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한강 천 삼백리 길을 - 정선읍에서 영월군 영월읍 어라연을 지나 김삿갓면까지

산중산담 2019. 6. 26. 15:52



한강 천 삼백리 길을 한 발 한 발 걷는다.

세 번째,정선군 정선읍에서 영월군 영월읍 어라연까지



2019,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의 정기기행인 <천 삼 백리 한강을 따라 걷는다.> 세 번째 여정이 2019426()부터 428(일요일)까지 실시됩니다. 한강 천 삼백리 여정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인 동강을 걷게 될 이변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

 

문득 그리스 로마 신화의 망각의 강, 기억의 강이 떠오른다. 이문열의 소설 레테의 연가에서 레테는 저승 앞을 흐르는 망각의 강이다. 그 강을 건너면 현세의 추억들은 남김없이 사라진다는데, 이 강을 건너면 우리들의 기억 또한 사라지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아니면 망각의 강을 건넌 뒤에도 현세의 추억들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저승의 신 하데스 앞에 있는 걸상에 앉아 잊어버리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래 잊어버릴 줄 모르는 이 마음이 슬픔이요, 라는 구절을 나는 되 뇌이며 레테의 강이 아닌 조양강을 건너기로 작정하고서도 어제의 물 건넘이 너무 힘들었던 터라 주저하고만 있다. 괜찮을까?

나는 걱정이 되는데 마을주민은 "뭘 걱정하세요. 동네사람들은 술 마시고 비틀비틀 허면서도 다 건너가요. 아줌마도 건너가는데 장정들이 못 건너 가겠어요"라고 부채질한다. 하는 수 없지. 건너가 보자.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고 건너니까 건널 만하다. 어제보다 자갈도 덜 미끄럽고 물살도 세지 않다. 강폭이 넓어서일까? 그러고 보면 모든 것들이 사람 마음 먹기에 달렸다.

강물 속에 발을 담가서 그런지 발은 훨씬 부드러워졌다. 여울져 흐르는 강물 위로 광하교가 걸쳐 있고 그 위에 내방산은 푸르름으로 솟아 있다. (...)

 

그러나 정선아리랑을 연구하는 진용선 씨는 "옛 문헌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아우라지에서부터 동강이라는 말을 썼고, 표기도 지금의 동녘 동이 아니라 오동나무 동을 썼다"고 말한다. 영월읍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강, 서쪽은 서강이라고 쓴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였다는 것이다. 이곳 동강에는 열두 곳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

귤암리에서 가수리까지는 도로를 넓히는 공사가 한창이고 공사장을 지나자 모평마을이다. 광석나루 위쪽 조양강 물 가운데에 섬처럼 솟아 있는 바위가 섬바우이고 저 안쪽에 있는 망하마을은 광하리의 중심에 있는 마을이지만 물이 귀한 곳이다. 근처에 큰 강을 두고서도 이용할 수 없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라는 망하마을에서 평창군 미탄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비행기재이다. 원래 이름은 아전치였는데 이 고개가 하도 높아서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다 하여 비행기재라고 붙인 것이다.(...)

 

강길을 따라 걸을 수 없기 때문에 선택한 소사 거쳐 연포로 가는 길은 지루한 산길을 돌아가고 돌아가는 길이다. 연포 비지정 관광지 3km. 이 고개를 넘어가면 연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포는 아직도 멀고 건너 보이는 산으로는 옛 문헌에도 없는 아름다운 성인 고성산성이 보인다.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 지방 기념물 68. 이곳은 선인들의 호국이 깃든 산성의 옛터이다. 삼국시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신라의 세력을 경계하기 위해 이 산성을 쌓았다. 또한 산성에서는 청동기 시대 유물인 석축, 석검, 토기 등 선사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되고 있다. 높이 5.4m, 둘레 6.3m로 현재 네 곳에만 성곽의 일부가 존재한다. 해발 1,080m의 산 정상에 테를 두른 듯 둥글게 쌓은 산성으로 남쪽은 평창으로 통하는 험한 고갯길이며 서쪽은 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이다"라고 정선군지에 실려 있다. 하지만 이렇게 험한 지역에 성곽을 쌓을 수밖에 없었던 옛사람들의 그 절박했던(?) 심정을 어떻게 우리가 헤아릴 수 있을까?(...)

 

"행여 동강댐이 막아지면 보상이라도 받을라고 남아 있다가 요모양 요꼴이 됐어요. 다섯 집이 살다 다 떠나고 우리만 남았어요. 동감댐을 막는다니까 전라도 진안 용담 사람들이 올라와 가지고 보상받으면 반반씩 나누자며 배나무, 두충나무, 창출 등 수도 없이 심었어요. 심기 전에는 관광버스를 두 대 빌려서 용담댐 현지답사도 갔었어요. 나도 갔구만요. 저기에다 무엇을 심어 얼마를 받았고 저것은 얼마를 받았다고 하는데 안 심을 사람 얼마나 되겠어요. 그 사람들 여기 와서 고생 무지했어요. 그러다 동강댐 계획이 취소되니까 요즘에는 얼씬도 않고 있어요. 그렇다고 여그 사람들은 달리 방법도 없고 그래서 이렇게 있는 거예요." (...)

 

이학균 씨의 말에 의하면 뗏목이 줄지어 내려가던 1950년대 말 황새여울에서 죽거나 불구가 된 떼꾼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떼꾼들 사이에서도 이름났던 정선떼꾼 털보 김상식, 남한강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난봉떼꾼 최동칠도 여기서 죽었다고 한다.

"이 근방 사람들은 물길들을 잘 아니까 눈 감고도 끌고 가는데 다른 지역사람들은 많이 죽었어요. 물이 적을 때는 황새여울에서 머무는 기간이 열흘 이상 걸렸어요."

떼꾼들이 벌었던 떼돈도 근대의 일이지 조선시대만 해도 어렵고 힘든 게 떼꾼들이었다. 명종 때에 단양 군수를 지냈던 황준량이 오죽하면 "수변의 취락에서 목재를 운반하느라고 수많은 인력과 축력이 동원되어 그 폐해가 막중하다"고 상소를 올렸을까? (...)

 

보는 가뭄이라는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말이다.

길은 세 갈래 길이다. 문산나루터에서부터 래프팅으로 네 시간에 걸쳐 가는 길과, 민지동 뒷산에 올라 어라연 부근 동강 전경을 내려다보며 가는 길, 또 하나는 고개를 넘어 어라연으로 가는 길. 우리들은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을 선택한다.

나는 아침밥을 준비하고 있는 김천기 씨의 부인에게 언제부터 이 동강에 사람들이 들끓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사람들이 많이 찾기 시작한 것이 한 삼 년쯤 됐나요. 그전에야 여름 한철 젊은 사람들이 배낭에 텐트 가지고 와서 놀다가던 것이 고작이었죠." 그랬을 것이다. 동강에 댐을 만드느니 마니 또는 천연의 비경이 동강이니 하는 말들이 떠돌기 시작하면서 동강은 동강이 날 것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었고 그때부터 몸살이 날 정도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온 것이리라. (...)

 

동강의 절경 중 제1경으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어라연은 상선암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물길이 갈라져 흐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어라연에 관한 이야기가 이렇게 실려 있다.

 

어라연은 영월군 동쪽 거산리에 있다. 세종 13년 이곳에 큰 뱀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자꾸 이곳에서 변을 당하곤 했다. 하루는 그 뱀이 물가의 돌무더기 위에 허물을 벗어놓았다. 그 길이가 수십 척이고 비늘은 동전만하고 두 귀가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비늘을 주워 조정에 보고하니 나라에서 권극하라는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였다. 권극하가 연못 한가운데에 배를 띄우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그 뱀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후로는 이곳에 뱀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강 천 삼백리 길을 한 발 한 발 걷는다. 네 번째,영월군 영월군 어라연에서, 영월군 김삿갓면의 남한강까지

한강 천 삼백리 길을 한 발 한 발 걷는다. 네 번째,

영월군 영월군 어라연에서, 영월군 김삿갓면의 남한강까지,

 

2019,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의 정기기행인 <천 삼 백리 한강을 따라 걷는다.> 네 번째 여정이 2019524()부터 526(일요일)까지 실시됩니다. 한강 천 삼백리 여정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인 어라연에서 영월까지 그리고 청령포, 한반도 마을 등을 걷게 될 이변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

 

한가한 사람이 아니면 한가함을 얻지 못하니

한가한 사람이 바로 등한한 사람은 아니라네.``문가유림

3구간 첫날 아침은 흐르는 강물 소리와 함께 왔다.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들리고 안개 속에 부연 햇살이 내려앉아 있는데 흐르는 강물은 그다지 흐벅지지 않다. 어젯밤 동강 민박집의 김천기 씨의 말처럼 이십 년에서 삼십 년 사이 처음 보는 가뭄이라는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말이다.

길은 세 갈래 길이다. 문산나루터에서부터 래프팅으로 네 시간에 걸쳐 가는 길과, 민지동 뒷산에 올라 어라연 부근 동강 전경을 내려다보며 가는 길, 또 하나는 고개를 넘어 어라연으로 가는 길. 우리들은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을 선택한다

 

동강의 절경 중 제1경으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어라연은 상선암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물길이 갈라져 흐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어라연에 관한 이야기가 이렇게 실려 있다.

 

어라연은 영월군 동쪽 거산리에 있다. 세종 13년 이곳에 큰 뱀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자꾸 이곳에서 변을 당하곤 했다. 하루는 그 뱀이 물가의 돌무더기 위에 허물을 벗어놓았다. 그 길이가 수십 척이고 비늘은 동전만하고 두 귀가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비늘을 주워 조정에 보고하니 나라에서 권극하라는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였다. 권극하가 연못 한가운데에 배를 띄우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그 뱀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후로는 이곳에 뱀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처럼 이곳 어라연 부근에는 뱀들이 많다고 한다. 만지나루 뒷산에 오르다 보면 지금도 뱀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상선암, 하선암, 중선암이라는 세 개의 바위와 흐르는 동강 물줄기가 빚어낸 이 어라연의 이름에는 세 가지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라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 그 첫 번째이고, 물 반 고기 반일 정도로 물고기가 많아서 어라연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두 번째이고, 상선암에 나 있는 하얀 이끼가 물에 차면 마치 고기떼가 비늘을 반짝이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세 번째이다.

그러저러한 사연들 속에 전해오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으니 삼촌이었던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죽임을 당했던 비운의 임금 단종에 얽힌 이야기이다. 세조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단종의 혼백이 이곳저곳을 떠돌던 중에 어라연으로 오게 되었다. 단종의 혼백이 갈 곳을 잃어 멍한 채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자 물고기들이 모두 머리를 들고 단종의 혼백에게 눈물로써 이제 그만 제 갈 길로 가시라고 간청을 하였다. 그 정성을 받아들인 단종은 그 길로 태백산으로 들어갔고 그후 단오 때만 되면 아무리 날이 맑다가도 큰비가 내려 어라연 일대를 구슬프게 적신다고 한다.(...)

 

바위 위에 이름 모를 풀들이 돋아나 있고 강물에서는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나는 어라연의 아름다운 정경들에 넋을 잃는다. "나의 기쁨이 하도 커 그것을 남에게 전달하고 싶고 나의 마음속에 기쁨을 깃들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누구에게든지 가르쳐주고 싶을 때가 있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처럼 내가 바라보는 이 어라연의 풍경을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주면 좋으련만. 이제 동강은 된꼬까리여울로 구성진 소리를 내며 흐른다.

 

떼꾼들의 무덤 된꼬까리여울

물살이 너무 심하게 꼬이고 얽혀서 '되게 꼬꾸라진다'는 뜻으로 붙여진 악명 높은 된꼬까리여울은 황새여울, 범여울, 물여울, 황공탄여울과 함께 떼꾼들의 무덤 같은 곳이었다. 운이 좋아 제대로 빠지면 몰라도 운이 나빠 여울목에 뗏못이 휘돌고 있으면 뒤에 오던 다른 떼꾼은 뗏목의 가장 약한 부분을 슬쩍 치고 강 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서 가던 떼꾼과 마찬가지로 저승길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잘 알고 있는 뗏꾼의 뗏목이 된꼬까리여울에서 휘돌고 있으면 할 수 없이 같이 뗏목을 빼내고 나무들을 건져서 칡넝쿨로 다시 묶고 출발해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떼돈은 날아가버린 것이고 강변에 뗏목을 붙들어 맨 다음 전산옥 같은 주막에서 속 쓰린 하룻밤을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눈물로 사귄 정은 오래가지만

돈으로 사귄 정은 잠깐이라네

돈 쓰던 사람 돈 떨어지니

구시월 막바지에 서리 맞은 국화라

놀다 가세요 쉬다 가세요

그믐 초승달이 뜨도록 놀다 가세요

황새여울 된꼬까리에 떼 띄워놓았네

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 차려놓게나

 

 

저새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고갯마루에 앉아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는다. 강은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 움직임이 없이 흐른다. 비탈진 산기슭에 펼쳐진 붉디붉은 너른 밭들 그리고 우람한 느티나무와 소나무. 구부러지고 구부러진 채 산허리를 넘어가는 길들을 바라보니 소문공충집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오른다. "강산과 풍월은 원래 주인이 없고 오직 한가로운 사람이 바로 주인일 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마음 하나 가지고 한가롭게 강기슭을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꿈꾸지만 실제 나는 아름다운 마음은커녕 서둘러 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그저 느낌도 없이 걸어갈 때가 많으니, 정말 나는 언제쯤 후여후여 소리치며 아무런 계획도 없이 떠돌 수 있을까? 그래서 "한가한 사람이 아니면 한가함을 얻지 못하니 한가한 사람이 바로 등한한 사람은 아니라네"라는 문가유림의 시구를 이해하게 될까?(...)

 

정조의 태실이 있는 계족산

봉화 76km, 하동 11km 여정은 계족산鷄足山(880m) 아래를 지난다. 계족산에는 왕검성이 있고 정조대왕의 태실비가 모셔져 있다. 왕검성은 거란족의 잦은 침입을 막기 위하여 왕검이라는 장군이 쌓았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왕검의 어머니가 왕검과 그 누이에게 성 쌓기 시합을 시켰다고 한다. 아들에게는 돌로 딸에게는 흙으로. 그런데 딸이 먼저 쌓을 것 같아서 딸에게 독약을 먹여 죽였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둘레가 2,314, 높이가 19척으로 크게 가물면 마르기도 한다. 한곳의 샘과 다섯 간의 창고가 있다.”고 실려 있는 왕검성을 이곳 영월 사람들은 정양리 산성이라고 부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영월 고적조에 석책조 이천삼백십사척고십구척(石策條 二千三百十四尺高十九尺)”이라는 기록과 대동지지영월 성지조에 정양산 고성조 이천이백십사척(正陽山古城條 二千二百十四尺)”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이 성은 200362일 사적 제446호로 지정되었는데, 둘레가 771, 성벽의 높이 410m, 너비는 6m로 면적은 118,637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에서 연하리에 걸친 계족산에 축성된 테뫼식 산성인 이 성이 <여지도서>에도 정양산성으로 실려 있으며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왕검성이라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멀리 고씨동굴로 건너는 다리가 보인다. 임진왜란 때에 횡성 고씨 일가족이 이 동굴 속에 피신하여 난을 피한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굴 속에는 그때 밥을 짓기 위해서 불을 땐 그을린 흔적과 솥을 걸었던 자리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천연기념물 제219호인 이 고씨동굴은 석회동굴로 총 길이는 3,000m이고 주굴이 1,800m이며 나머지 굴이 1,200m쯤 된다. 굴 속으로 들어가면 넓은 광장 3, 4개가 있고 동굴의 지질연대는 4억 년 내지 5억 년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종유석과 석순의 전시장'이라고 부를 만큼 장엄한 경관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수많은 관광객들과 수학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고씨동굴을 눈앞에 두고 바람은 잔잔히 불고 아카시아 나뭇잎들은 살며시 흔들거린다. 일행들은 어서 쉬어야지 하는 일념 하나로 서둘러 걸어가다가 다리 아래 등나무 정자를 발견하고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오고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다본다.

이곳에서 태백 봉화 88국도와 단양 895번 지방도로로 길은 나뉜다. 각동교 아래로 래프팅하는 사람들이 보트에 몸을 실은 채 노를 젓고 있다. 남한강은 이제 옥동천을 받아들인다. 영월군 상동읍 천평리 구룡산 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영월군 하동면 대아리 맛밭까지 56km의 여정을 마치고 남한강에 합류하는 옥동천으로 인하여 남한강은 더욱 깊어지고 넓혀진다.

 

영월 동강에서 돌아와

영월 동강에서 돌아와

 

거의 이십 여일의 일정을 끝내고 돌아온 날 새벽에 비가 내린다.

하루 쯤 쉬었으면 좋으련만 오늘의 일정은

방송을 촬영해야 하고,

그것도 이미 정한 일이라 바꿀 수도 없다.

내리는 비, ‘한 번 젖으면 다시 젖지 않는다.’고 내가 누누이 말했지,

비 내리는 산길을 걸으며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문득 지나간 한강기행이 떠오른다.

 

떼꾼들의 무덤 된꼬까리여울

물살이 너무 심하게 꼬이고 얽혀서 '되게 꼬꾸라진다'는 뜻으로 붙여진 악명 높은 된꼬까리여울은 황새여울, 범여울, 물여울, 황공탄여울과 함께 떼꾼들의 무덤 같은 곳이었다. 운이 좋아 제대로 빠지면 몰라도 운이 나빠 여울목에 뗏못이 휘돌고 있으면 뒤에 오던 다른 떼꾼은 뗏목의 가장 약한 부분을 슬쩍 치고 강 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서 가던 떼꾼과 마찬가지로 저승길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잘 알고 있는 뗏꾼의 뗏목이 된꼬까리여울에서 휘돌고 있으면 할 수 없이 같이 뗏목을 빼내고 나무들을 건져서 칡넝쿨로 다시 묶고 출발해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떼돈은 날아가버린 것이고 강변에 뗏목을 붙들어 맨 다음 전산옥 같은 주막에서 속 쓰린 하룻밤을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눈물로 사귄 정은 오래가지만

돈으로 사귄 정은 잠깐이라네

돈 쓰던 사람 돈 떨어지니

구시월 막바지에 서리 맞은 국화라

놀다 가세요 쉬다 가세요

그믐 초승달이 뜨도록 놀다 가세요

황새여울 된꼬까리에 떼 띄워놓았네

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 차려놓게나

 

문득 강물 소리에 뒤섞여 떼꾼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했고

 

완택산 서북쪽에 있는 번재(번치)마을을 돌아가자 강 가운데 둥글바위가 있다. 일제 때 뗏목이 걸려 파손되는 일이 잦자 강 저편의 산과 연결되어 있던 것을 깨버렸다고 한다.”

 

신정일의 <한강 역사문화탐사>에 실린 글이다.

 

떼꾼들의 이야기가 서린 곳,

그리고 단종임금에 대한 이야기와 동강의 절경이

눈에 삼삼하게 어른 거리는 새벽,

그 강들은 지금도 유유히 흐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