿는다. 아우라지는 정선군 북면 여량리의 한강 상류에 있는 나루터로, 평창군 도암면의 황병산과 구절리에서 흘러내린 송천과 동쪽에서 흘러온 임계천이 합류하는 곳이다. 이 아우라지의 뱃사공이 부르던 노래가 정선아리랑이었다. 정선아리랑, 즉 정선아라리가 처음 불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왕조 초기부터였다고 한다. 고려 왕조를 섬기고 벼슬에 올랐던 선비들 중 7명(전오륜, 고천우, 김충한, 변귀수, 김한, 이수생, 신안)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을 다짐하면서 깊은 산골인 개성의 두문동에 은신하다가 지금의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居七賢洞으로 옮겨 살며 지난날 섬기던 임금을 사모하고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들은 멀리 두고 온 고향의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본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애달프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한시를 지어 읊었는데 이것이 정선아리랑의 시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상철 임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또다른,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옛날 여량리에 사는 처녀와 아우라지 건너편 유천리에 사는 총각이 연애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동백을 따러 간다는 구실로 유천리에 있는 싸리골에서 서로 만나곤 하였다. 그러나 어느 가을에 큰 홍수가 나서 아우라지에 나룻배가 다닐 수 없게 되자 그 처녀는 총각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정선아리랑 가락에 실어 부르게 된 것이란다. (...) 말을 흔히 쓴다. 「조계종 기도 도량 옥갑사 800m」라는 팻말이 서 있지만 찻길도 없다. 강은 이곳에서 소리도 없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우리는 강길을 따라 걷던 길을 멀리하고 철길을 따라 걷는다. 철길을 따라 걸으며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만날 수 없는 양쪽의 철길 위를 누가 오래 걸을 수 있는가, 누가 이쪽저쪽을 잘 뛰어넘는가 하는 시합을 하곤 했었지. 나는 소나무가 휘늘어져 있는 철길 위에 퍼지르고 누워 김지하 시인의 시 한 편을 떠올린다.(...) 이곳 나진리에서,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와 진봉 남쪽 계곡에서 발원한 오대천(61.25km)이 한강으로 합류한다. 새마을기가 펄럭거리는 나진교 아래로 오대천은 흘러내리고 철길 너머로 돌너와를 덮은 빈 집 한 채가 있다. 남평리에서 강은 휘돌아가고 강 우측으로 야미동이 있다. 여울져 흐르는 강물 위에 한 쌍의 물오리가 한가롭게 떠다닌다. 강 건너로 남평 본동 마을이 보인다. 남평교를 지나며 원주 99km, 정선 7km라는 표지판이 나타나지만 강길은 휘돌아가기 때문에 아직도 정선까지는 멀다. 시냇물에는 멈춰선 물길이 없다 강이 강답게 흐르는 강가로 내려가 배낭을 벗고 양말까지 벗은 채 강물에 발을 담근다. 물은 시원하고 부드럽다. 약한 듯 강한 듯싶은 이 물을 노자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낯선 곳에서 만난 남난희 씨 강은 더없이 아름답고 조금 내려가자 인도 기행 전문인 혜초여행사가 운영하는 정선자연학교가 나타난다. 조금 쉬었다 가기 위해 나무 그늘 밑에 배낭을 내려놓는데 관리인인 듯싶은 사람이 다가온다. 어딘가 낯익다 싶어 자세히 보니 웬걸 부산 금정산을 출발 낙동정맥을 지나 진부령까지 백두대간을 최초로 종주했던 여성 산악인 남난희 씨였다. 우리가 청학동과 섬진강 일대를 답사할 때 청학동의 찻집 '백두대간'에서 만나고 헤어졌던 남난희 씨를 이곳에서 만나다니. 김성규 씨는 남난희 누님이라고 반색을 한다.(...) 구정선교를 지나자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환영 정선 오일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선읍 이장단 협의회」 그럴 법도 하다. 2, 7장으로 서는 정선 오일장에는 서울에서 생활 관광차 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선 읍내의 오일장에는 정선군 일대에서 채취된 산나물들이 다 쏟아져나온다. 참취, 곰취, 며느리취, 나물취, 참나물, 누롯대, 참두릅, 개두릅, 더덕, 고비, 도라지 등의 나물도 좋지만 무엇보다 정선 여행의 별미인 콧등치기와 올챙이국수를 맛볼 수 있다. 콧등치기는 일종의 메밀국수다. 메밀을 반죽하여 국수를 만든 것인데 올챙이국수에 비해 끈기가 있고 단단하여 국숫발이 물에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육수에 된장을 살짝 풀고 깨소금 양념을 하여 먹는데 맛이 좋아 급히 빨아들이다 보면 국숫발이 살아 콧등을 친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올챙이국수는 찰옥수수를 갈아서 묽게 반죽을 하여 나무되 밑바닥에 구멍을 뚫고 밭아낸 것이다. 찰기가 적어서 국숫발이 부슬부슬 끊어지는데, 갖은 양념을 하여 묵처럼 말아서 숟갈로 떠먹는다. 하지만 옛 시절 정선의 명물이었던 꿩꼬치산적 같은 음식은 아쉽게도 찾아볼 수가 없다.(...) 길이라는 것이 그렇다. 지도에는 분명히 길이 있음에도 그 길이 끊어지는 경우가 있고 지도에는 없는 길이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국립지리원에서 만들어진 지도가 이러할 진대 다른 지도야 말해 무엇하랴. 국립지리원도 새로 만들어지는 길 없어지는 길을 발 빠르게 표시해 줘야 길 가는 사람들이 헤매지 않을 것이다. 발 아래 펼쳐진 세대마을은 알맞게 휘늘어진 조선 소나무와 황토밭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해 내고 있다. 생탄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 한 씨족이 와서 개척했다는 세대마을을 지나 강은 용탄리로 흐른다. 용탄리로 향하는 포장도로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목적지까지는 한 시간 남짓 더 걸어가야 한다. 일행들의 뒷모습만 보고도 지쳐 있음이 보인다. 드디어 용탄리에 도착,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고 있는 사이 남난희 씨가 그의 아들 기범이를 앞세우고 데리러 온다. 그들이 너무나 반갑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