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홍매가 아름다운 순천 선암사에서 동백꽃이 흐드러지는 광양의 옥룡사까지

산중산담 2019. 6. 26. 15:16


홍매가 아름다운 순천 선암사에서 동백꽃이 흐드러지는 광양의 옥룡사까지

홍매가 아름다운 순천 선암사에서 동백꽃이 흐드러지는 광양의 옥룡사까지

 

벌써 봄입니다. 제주에서는 유채꽃, 수선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이른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렸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기해년 봄에 꽃을 보러 남도로 갑니다.

절집과 홍매화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선암사와 굴목이재 너머에 있는 송광사, 그리고 역시 홍매화가 아름다운 금둔사와 낙안읍성을 지나 동백꽃이 화사한 광양의 옥룡사와 풍수지리학의 원조인 도선국사의 발자취와 광양지방의 문화유산을 돌아보는 여정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조계산 서쪽 기슭인 송광면 신평리에 자리 잡은 송광사(松廣寺)는 한국 불교 조계종의 본산이며, 조선시대 초기까지 보조국사 지눌과 진각국사 혜심(瞋覺國師 慧諶)을 비롯한 국사 열여섯 명을 배출했던 곳으로 의 통도사와 의 해인사와 더불어 의 절로 꼽혀 이 나라의 세 보배 사찰에 든다. 그런 옛 전통을 이으려는 듯이 이 절에 깊숙이 틀어박혀 수도에만 몰두하는 스님들이 적지 않다.

이 절터는 원래 신라의 혜린(慧璘)스님이 길상사(吉祥寺)라는 조그만 암자를 지었던 곳인데 고려시대인 1204년에 보조국사가 그곳에 절을 크게 일으켜 세우면서 송광사가 되었다. 여러 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특히 한국전쟁 때에 옛 절간은 거의 다 불타 없어졌다. 한때는 크고 작은 절간이 72채나 딸렸을 만큼 컸던 이 절이 근래 들어 많이 복구되었다. 송광사에는 국보 3, 즉 목조삼존불감(木造三尊佛龕 국보 제42)고려 고종의 제서(梯書 국보 제43)국사전(國師殿 국보 제56)을 비롯하여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經疏)?(보물 제90)와 금동 요령(金銅搖鈴 보물 제176) 같은 보물 12점을 간직하고 있어 절의 오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한편 조계산의 동남쪽 기슭인 쌍암면 죽학리에는 태고종의 본산이며 보물 400호로 지정된 쌍무지개 다리, 즉 승선교(昇仙橋 보물 제400)로 유명한 선암사(仙巖寺)가 있다. 백제 성왕 때인 서기 529년에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지었던 그 근처의 한 암자에서 역사가 비롯되었고 고려 때에 대각국사(大覺國師)의 힘으로 크게 중창되었다고 알려진 이 절은 일주문팔상전대웅전원통전불조전 같은 32채의 건물들도 아름답지만 병풍처럼 둘러쳐진 조계산의 풍광을 보배로 삼고 있다.“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가 이 산의 지세가 왕성함을 보고 이 산에 머무르며 옥룡사(玉龍寺)와 중흥사를 창건하고 그의 나이 일흔 둘에 이 절에서 입적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옥룡사玉龍寺 : 백계산에 있으니 당나라 함통咸通 5년에 도선道詵이 세웠다. 최유청崔惟淸이 지은 비문에, “의 휘는 도선이요, 속성은 김씨이니 신라 영암靈岩 사람이다. 그 세계世系의 부조父祖는 역사에 전하지 않는데 어떤 이는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서손庶孫이라고 한다. 어머니 강씨가 꿈에 누가 구슬 한 알을 주면서 먹으라고 하더니 드디어 태기가 있어, 달이 차자 소찬을 먹고 오직 불경을 외우고 염불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아기를 낳자 보통 아이와 다르더니 15세에 이르자 총명하여 숙성했고 겸해서 기예技藝를 통했다. 드디어 머리를 깎고 월산月山 화엄사華嚴寺에 놀았는데, 여러 해가 되지 않아 문주文珠의 신묘한 지혜와 보현普賢의 깊은 행을 모두 빠짐없이 터득하니 학도들이 모두 신총神聰이라고 말했다. 문성왕文聖王 8년에 이르러 나이 20세가 되자 갑자기 혼자 생각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법을 떠나서 스스로 고요하게 지날 것이지 어찌 한 골로 글자만 지킨단 말이냐.’하였다. 이때 혜철惠澈은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 법통을 전해 받아서 동리산桐裏山에 법석法席을 열었다. 사는 이에 선문에 들어가 제자가 되기를 청해서 이른바 설함이 없는 설법과 법이 없는 법을 허심으로 받고 투철히 깨달았다. 나이 23세에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이미 불법의 깊은 뜻을 통달하자, 다니는데, 일정한 곳이 없어 구름과 안개를 밟고 샘과 돌을 구경하며 그윽한 곳을 찾고 경치를 좇아 일찍이 게으르거나 쉬지 않았다. 혹 운봉산 아래에 동굴을 뚫고 좌선하기도 하고 혹은 태백암太伯岩에 옛 절이 있으니 옥룡사이다.

사는 놀러 다니다가 여기에 이르러서 그 그윽한 경치를 사랑하여 당우를 수리하고 깨끗이 개축하여 일생을 마치려는 뜻이 있어서 좌선하여 말을 잊은 지 35년이었다. 헌강왕憲康王이 그 높은 덕을 공경하여 사신을 보내 맞아다가 궁중에 머물러 두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서울에 있는 것을 즐거워 하지 않고 돌아갈 것을 간청하여 본사로 돌아갔다. 갑자기 하루는 제자를 불러 말하기를, ‘내 장차 가리로다. 대개 인연이 있으면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가는 것은 이치에 떳떳함이니 무엇을 슬퍼하리오.’하고, 말을 마치자 입적하니 때는 대당 광화光化 원년 317일이요 나이는 72세였다.”하였다.

 

백계산은 도솔봉 남쪽에 있는 작은 산으로 그 형세가 지네가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모습 또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알려져 있는데 옥룡사는 폐사가 되었지만 그 아랫자락에 도선국사가 비보를 위해 심었다는 동백나무숲은 지금도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정인지(鄭麟趾)는 그의 시에서 세월이 도중에 저물으니 산과 내 말 위에서 나누이네. 연기 낀 마을에 푸른 대 많고, 가을 들에 누른 구름누른 곡식자욱하네. 술을 잡으니 마음 오히려 장해지고, 글을 보니 눈이 어두우려 하네하였고, 이발(李潑)하늘이 개니 산은 달을 토하고, 바다가 어두우니 물이 구름에 연했네.”하였던 곳이 광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