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삼척과 동해에서 준경묘와 영경묘 무릉계곡 등

산중산담 2019. 6. 26. 16:28



삼척과 동해에서 펼치는 2019년 여름걷기 학교,

 

2019년 여름걷기학교가 동해바닷가 고을인 동해와 삼척 일대에서 펼쳐집니다.

한국의 그랜드캐년이라고 불리는 통리협곡과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인폭포를 지나 죽서루지나 동해로 몸울 푸는 오십천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두타산 자락에 있는 천은사를 찾아갈 예정입니다. 소나무 숲이 아름다운 준경묘와 영경묘는 태조 이성계의 선조의 무덤이 있는 곳이고, 바로 가까운 곳에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남긴 천은사가 있습니다. 삼척을 지나 동해의 무릉계곡을 찾아갑니다. 용추폭포까지 이르는 길과 청옥산 자락의 길을 걸어 삼화사에 이르는 길을 걷고, 동해의 추암을 답사할 예정입니다.

 

통리는 사방에 산이 높고 그 가운데에 골짜기가 길게 형성된 것이 마치 구유처럼 보이기 때문에 유래한 지명이라고 합니다. 또 옛날 이곳에는 속이 빈 통나무가 많아 통나무의 자와 마을의 자를 따서 통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통리협곡이 있는 삼척 일대에는 고생대의 하부층인 조선누층군(朝鮮累層群)과 상부층인 평안누층군(平安累層群)이 분포한다. 중생대에 이들 지층의 약한 틈을 뚫고 거대한 화산 폭발이 일어난 후, 지각(地殼)이 함몰해 커다란 분지가 생겼다. 또한 여기에 강물이 흘러들어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었습니다. 통리협곡 일대가 호수였던 백악기 당시, 호수 바닥에는 장기간에 걸쳐 자갈·모래·실트·점토 등 다양한 퇴적물이 차곡차곡 쌓여 퇴적층을 이루었습니다.

이후 퇴적층은 융기했고, 하천과 바람에 의해 오랫동안 풍화와 침식을 받았습니다. 중생대 백악기의 퇴적층이 고생대 지층으로 둘러싸여 있는 통리협곡은 하천의 유로가 수없이 바뀌는 과정에서 서서히 형성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는 과거의 환경과 지형적 특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이곳에 아름다운 폭포인 미인폭포가 있고, 그레서 사람들은 이곳을 한국의 그랜드캐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준경묘와 영경묘.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숲이 있는 곳이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조선시대 태조의 5대조 목조(穆祖)의 부모 묘입니다.

2012712일 사적 제524호로 승격되된 준경묘는 목조의 아버지 양무(陽茂) 장군의 묘, 영경묘는 목조의 어머니 이씨의 묘입니다. 1899년에 두 무덤을 수축하여 제각, 비각을 건축하였습니다.

 

묘소 일대는 울창한 송림이 원시림 상태로 우거져 있는데 특히 이곳 송림은 황장목이라 하며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사용하였습니다. 전주이씨 실묘로는 남한에서 최고 시조묘이며 해마다 420일 전주이씨 문중 주관으로 제례를 지냅니다. 강원도기념물로 지정된 뒤 19848월에 삼척군(지금의 삼척시)에서 제각, 비각, 재실, 홍살문 등을 일제히 보수하였습니다.

묘에 관하여 목조가 한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百牛金棺)에 부모를 안장한 이후 5대에 이르러 조선(朝鮮)을 창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주는 아름다운 소나무 숲입니다.

 

삼척의 오십천과 천은사, 그리고 이승휴,

 

오십천이 휘돌아가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관동팔경 중 하나이며 보물 제213호 로 지정된 죽서루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죽서루는 객관 서쪽에 있다. 절벽이 천 길이고 기이한 바위가 총총 섰다. 그 위에 날아갈 듯한 누를 지었는데 죽서루라 한다. 아래로 오십천에 임했고 냇물이 휘돌아서 못을 이루었다. 물이 맑아서 햇빛이 밑바닥까지 통하여 헤엄치는 물고기도 낱낱이 헤아릴 수 있어서 영동 절경이 된다라고 하였다. 공민왕 때 강릉에 안겸사로 왔던 정추는 그 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죽서루 그림자 맑은 냇물에 일렁이며

못 위의 산 빛이 작은 누에 가득하다

가절(佳節)에 멀리 와 노니 느낌이 많아

석양에 가려다 다시 머뭇거린다

일찍이 황학루를 때려 부순 사람 있음을 들었더니

지금은 백구와 친한 사람 없음이 한스러워라

언덕을 끼고 붉은 도화 봄도 늙어가니

나팔 부는 소리는 진주(삼척의 옛 이름)를 찢으려 하네

 

죽서루는 고려 충렬왕 때 제왕운기를 지은 이승휴가 처음 지었다고 한다. 고 종 11년에 태어나 충렬왕 때까지 개성·강화·삼척을 전전하며 살았던 동안거사 이승휴는 감찰대부라는 높은 자리에 오른 뒤 기울어가는 고려 왕조를 일으켜 세 우기 위해 국정을 문란케 하는 친원 세력의 횡포와 충렬왕의 실정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충정이 반영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임금의 미움만 받게 되자 그 는 아무런 미련 없이 두타산 자락 지금의 천은사 자리에 용안당容安堂이라는 초 막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하며 제왕운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원나라의 지배 밑에 서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뿌리를 단군으로 귀착한 그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올바른 왕도의 길을 역설하였다. 이승휴는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와는 다른 각 도에서 역사를 보았고, 삼국유사에서조차 다루지 않은 발해사를 짧은 글로나 마 우리 민족의 역사로 다루었다. 두 권으로 된 제왕운기하권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요하 동쪽에는 한 건곤이 따로 있으니 뚜렷하게 중국과 갈라지고 구분된다. 큰 파 도 넘실넘실 삼면을 둘러싸고 북쪽에는 육지가 실같이 이어져 있다. 그 가운데 지방이 1000리 여기가 조선이니 강산 좋은 형세 그 이름이 천하에 퍼졌다. 밭 갈고 우물 파는 예의의 나라 화인이 이름 해서 소중화(小中華)라 일렀도다. 처음에 누가 개국해서 풍운 을 열었던고. 석제의 자손 그 이름이 단군이라.

 

이승휴가 죽은 뒤 100년이 지나지 않아 고려는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허물어지고 말았다.

 

두타산 자락의 무릉계곡,

 

두타산성 아랫길을 따라 쌍폭포와 용추폭포를 지나 넘는 박달재는 임계, 정선을 거쳐 서울로 가는 옛 사람들의 고갯길이었다. 그 길에는 호랑이바위, 베틀바위, 학소대, 벼락바위, 병풍바위, 번개바위, 문바위 등의 절경이 사람들을 기다린다. 두타산에 있는 삼화사三和寺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짓고 흑연대黑蓮臺라고 한 것이 효시지만, 경문왕 4년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의 개조인 범일 국사가 중창하여 삼공암三公庵이라고 한 때부터 뚜렷한 사적을 갖는다. 고려 태조 원년에 삼창되면서 세 나라를 하나로 화합한 영험한 절이라는 뜻으로 삼화사라 고 이름 지었다. 태조 이성계는 칙령을 내려 이 절의 이름을 기록하여 후사에 전 하게 하면서, 신인神人이 절의 터를 알려준 것이니 신기한 일이라 하였다. 삼화사 는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효종 때 중건하였으며 몇 차례의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지금 남은 건물로는 적광전과 약사전 그리고 요사채가 있으며, 문화재로 는 대웅전 안에 안치된 철불이 있다. 현재 국보로 심의 중인 이 철불은 삼화사 창 건 설화에 관련된 약사 삼불 가운데 맏형 격의 불상이라고 한다. 한편 대웅전 아 래 마당에 있는 높이 4.95미터의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제127)은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삼화사 일주문을 나서서 다리를 건너면 거대한 무릉반석이 나타난다. 1000여 명이 앉아도 너끈할 정도로 널찍한 너럭바위에는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글과 이 름이 새겨져 있다. 단종 폐위 이후 조선의 산천을 주유했던 김시습의 글도 있고, 조선 전기 4대 명필 중 하나인 양사언의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이라는 달필 속에는 무슨 계무슨 계 하며 계원들의 이름도 나온다. 그 이름들 속에는 조선시대 이 산에 숨어들었던 사람들을 잡기 위해 왔던 수많은 토포사들이 새겨놓은 이름들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신해 3년 또는 계미 3년 등 의 글자들과 함께 토포사 아무개라고 새겨놓았는데, 그들이 바위에 자신들의 이 름을 남기기 위해 쪼아댔을 날카로운 정의 끄트머리가 보이고, 내리치는 망치의 불꽃이, 스러지는 백성들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름을 보내기 가장 좋은, 계곡과 협곡, 그리고 아름다운 정자와 아름다운 강을 주제로 펼쳐지는 여름 걷기 행사에 많은 참여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