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한강 천 삼백리 길을 - 각동리에서 단양군 단성면, 충주시 가금면 중원탑까지

산중산담 2019. 6. 26. 16:24



한강 천 삼백리 길을 한 발 한 발 걷는다. 다섯 번째,영월군 김삿갓면 각동리에서 단양군 단성면까지

한강 천 삼백리 길을 한 발 한 발 걷는다. 다섯 번째,

영월군 김삿갓면 각동리에서 단양군 단성면까지

 

2019,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의 정기기행인 <천 삼 백리 한강을 따라 걷는다.> 다섯 번째 여정이 2019621()부터 623(일요일)까지 실시됩니다.

 

강 건너 건너던 맛밭나루에는 배 한 척이 매어 있고 하동초교 옥동분교는 청소년 야영장으로 바뀐 채 태극기만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다. 강 건너 저 산 너머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내려오는 형국이라는 오룡골이 있다고 하는데, 옛날에는 여러 집이 살았지만 지금은 한 집만 남았다고 한다. 다리도 없고 물도 건널 수 없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살아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괴목마을을 지나며 날은 흐려지고 길 위쪽에 물맛이 아주 좋은 샘골마을이 있다는데 지친 몸들이라 올라갈 기력이 없다. 드디어 여정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에 이른다. (...)

 

오사리마을에 도착하나 강을 따라 가는 길이 없어 고개를 넘을 수밖에 없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마지막 힘을 다 쏟아 활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넘어서 느티마을에 접어들자 강 건너 북벽이 보인다. 저 북벽 위에 자리 잡은 마을이 용이 올라갔다는 용진이고 그 나루터가 뗏목이 출발하는 용진나루터였다. “우수나 경칩에 물 풀리니, 남한강 뗏목이 떠내려간다.”라는 노랫말 속에 남아 있는 용진나루터에서 출발한 뗏배는 물길이 좋으면 서울 광나루까지 닷새나 이레 걸렸고, 물 사정이 나쁘면 아흐레에서 보름까지 걸렸다고 한다.(...)

 

저 아래 느티마을에서 원성리로 건너던 나루가 상리나루였다. 이 상리나루에서 온달장군을 장사지냈다고 한다. 온달이 죽은 뒤 아무리 힘을 써도 온달의 관이 움직이지 않자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길이 이미 갈라졌으니 마음 놓고 돌아가시오" 하니까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 온다. 그 북쪽의 강변에는 옛날 어느 장군이 들어다놓았다는 둔들바위가 있다. (...)

 

또한 이곳 영춘으로 1894년 당시 영국 왕실의 국립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한강의 배를 타고 올라왔는데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읍의 관아는 크고 불규칙하게 여기저기 서 있고, 훌륭한 출입문과, 해뜰 때와 해질 때에 관청이 열리고 닫히면서 귀가 먹을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북과 그밖의 기구들을 가지고 있다. (백성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훌륭한 관리'의 많은 돌비석, 하늘에 봉사한 희맹사들을 위한 넓은 터, 서원, 매우 더럽고 황폐해진 왕의 누각 등이 있다. 모두가 공손한 것은 아닌 군중들이 관청까지 우리를 따라왔는데, 나는 그곳에서 금강산까지의 길에 대한 정보를 얻기를 바랐다. 관아를 들어갈 때 하급 관리는 매우 오만했다. 잠시 동안 그의 불쾌한 행동을 참고 나서야 더러운 방으로 안내를 받았는데, 그곳에는 경멸적이고 악의 품은 얼굴을 하고서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또가 담뱃대를 옆에 두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동양에서는 개인 면담이 드물었기 때문에, 그가 하인을 통해 짧은 대답을 내릴 때까지 우리는 뒤에서 몰려드는 군중들의 압력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입구 바깥에 서 있었다. 이것이 내가 한국 관아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이다.

 

버드 비숍 여사가 왔을 무렵 그때 이곳 영춘군에는 1,500여 명쯤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한갓진 시골 면소재지일 뿐이다. (...)

 

온달산성 관광단지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산신당을 지나 가파른 길에 오르자 아침인데도 금세 땀은 온몸에 흐르는데 바람 한 점 없다. 뒤따라오는 진재언 씨는 "아무래도 온달장군은 전쟁하다 죽은 것이 아니라 이 산성을 오르다 숨이 막혀 죽었을 것이야" 하고 말한다. 정말 그 말이 일리가 있을 만큼 가파른 길이다.

몇 년 전 이 산성을 오를 때만 해도 보수가 한창이었는데 성은 번듯하게 쌓여져 있고 성을 올라가는 데에는 나무 사다리를 세워놓았다. 온달산성의 정상에는 미세한 바람이 불고 사람들은 미처 못 쌓은 성을 쌓느라 발파작업이 한창이다. 안개 속에 아스라한 저 아홉 개의 봉우리 저편에 우리나라에서 손 꼽을 만큼 큰 절인 구인사가 있고 그 뒤편에 소백산이 있다. (...)

 

강 건너 덕천마을은 안개 속에서 평안하게 들어앉아 있고 바로 그 아래가 여천리이다.

비숖여사의 <한국과 이웃나라들>에는, “ 한강 훨씬 상류의 매우 아름답고 호수처럼 생긴 지역에는 최근에 버려진 마을이 있었는데, 호랑이들이 계속해서 주민들을 물어갔기 때문이었다. ”고 실려 있는 곳이다. 여천리의 선돌산 중턱에 큰 바위가 호랑이 바우로 호랑이가 살았던 곳이며, 웃말 북쪽에 있는 구남골(九男谷) 호랑이가 아들 아홉 형제를 다 물어 갔다는 곳이다.(...)

 

돌고 돌아 단양팔경 중의 하나인 도담삼봉에 도착한 것은 늦은 420분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도담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에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지난 뒤 을사년 장마 때 이곳까지 흘러 흘러 왔는데 정선 땅의 관리들이 삼봉을 찾아 이곳으로 와서는 자기들의 것이라며 산세로 해마다 쌀 여섯 섬을 세금으로 걷어갔다. 그러던 어느 해 정선에서 관리들이 세금을 거두러 오자 정선의 한 아이가 나서서 "저 삼봉은 우리가 불러서 온 것이 아니고 제멋대로 온 것이요. 그렇게 중요하다면 도로 가져가시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정선 사람들은 세금을 물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후로도 정선의 떼꾼들은 영월, 단양을 지나며 이곳의 도담삼봉을 보고 우리 고향이라고 큰소리한다고 한다. (...)

 

신단양역에는 열차 한 대가 정차해 있고 길 아래 강변에는 짙푸른 초원지대가 펼쳐져 있다. 삼십여 년 전만 해도 저 푸른 초원이 펼쳐진 곳의 행정구역상의 지명은 단양군 단양면 중도리 시루섬이었다. 모양이 시루처럼 생겼고 시루떡처럼 모래자갈 등이 켜켜이 쌓여진 8만여 평쯤이 되는 시루섬은 퇴적호가 쌓이고 쌓여 단양에서 비옥하다고 소문난 땅이었다. 그런데 72819일 이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날 며칠간 비가 퍼붓더니 오후 3시쯤에 물에 완전히 잠기고 말았다. 그때의 상황을 박동중(55) 씨에게서 듣는다.

"잠종사업소에 근무하던 아가씨가 40여 명이 있었고 35가구 190여 명이 있었는데 방법이 없잖아요. 우선 잠종사업소 물탱크 우로 사람들을 올려보냈어요. 다 올려보내고 나니까 더이상 올라갈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남은 젊은 사람들은 소나무 우에로 올라갔지요. 동생하고 나하고 팬티바람에 같은 소나무에 올라가 '오늘 우리 죽는갑다' 했는데 다행히 우리가 매달린 소나무는 떠내려가지 않고 다른 소나무들은 떠내려가 버려 그날 밤 8명이 죽었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른 짐승들은 다 떠내려갔는데 소들은 섬 주위를 맴돌면서 한 마리도 안 떠내려갔어요. 그래서 소는 영물이다 생각했죠. 그 다음날 물이 빠지고 보니까 물탱크 우에 어린 아이 하나가 깔려서 죽어 있더라고요. 다음 날 도지사가 오고 내무부장관이 오고 해서 그 근방에다 집을 지었지요. 그런데 몇 달 후에 나이든 노신사가 찾아온 거예요. 누가 이곳에 집을 지으라고 했느냐 물어서 전후 이야기를 했더니 '당신들하고는 상관이 없구만' 하고 가더니 그 다음날 바로 단양 군수가 온 거예요. 그 사람이 땅 주인인데 남의 땅에 집을 지었으니 당신들이 해결해야 한다는 거예요. 밝은 대낮에 날벼락이라더니, 그래서 마을 몇 사람이 청와대를 찾아갔지요. 하여간 호랭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예요. 보상도 제대로 못 받고 떠나간 사람들 많았어요."

나는 박동중 씨의 말을 들으며 섬진강댐을 막으면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운암·정읍 사람들을 떠올렸고 동시에 용담댐의 보상 문제를 떠올렸다. 영악할 대로 영악해진 몇 사람들과 그 담당부서 직원들이 짜고 치는 화투로 A마을로 실사를 나간다 하는 정보가 돌면 BC마을 농기구들과 소, 돼지, 심지어 개들까지 A마을로 원정을 나갔다고 한다. 뿔이 괴상하게 구부러진 아무개네 집 소는 다섯 번에 걸쳐 보상을 받았다는데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

 

1978 16일 단국대 조사단이 적성산성을 조사하던 중 비 하나를 발견했다. 높이는 1m가 채 안 되고 윗너비 1m 가량, 아랫너비가 0.5m 남짓한 역사다리꼴 화강암 비는 발견 당시 지붕돌이나 받침돌 없이 비석만 땅에 묻혀 있었다. 예서에서 해서로 옮겨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국 남북조 초기의 글씨로 비문은 모두 440자 가량으로 추정되지만 288자가 남아 있었다. 그 내용은 진흥왕이 이사부, 이간, 내예부, 대야간, 무력 등 10여 명의 고관에게 일러 야이차의 공을 표창하여 앞으로도 야이차와같이 신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포상을 내리도록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비문에 씌어진 바로는 진흥왕 6년에서 11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남아 있는 비문에선 적성이라는 말이 세 번쯤 나오는데 그 당시 적성은 고구려 땅이었다. 그것을 보면 진흥왕 때에 적성현을 빼앗고 본격적인 거점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적성산성은 사적 제265호로 지정되어 있고 적성비는 국보 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단양군 단성면에서 충주시 가금면 중원탑까지

여섯 번째 떠나는 한강 도보답사,단양군 단성면에서 충주시 가금면 중원탑까지 

 

 

여섯 번째 떠나는 한강 천 삼백리 도보답사 여정이 712일에서 14일까지 23일 간에 걸쳐 실시됩니다.

장회나루에서 충주댐까지 한강 유람선을 타고 가다가 만나는 남한강은 또 다른 정취를 줄 것입니다.

퇴계 이황의 자취가 서린 단성면을 지나고 장회원에서 한강 유람선을 타고 충주댐까지 가고, 탄금대, 중원탑, 고구려탑까지 답사를 하며 걸어갈 이번 여정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여름이니까. 시원할 때 걷고 뜨거울 때 쉬며 휴식처럼 진행할 예정입니다.

 

하늘로 통하던 다리 우화교

영조 때 단양 군수였던 이기중이 1753년에 놓았던 것이 홍수로 떠내려가 다시 세울 때 쓴 비문에 "하늘로 통하는 길이요. 거울같이 맑은 물을 바라보면 신선인 듯하다"는 옛 사람들의 말을 인용, 날개가 달린 다리 즉 우화교라 했다. 경상도 지방에서 죽령을 넘어오던 사람들이, 숲이 울창하고 밑으로는 맑고 깊은 물이 흘러 그렇게 불렀었다고 한다.

72 년 당시의 큰 비에 단양이 생긴 이래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 이곳이었다. 정오가 넘어 우화교가 넘쳤고, 이어 136m까지 수위가 올라가 군청을 비롯, 농협, 등기소, 우체국이 물에 잠겼었다. 소와 돼지들이 떠내려가는데도 발만 동동 구르며, 높은 곳으로 몸을 피해야 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

 

오르막이 끝나고 내리막길에 접어든다. 이렇게 한 굽이 한 굽이 고개를 돌아가다 보면 그리운 선착장이 보일 것이다.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 맺힌 땀방울을 식혀준다. 월악산은 옅은 안개 속에 수줍은 듯 숨어 있고 단양팔경 구담봉, 옥순봉이 멀지 않다. 장회나루 1km를 두고 강 아래쪽에선 유람선이 돌아오는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는데 발목이 아프다.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그것도 내리막길을 걷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열 걸음을 걷는 동안에 아홉 번을 뒤돌아본다

드디어 장회나루에 도착한다. 충주호 관광선을 타고 충주나루까지는 2시간 거리. 눈부신 햇살 아래 삼층에 자리를 잡는다. 한쪽 끝이 풀어진 태극기는 오늘도 역시 바람에 펄럭거리고 몇 척의 유람선이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다.

떠나고 돌아오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세상이리라. 어라연에서 장회나루까지 85km,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니었다.

우리들이 한 발 한 발 걸어온 길이 저 강줄기 속으로 묻혀버리고 배는 뱃고동을 울리며 떠나고 있다. "청풍나루까지 40분쯤 걸리고 충주댐까지는 2시간쯤 걸릴 것입니다." 그래 출발이다, 하고 바라보는 장회나루에는 옛사람의 자취가 묻어나온다. 조선시대의 학자였던 김일손은 장회에서 두석리 들어가는 골짜기로 들어오는 기행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장회원에 이르러 다시 말을 타고 길을 나서면 더욱 가경으로 접어들게 된다. 여기서 가득 버섯처럼 자라는 돌무더기를 발견했다. 산봉우리에서 봉우리를 연결한 푸른 아지랑이는 좌우와 동서를 분간하지 못하리란 말에 현혹하여 어떤 마술사의 기교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가은암 앞에 말을 세웠다. 아까보다 더 찬란한 연하는 더욱 길을 흐리게 하여 남가산의 꿈 같은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절경에 명칭이 없는 것이 매우 어색하여 대뜸 단구협丹丘峽이라 명명했다.

협을 거쳐 동쪽으로 가니 산은 더욱 기이하고 물은 더욱 맑다. 10리를 가면 협이 다되니 머리를 돌이키매 가인佳人을 이별하는 것과 같아서 열 걸음에 아홉 번을 돌아보았다.“곧장 동쪽으로 적성을 바라보면 지척도 못된다.(...)

 

이곳 장회에는 조선 영조 때의 구두쇠였던 조륵에 관한 얘기가 남아 있다. 음성에서 살던 자린고비가 어느 날 장독 뚜껑을 벗겨 햇볕을 쬐고 있던 중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장을 빨아먹고 날아갔다. 이를 본 자린고비는 파리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까와 파리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충주를 지나 단양까지 쫓아온 자린고비는 남한강을 건너는 도중 그만 파리를 놓치고 말았다. 자린고비는 발을 동동 구르며 '장외 장외'라고 소리치며 분해했다. 그후부터 사람들은 파리를 놓친 이 곳을 장외라고 불렀고, 세월이 흐르면서 장회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물은 갈수록 겹겹이요, 또 산은 거듭거듭

유람선은 부는 바람 속에 아래로 아래로만 내려가고 배는 망월산 자락을 돌아 청풍대교 아래를 지난다. 이 근방 사람들이 정월대보름날 망월산에 올라 달맞이를 하였다고 한다.

강 건너가 교리이고 배는 "갈수록 물은 겹겹이요, 또 산은 거듭거듭인데 약간의 민가는 그림 속이로다"라고 신개라는 사람이 노래했던 청풍나루에 닿는다. 청풍나루에서 북진나루로 건너던 나루터는 제 기능을 잃어버린 채 옅은 운무 속에 잠겨 있을 뿐이다. 청풍명월의 고장 제천군 청풍면은 1985년 충주 다목적댐이 완공되면서 27개 마을 가운데 겨우 두 마을만이 온전히 남고 나머지는 충주호에 잠기고 말았다. 조선시대까지 제천 지역의 중심역할을 했던 청풍은 악성 우륵의 고향이었고 조선 현종 때는 왕후의 관향이라고 하여 충청도에서 유일한 도호부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

 

그 당시 남한강의 물길을 이용하려면 먼저 남한강의 물길이 불어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영월의 금강진이나 영춘. 단양, 그리고 청풍의 북진나루에서 몇 십 섬 또는 몇 백 섬의 곡식을 실은 배들은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나기만을 기다렸다가 흙색의 강물이 멍석물이 될 즈음에 서해의 썰물시간에 맞춰서 배를 띄우면 하루쯤 뒤에 경기도 땅에 닿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내려간 배들이 다시 상류로 올라가려면 인천만의 밀물을 기다렷다가 서해바다에 밀물이 가장 크게 밀릴 때를 이용하여 천천히 노를 저어서 상류로 올랐다. (...)

 

한벽루는 조선시대 청풍현의 객사에 딸린 누각으로 보물 제 5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충주댐으로 청풍이 수몰 되기 전 읍상리 북쪽 청풍초등학교에 세워져 있던 이 정자는 높은 석벽위에 다시 세워졌다. 정자 밑으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에는 백사장이 하얗게 펼쳐져 있으며 금수산이 우뚝 솟아 있어 경치가 아름답기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한벽루는 정면 4, 측면 4칸의 주심포계 팔작지붕이다. 이 건물은 원래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댐으로 그 지역이 수몰되면서 198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건물이 처음 지어진 것은 고려 말기인 1317년 당시 청풍현 출신인 승려 청공淸恭이 왕사王師가 되자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객사 동쪽에 이 정자를 지었다. 1397년에 군수 정수홍鄭守弘이 중수하였다. 1634년에 개창되었고 고종 7년인 1870년에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고쳐 지었다. 현재의 건물 양식은 그 때의 모습이 남아 있다. 밀양의 영남루와 남원의 광한루 와 함께 익랑이 딸려 있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누각 건물이고 세 건물 가운데에서도 가장 간결하고 단아한 모습이다. (...)

 

황학산 밑 밤나무 그늘 뒤에 황학사라는 절이 있고 황강나루를 지난 배는 제법 세차게 부는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린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관광객들은 여객선에서 울려퍼지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도착지점이 멀지 않다. 충주댐에 도착하면 우린 배에서 내리고 이 배는 다시 장회나루로 돌아가리라. 나는 바람 부는 뱃전에 기대어 흘러오고 흘러가는 이 강물에 기대고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강은 한천리, 성암리 사이를 지나 화암리에 접어든다. 충주시 살미면 목벌리로 건너던 꽃바우나루터(화암)의 서북쪽에는 사무장산(407m)이 있고 꽃바우 서쪽에는 서울로 가던 과객들이 이곳 무인지경에 막을 치고 놀다갔다고 한다.

멀리 뒤편에 월악산이 보이고 드디어 희미한 안개 속에 충주나루 선착장이 보인다. 많이도 달려 왔다. (...)

 

충주시 종민동과 중원군 동량면 조동리 사이의 남한강에 '중부지방의 지도를 바꾼' 충주다목적댐의 착공식을 가졌던 것은 1980110일이었다. 높이가 97.5m 길이가 464m로 국내 최대규모의 콘크리트 중력댐인 충주다목적댐은 총저수량이 275,000만 톤이며 댐의 연평균 유입량은 448200만 톤이며 만수위 때의 수면 면적은 97km2로 우리나라 최대의 담수호라고 할 수 있다. (...)

 

지금은 산 위에까지 포장도로가 나 있고 충주문화관과 더불어 야외 음악당, 탄금정, 충혼탑, 우륵 기념비, 대흥사 등이 즐비하게 있어 이곳에서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리기도 하며, 또 호암지와 함께 시민들이 잘 '놀러 가는' 대표적인 유원지 구실을 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고적 조에 탄금대는 견문산에 있다. 푸른 벽이 낭떠러지가 져서 높이가 20여 길이요, 그 위에 소나무. 참나무가 울창하여 양진명소楊津溟所에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于勒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고 실려 있는 탄금대는 임진왜란 때에 신립 장군이 휘하에 8,000여 병사를 거느리고 배수진을 치고서 문경새재를 넘어 밀고 올라오던 왜장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참패하자 천추의 한을 품고 투신 자결한 유적지이기도 하다.(...)

 

탑평리에 이르러 칠층석탑을 마주한다. 중앙탑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 칠층석탑은 높이가 14.5m나 된다. 중앙탑은 신라의 문성왕 때에 나라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신라 땅의 남쪽과 북쪽 끝에서 같은 시각에 출발한 두 사람이 어김없이 똑같은 시간에 이 탑에 당도했다고 한다. 신라 석탑 중에서 가장 높은 탑인 이 중앙탑은 이 고장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는 곳이 우리나라의 중심지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데에 큰 몫을 하고 있으며 그런 연유로 충주, 영주, 풍기, 단양, 제천 일대의 문화권을 중원문화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탑이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고구려 탑이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

중앙탑에는 현장학습을 나온 아이들이 열을 지어 서 있다. 그 옆 중요민속자료전시관 앞에는 엄정면 율능리에서 옮겨온 석불 입상이 세월 속에 마모된 채로 서 있다. 중앙탑을 뒤로 남겨두고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