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천 삼백리 길을 한 발 한 발 걷는다.
세 번째,정선군 정선읍에서 영월군 영월읍 어라연까지
2019년,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의 정기기행인 <천 삼 백리 한강을 따라 걷는다.> 세 번째 여정이 2019년 4월 26(금)부터 4월 28일(일요일)까지 실시됩니다. 한강 천 삼백리 여정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인 동강을 걷게 될 이변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
문득 그리스 로마 신화의 망각의 강, 기억의 강이 떠오른다. 이문열의 소설 「레테의 연가」에서 레테는 저승 앞을 흐르는 망각의 강이다. 그 강을 건너면 현세의 추억들은 남김없이 사라진다는데, 이 강을 건너면 우리들의 기억 또한 사라지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아니면 망각의 강을 건넌 뒤에도 현세의 추억들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저승의 신 하데스 앞에 있는 걸상에 앉아 잊어버리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래 잊어버릴 줄 모르는 이 마음이 슬픔이요, 라는 구절을 나는 되 뇌이며 레테의 강이 아닌 조양강을 건너기로 작정하고서도 어제의 물 건넘이 너무 힘들었던 터라 주저하고만 있다. 괜찮을까?
나는 걱정이 되는데 마을주민은 "뭘 걱정하세요. 동네사람들은 술 마시고 비틀비틀 허면서도 다 건너가요. 아줌마도 건너가는데 장정들이 못 건너 가겠어요"라고 부채질한다. 하는 수 없지. 건너가 보자.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고 건너니까 건널 만하다. 어제보다 자갈도 덜 미끄럽고 물살도 세지 않다. 강폭이 넓어서일까? 그러고 보면 모든 것들이 사람 마음 먹기에 달렸다.
강물 속에 발을 담가서 그런지 발은 훨씬 부드러워졌다. 여울져 흐르는 강물 위로 광하교가 걸쳐 있고 그 위에 내방산은 푸르름으로 솟아 있다. (...)
그러나 정선아리랑을 연구하는 진용선 씨는 "옛 문헌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아우라지에서부터 동강이라는 말을 썼고, 표기도 지금의 동녘 동東이 아니라 오동나무 동桐을 썼다"고 말한다. 영월읍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강, 서쪽은 서강이라고 쓴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였다는 것이다. 이곳 동강에는 열두 곳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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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암리에서 가수리까지는 도로를 넓히는 공사가 한창이고 공사장을 지나자 모평마을이다. 광석나루 위쪽 조양강 물 가운데에 섬처럼 솟아 있는 바위가 섬바우이고 저 안쪽에 있는 망하마을은 광하리의 중심에 있는 마을이지만 물이 귀한 곳이다. 근처에 큰 강을 두고서도 이용할 수 없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라는 망하마을에서 평창군 미탄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비행기재이다. 원래 이름은 아전치였는데 이 고개가 하도 높아서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다 하여 비행기재라고 붙인 것이다.(...)
강길을 따라 걸을 수 없기 때문에 선택한 소사 거쳐 연포로 가는 길은 지루한 산길을 돌아가고 돌아가는 길이다. 연포 비지정 관광지 3km. 이 고개를 넘어가면 연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포는 아직도 멀고 건너 보이는 산으로는 옛 문헌에도 없는 아름다운 성인 고성산성이 보인다.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 지방 기념물 68호. 이곳은 선인들의 호국이 깃든 산성의 옛터이다. 삼국시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신라의 세력을 경계하기 위해 이 산성을 쌓았다. 또한 산성에서는 청동기 시대 유물인 석축, 석검, 토기 등 선사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되고 있다. 높이 5.4m, 둘레 6.3m로 현재 네 곳에만 성곽의 일부가 존재한다. 해발 1,080m의 산 정상에 테를 두른 듯 둥글게 쌓은 산성으로 남쪽은 평창으로 통하는 험한 고갯길이며 서쪽은 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이다"라고 정선군지에 실려 있다. 하지만 이렇게 험한 지역에 성곽을 쌓을 수밖에 없었던 옛사람들의 그 절박했던(?) 심정을 어떻게 우리가 헤아릴 수 있을까?(...)
"행여 동강댐이 막아지면 보상이라도 받을라고 남아 있다가 요모양 요꼴이 됐어요. 다섯 집이 살다 다 떠나고 우리만 남았어요. 동감댐을 막는다니까 전라도 진안 용담 사람들이 올라와 가지고 보상받으면 반반씩 나누자며 배나무, 두충나무, 창출 등 수도 없이 심었어요. 심기 전에는 관광버스를 두 대 빌려서 용담댐 현지답사도 갔었어요. 나도 갔구만요. 저기에다 무엇을 심어 얼마를 받았고 저것은 얼마를 받았다고 하는데 안 심을 사람 얼마나 되겠어요. 그 사람들 여기 와서 고생 무지했어요. 그러다 동강댐 계획이 취소되니까 요즘에는 얼씬도 않고 있어요. 그렇다고 여그 사람들은 달리 방법도 없고 그래서 이렇게 있는 거예요." (...)
이학균 씨의 말에 의하면 뗏목이 줄지어 내려가던 1950년대 말 황새여울에서 죽거나 불구가 된 떼꾼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떼꾼들 사이에서도 이름났던 정선떼꾼 털보 김상식, 남한강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난봉떼꾼 최동칠도 여기서 죽었다고 한다.
"이 근방 사람들은 물길들을 잘 아니까 눈 감고도 끌고 가는데 다른 지역사람들은 많이 죽었어요. 물이 적을 때는 황새여울에서 머무는 기간이 열흘 이상 걸렸어요."
떼꾼들이 벌었던 떼돈도 근대의 일이지 조선시대만 해도 어렵고 힘든 게 떼꾼들이었다. 명종 때에 단양 군수를 지냈던 황준량이 오죽하면 "수변의 취락에서 목재를 운반하느라고 수많은 인력과 축력이 동원되어 그 폐해가 막중하다"고 상소를 올렸을까? (...)
보는 가뭄이라는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말이다.
길은 세 갈래 길이다. 문산나루터에서부터 래프팅으로 네 시간에 걸쳐 가는 길과, 민지동 뒷산에 올라 어라연 부근 동강 전경을 내려다보며 가는 길, 또 하나는 고개를 넘어 어라연으로 가는 길. 우리들은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을 선택한다.
나는 아침밥을 준비하고 있는 김천기 씨의 부인에게 언제부터 이 동강에 사람들이 들끓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사람들이 많이 찾기 시작한 것이 한 삼 년쯤 됐나요. 그전에야 여름 한철 젊은 사람들이 배낭에 텐트 가지고 와서 놀다가던 것이 고작이었죠." 그랬을 것이다. 동강에 댐을 만드느니 마니 또는 천연의 비경이 동강이니 하는 말들이 떠돌기 시작하면서 동강은 동강이 날 것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었고 그때부터 몸살이 날 정도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온 것이리라. (...)
동강의 절경 중 제1경으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어라연은 상선암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물길이 갈라져 흐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어라연에 관한 이야기가 이렇게 실려 있다.
어라연은 영월군 동쪽 거산리에 있다. 세종 13년 이곳에 큰 뱀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자꾸 이곳에서 변을 당하곤 했다. 하루는 그 뱀이 물가의 돌무더기 위에 허물을 벗어놓았다. 그 길이가 수십 척이고 비늘은 동전만하고 두 귀가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비늘을 주워 조정에 보고하니 나라에서 권극하라는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였다. 권극하가 연못 한가운데에 배를 띄우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그 뱀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후로는 이곳에 뱀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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