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걸으면 기분이 좋고 건강해지는 장성 편백나무 숲을 거닐고, 정읍 갈재를 넘다

산중산담 2019. 6. 26. 15:19



걸으면 기분이 좋고 건강해지는 장성 편백나무 숲을 거닐고, 정읍 갈재를 넘다.

걸으면 기분이 좋고 건강해지는 장성 편백나무 숲을 거닐고, 정읍 갈재를 넘다.

 

어느 때나 가서 걸으면 몸과 마음이 평안해지고, 이런 저런 생각이 정리 되는 길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장성 편백나무 숲 사이를 거니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을 다 내려놓고 걷는 장성 편백나무 숲을 거닐고, 장서의 필암사원, 그리고 원덕리 마애불과 갈애바위를 보고, 갈재를 넘습니다.

꽃 피는 봄 날 장성의 편백나무 숲길과 필암서원, 그리고 천천히 넘어가는 갈재가 역사의 고개로 고증되어 문화재청이 지정한 명승이 됩니다.

 

가끔씩 등산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문수산(630m)은 고창의 진산 방장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여러 봉우리를 지나 양고살재, 솔재, 검곡재를 이루고 전 남북을 가르며 뻗어 내린 곳에 우뚝 솟은 산이다.

문수사에서 길은 나라 안에 소문이 자자한 장성 편백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추암리는 추서와 충암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추서에는 고려때 글씨로 유명한 운묵雲黙스님이 만든 석탑石塔과 큰 석종石鐘이 있었다는데, 그 종을 일제 때 일본인들이 가져갔다는 취서사터가 남아 있다. 추암리 망월리는 망월암望月庵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이곳 추서리로 부르는 취서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마을을 없앴던 곳인데 현재 드문 드문 있는 집들은 그 뒤에 새로 된 마을이다. 망월 북쪽에 있는 백련白蓮마을에 백련암의 터에는 백련암의 축대만 남아 있고, 백련 북쪽에 있는 골짜기에는 백련암의 법당터가 남아 있다. 백련 북쪽에서 전북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너무 가팔라서 오르는 것이 되다는 뜻을 지닌 된재이다

이 고개를 넘고 조림왕 임종국씨가 심은 편백나무 숲길을 따라서 넘는 길이 나라 안에서도 가장 아름다우면서 걷고자 하는 길입니다.

전라북도 정읍사람들이 남도를 오고자 할 때 넘어야 했고 남도사람들이 서울길을 갈 때 꼭 넘을 수밖에 없었던 가재는 높이가 276미터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라 안에서 제법 험한 고개로 알려져 노령(勞岺)으로도 불리며, 여러 전설들이 생겨났다.

 

갈애바위의 전설

이 고개 바로 아래에 지금은 호남고속도로가 지나는 호남터널이 있고 바로 아래 왼쪽 산 능선을 바라보면 윗부분에 마치 사람의 눈썹과 콧마루처럼 선이 파인 바위가 보인다. 바로 미인바위, 또는 갈애의 전설이 얽힌 갈애바위이다.

 

정읍에서 장성으로 들어올 때 꼭 넘어야 되는 북쪽 갈재는 전라남도의 관문으로, 조선시대에는 부임하는 관리도 넘고 봇짐장수도 넘고 귀양 가는 죄인도 넘고 과거 보러 가는 선비도 넘던 길목이었다. 오가는 길손들이 쉬어 가던 갈재의 주막집에는 갈애라 불리는 딸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뒷산 미인바위를 둘러싼 영롱한 구름 속에서 예쁜 처녀가 나와 치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는 딸을 낳았는데, 그 때문인지 갈애는 너무나 예뻤다. 숱한 선비들이 갈애에게 넋을 잃었고 장성현감까지 갈애에게 홀려 공사를 돌보지 않고 공금까지 탕진했다. 나라에서는 이 일을 바로잡기 위해 장성으로 어사를 보냈지만, 그 어사마저 갈애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어사와 갈애를 처벌하기 위해 또 선전관을 보냈다. 장성에 도착한 선전관은 어사와 갈애가 자는 방에 뛰어들어 어사의 목을 베고서 갈애의 얼굴을 내리쳤다. 그때 갑자기 음산한 바람이 일고 공중에서 여인의 울음소리가 나더니 자리에 핏자국만 남긴 채 갈애는 사라져버렸다. 그 후로 미인바위의 오른쪽 눈썹이 칼에 맞은 듯 찌그러졌다고 한다.

그곳에 얽힌 전설이 또 하나 있는데 다음과 같다.

조선 초기에 살았다는 갈이라는 기생은 아름답고 총명하였으나 출생이 미천하여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매일 미인암 앞에서 빼어난 미모로 지나가는 많은 선비들을 현혹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선비 하나가 갈이를 보고 요사스러운 계집은 없어져야 한다면서 그녀를 칼로 내리쳤다. 그 뒤 미인암은 갈이바위로 불리게 되었다. 또 다른 얘기로는 이 바위 때문에 이 지방에는 미인이 많이 나지만 풍기가 문란하다면서 정으로 바위의 눈을 파버리는 바람에 지금도 이곳에서는 미인이 많이 나지만 애꾸가 많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고개 말고도 장성군에는 험한 산들이 만들어 놓은 고개가 많다.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는 이러한 장성의 지형이 용 두 마리가 고을을 감싸고 있는 것 같다고도 하고 좌청룡 우백호(左靑龍右白虎)’의 지세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암행어사 박문수는 산수가 좋기로는 첫째가 장성, 둘째가 장흥이라고 했다는 말도 전해온다. 그래서 장성사람 중에는 이곳에서 굵직한 인물들이 많이 나온 것이 명당이 많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백제 때 이름이 고시이현(古尸伊縣)이고, 고려 때 지금의 이름을 얻은 장성군을 조종생(趙從生)산이 둘러 있고, 물이 굽이쳐 흐르니, 하늘이 이룬 것이네.(山回水曲自天成)”라고 하였고, 노숙동은 한 조각 용천은 푸른 비단을 끌고, 천 길 대악은 푸른 하늘에 솟았네라고 노래하였다.

장성에는 선비 정신의 맥을 잇는 여섯 군데의 서원이 남아 있다. 그 중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모신 고산서원과 하서 김인후를 모신 황룡면 필암리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망암(望菴) 변이중(邊以中)을 모신 장성읍 장안리의 봉암서원(鳳巖書院)은 장성사람들의 선비정신의 맥을 이어주고 있다.

또 장성군은 조선시대 초기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왕자의 난을 피해서 지금의 황룡면 맥호리에 숨어 살았던 울산 김씨 집안의 하서(河西) 김인후가 살았던 곳이다. 김인후는 태극도설이라는 독자적인 학설을 내세웠던 빼어난 성리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성균관의 대성전에 모셔져 있는 이 나라 열여덟 현인 중 전라도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속해 있어 전라도 사람과 장성 사람들에게 큰 긍지를 갖게 하는 인물이다.

중종 5(1510)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던 김인후는 열 살 때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513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황 등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홍문관 부수찬을 지내는 등 벼슬길에 나아가기도 하였으나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와 성리학을 연구하며 평생을 보냈다. 학문에 있어서는 특히 성()과 경()을 중히 여겼고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집 앞은 인근 여러 고을에서 배움을 청하러 온 선비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그 가운데는 송강 정철도 있었다. 그는 1796(정조 20)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정읍과 장성 사이 갈재에서 보낸 하루

정읍과 장성 사이 갈재에서 보낸 하루

 

<천 년의 길>, 방송 2회분을 촬영하기 위해

장성과 정읍 사이 갈재 부근을 다녀왔다.

못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잘 생긴 것 같기도 한

원덕리 미륵이 있는 절에

수선화, 개불알꽃, 매화 등,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이제야 꽃망울을 터트리는 목련꽃나무에는

까치 집 두 채가 있었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한 듯 보이지만,

다시 보면 어수선한 것이 세상인데,

그래도 시절은 봄이라 온통 세상이 봄인데,

갈재 마루에 불던 바람, 그 바람이 봄바람이었는지,

다시 올 겨울바람이었는지,

하루 종일 춥고, 을사년스럽던 하루였다.

더구나 오랜만에 찾아간 보천교 본부에는

사람의 그림자는커녕,

추억 속의 사람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가고 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당연한 일인데도 가버린 것들은 왜 그렇게도

쓸쓸하고 안쓰러운 것인지,

 

공자가 초나라에 갔을 때, 접여接輿라는 미친 사람이

그의 숙소 문 앞을 오가며 노래를 불렀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덕이 어찌 쇠했는가,

오는 세상 기다릴 수 없고,

간 세상 되잡을 수 없지,

세상에 도 있으면 성인 일 이루나,

세상에 도 없으면 성인 그냥 살아갈 뿐,

지금 같은 이 세상,

벌 면하기 어렵구나.

복은 깃털처럼 가벼우나

화는 땅처럼 무거우나,

피할 줄을 모르네.

그만두오, 그만두오,

덕으로 날 대하는 일,

위태롭다, 위태롭다. 땅에 금을 긋고,

그 안에서 종종걸음,

가시나무여, 가시나무여,

내 가는 길 막지마라. 내 발길 구불구불

내 발을 해코지 마라.

산에 있는 나무는 스스로를 자르고 등불은 스스로를 태운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없어 잘리고,

옻나무는 쓸모없어 베인다.

사람들 모두 쓸모 있음의 쓸모(유용지용有用之用)’는 알아도

쓸모없음의 쓸모(무용지용無用之用)은 모르고 있구나.”

 

어떤 사람은 이 글을 보고 접여라는 사람이 자신의 자화상을

쓴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람을 두고 인습因習을 등진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정신적으로 어떤 경지를 넘어선 사람을 두고 이 세상에서는

정신병자나 바보 천치, 또는 미친 사람, 광인狂人이라고 평한다.

제 정신을 갖고 살기가 어려운 것이 이 세상이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이야기

? 매일 매일의 화두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항상 머물러 있는가라는 이야기다,

하긴 그 말도 맞다.

세상에는 즐거운 일들도 많고도 많은데,

왜 그리 슬픔과 죽음에만 천착하는가?

내 성격 탓일까?

아니면 지나온 세월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일까?

알 수 없다.

그 어떤 것이 쓸모가 있고, 쓸모가 없단 말인가,

다 사람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가고 또 가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