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봄 걷기 학교, 천년 고도 경주에서 역사와 문화를 논하며 노닐다. 2019년 5월 녹음 무성한 게절 봄에 <봄 걷기 학교>를 실시합니다. 5월 3일(금요일)밤에 출발하여 6(월요일)일까지 3박 3일 동안 신라 천년 사직을 지켜 본 도시, 소나무가 아름다운 천년의 고도 경주로 갑니다. 경주 남산 종주와 감은사와 문무왕 수중릉이 있는 동해, 그리고 회재 이언적의 자취가 서린 독락당과 그를 모신 서원인 옥산서원, 그리고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선생의 고향이자 깨달음을 얻은 구미산 아래 용담정을 찾아갈 예정입니다. “오래 전 옛날 경주는 쉬벌이라고 불렀습니다. 맑고 깨끗한 시내가 흐르는 푸른 벌판의 맑은 시냇가에서 한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땅을 찾아온 두 신을 보았습니다. 한 신은 강한 근육에 우락부락한 남자 신이었고, 한 신은 부드럽고 고운 여자 신이었습니다. 처녀는 너무 놀라서 “저기 저 산 같은 사람을 봐라” 해야 하는 데, 그만 “저 산 봐라!” 라고 고함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비명에 놀란 두 신이 걸음을 멈추었고, 그 뒤로 다시는 발길을 옮길 수가 없어지면서 굳어서 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 산이 된 여신은 남산 서쪽에 아담하게 솟아오른 망산이 되었으며, 남자 신은 엑센 바위의 남산이 되었습니다. 그 남산 구석구석이 국보와 보물 창고인 남산 종주를 합니다. 경애왕릉과 삼릉을 지나 마애 선각 육존불상을 지나고 삼릉골 부처바위를 지나 상선암 마애석가여래불좌상을 만날 것입니다. 다시 길을 나서서 상사암을 지나 남산을 종주하다가 보면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던 용장사터에 이르고 용장사터 삼층석탑을 비롯 우수한 문화유산과 만나게 됩니다. 용장골을 내려가 다시 산길을 오르면 봉화골 정상에 닿고 그 아래에 신선암 마애불좌상(보물 제 199호)을 만나게 됩니다. 깎아지른 벼랑에 마치 신선이 구름을 타고 있는 듯한 신선암 마애불 아래 칠불암 마애석불이 있습니다. “경주의 진산은 남산인데, 신라 사령지四靈地 가운데 한 곳입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을 가지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하며 가뭄이 심하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이곳 남산을 비롯한 경주에 원효元曉스님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요석궁瑤石宮입니다. 신라의 승려 원효가 일찍이 말하기를,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줄 터인가, 하늘 고일 기둥을 내가 깎아 주겠네.” 라고 하였다. 태종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말하기를 , “이는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서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다는 말이다. 나라에 큰 어진 이가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이로움은 없다.”고 하였다. 그때 요석궁에 왕실의 과부가 있었다. 임금이 요석궁 관리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게 하였더니 원효가 남산에서 내려와 유교楡橋를 지나다가 요석궁 관리와 마주쳤다. 거짓으로 물속에 빠지니, 그 관리가 원효를 요석궁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대로 묵도록 했다. 과연 과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들이 바로 설총薛聰이다. 그 요석궁의 터는 향교 남쪽에 있고, 유교는 궁터의 남쪽에 있다. <여지도서>에 실린 글입니다. 이언적이 머물렀던 독락당과 옥산서원, 아름다운 이형탑인 정혜사지 탑이 있는 곳에서 동학을 창시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태어난 현곡면은 그다지 멀지 않다. 최제우는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의 갓질마을에서 1824년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해와 달이 밝은 빛을 발했고 구미산 봉우리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사흘을 울었다고 한다. 부모와 일찍 사별한 최제우는 삶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공부에 몰두했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던 최제우는 서른일곱 살 때인 1860년 세상을 구할 수 있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경4-3용담정(최제우 득도) 황홀한 경지 속에서 한울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치라”고 말한 한울님은 이어서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즉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천지는 알고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 곧 나이니라. 너에게 무궁무궁한 도를 내릴 것이니 이를 닦고 다듬어서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따르게 하며 덕을 펴라. 너로 하여 이 세상을 빛나게 하리라” 하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동학을 널리 펴기 시작한 최제우는 그로부터 3년 뒤인 1863년 12월에 경주에서 붙잡혔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의 남산과 경주의 이모저모, 그리고 소금강산과 경주 일대를 답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