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떠나는 한강 도보답사,단양군 단성면에서 충주시 가금면 중원탑까지 여섯 번째 떠나는 한강 천 삼백리 도보답사 여정이 7월 12일에서 14일까지 2박 3일 간에 걸쳐 실시됩니다. 장회나루에서 충주댐까지 한강 유람선을 타고 가다가 만나는 남한강은 또 다른 정취를 줄 것입니다. 퇴계 이황의 자취가 서린 단성면을 지나고 장회원에서 한강 유람선을 타고 충주댐까지 가고, 탄금대, 중원탑, 고구려탑까지 답사를 하며 걸어갈 이번 여정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여름이니까. 시원할 때 걷고 뜨거울 때 쉬며 휴식처럼 진행할 예정입니다. 하늘로 통하던 다리 우화교 영조 때 단양 군수였던 이기중이 1753년에 놓았던 것이 홍수로 떠내려가 다시 세울 때 쓴 비문에 "하늘로 통하는 길이요. 거울같이 맑은 물을 바라보면 신선인 듯하다"는 옛 사람들의 말을 인용, 날개가 달린 다리 즉 우화교라 했다. 경상도 지방에서 죽령을 넘어오던 사람들이, 숲이 울창하고 밑으로는 맑고 깊은 물이 흘러 그렇게 불렀었다고 한다. 72 년 당시의 큰 비에 단양이 생긴 이래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 이곳이었다. 정오가 넘어 우화교가 넘쳤고, 이어 136m까지 수위가 올라가 군청을 비롯, 농협, 등기소, 우체국이 물에 잠겼었다. 소와 돼지들이 떠내려가는데도 발만 동동 구르며, 높은 곳으로 몸을 피해야 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 오르막이 끝나고 내리막길에 접어든다. 이렇게 한 굽이 한 굽이 고개를 돌아가다 보면 그리운 선착장이 보일 것이다.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 맺힌 땀방울을 식혀준다. 월악산은 옅은 안개 속에 수줍은 듯 숨어 있고 단양팔경 구담봉, 옥순봉이 멀지 않다. 장회나루 1km를 두고 강 아래쪽에선 유람선이 돌아오는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는데 발목이 아프다.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그것도 내리막길을 걷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열 걸음을 걷는 동안에 아홉 번을 뒤돌아본다 드디어 장회나루에 도착한다. 충주호 관광선을 타고 충주나루까지는 2시간 거리. 눈부신 햇살 아래 삼층에 자리를 잡는다. 한쪽 끝이 풀어진 태극기는 오늘도 역시 바람에 펄럭거리고 몇 척의 유람선이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다. 떠나고 돌아오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세상이리라. 어라연에서 장회나루까지 85km,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니었다. 우리들이 한 발 한 발 걸어온 길이 저 강줄기 속으로 묻혀버리고 배는 뱃고동을 울리며 떠나고 있다. "청풍나루까지 40분쯤 걸리고 충주댐까지는 2시간쯤 걸릴 것입니다." 그래 출발이다, 하고 바라보는 장회나루에는 옛사람의 자취가 묻어나온다. 조선시대의 학자였던 김일손은 장회에서 두석리 들어가는 골짜기로 들어오는 기행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장회원에 이르러 다시 말을 타고 길을 나서면 더욱 가경으로 접어들게 된다. 여기서 가득 버섯처럼 자라는 돌무더기를 발견했다. 산봉우리에서 봉우리를 연결한 푸른 아지랑이는 좌우와 동서를 분간하지 못하리란 말에 현혹하여 어떤 마술사의 기교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가은암 앞에 말을 세웠다. 아까보다 더 찬란한 연하는 더욱 길을 흐리게 하여 남가산의 꿈 같은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절경에 명칭이 없는 것이 매우 어색하여 대뜸 단구협丹丘峽이라 명명했다. 협을 거쳐 동쪽으로 가니 산은 더욱 기이하고 물은 더욱 맑다. 10리를 가면 협이 다되니 머리를 돌이키매 가인佳人을 이별하는 것과 같아서 열 걸음에 아홉 번을 돌아보았다.“곧장 동쪽으로 적성을 바라보면 지척도 못된다.(...) 이곳 장회에는 조선 영조 때의 구두쇠였던 조륵에 관한 얘기가 남아 있다. 음성에서 살던 자린고비가 어느 날 장독 뚜껑을 벗겨 햇볕을 쬐고 있던 중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장을 빨아먹고 날아갔다. 이를 본 자린고비는 파리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까와 파리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충주를 지나 단양까지 쫓아온 자린고비는 남한강을 건너는 도중 그만 파리를 놓치고 말았다. 자린고비는 발을 동동 구르며 '장외 장외'라고 소리치며 분해했다. 그후부터 사람들은 파리를 놓친 이 곳을 장외라고 불렀고, 세월이 흐르면서 장회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물은 갈수록 겹겹이요, 또 산은 거듭거듭 유람선은 부는 바람 속에 아래로 아래로만 내려가고 배는 망월산 자락을 돌아 청풍대교 아래를 지난다. 이 근방 사람들이 정월대보름날 망월산에 올라 달맞이를 하였다고 한다. 강 건너가 교리이고 배는 "갈수록 물은 겹겹이요, 또 산은 거듭거듭인데 약간의 민가는 그림 속이로다"라고 신개라는 사람이 노래했던 청풍나루에 닿는다. 청풍나루에서 북진나루로 건너던 나루터는 제 기능을 잃어버린 채 옅은 운무 속에 잠겨 있을 뿐이다. 청풍명월의 고장 제천군 청풍면은 1985년 충주 다목적댐이 완공되면서 27개 마을 가운데 겨우 두 마을만이 온전히 남고 나머지는 충주호에 잠기고 말았다. 조선시대까지 제천 지역의 중심역할을 했던 청풍은 악성 우륵의 고향이었고 조선 현종 때는 왕후의 관향이라고 하여 충청도에서 유일한 도호부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 그 당시 남한강의 물길을 이용하려면 먼저 남한강의 물길이 불어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영월의 금강진이나 영춘. 단양, 그리고 청풍의 북진나루에서 몇 십 섬 또는 몇 백 섬의 곡식을 실은 배들은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나기만을 기다렸다가 흙색의 강물이 멍석물이 될 즈음에 서해의 썰물시간에 맞춰서 배를 띄우면 하루쯤 뒤에 경기도 땅에 닿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내려간 배들이 다시 상류로 올라가려면 인천만의 밀물을 기다렷다가 서해바다에 밀물이 가장 크게 밀릴 때를 이용하여 천천히 노를 저어서 상류로 올랐다. (...) 한벽루는 조선시대 청풍현의 객사에 딸린 누각으로 보물 제 5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충주댐으로 청풍이 수몰 되기 전 읍상리 북쪽 청풍초등학교에 세워져 있던 이 정자는 높은 석벽위에 다시 세워졌다. 정자 밑으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에는 백사장이 하얗게 펼쳐져 있으며 금수산이 우뚝 솟아 있어 경치가 아름답기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한벽루는 정면 4칸, 측면 4칸의 주심포계 팔작지붕이다. 이 건물은 원래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댐으로 그 지역이 수몰되면서 198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건물이 처음 지어진 것은 고려 말기인 1317년 당시 청풍현 출신인 승려 청공淸恭이 왕사王師가 되자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객사 동쪽에 이 정자를 지었다. 1397년에 군수 정수홍鄭守弘이 중수하였다. 1634년에 개창되었고 고종 7년인 1870년에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고쳐 지었다. 현재의 건물 양식은 그 때의 모습이 남아 있다. 밀양의 영남루와 남원의 광한루 와 함께 익랑이 딸려 있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누각 건물이고 세 건물 가운데에서도 가장 간결하고 단아한 모습이다. (...) 황학산 밑 밤나무 그늘 뒤에 황학사라는 절이 있고 황강나루를 지난 배는 제법 세차게 부는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린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관광객들은 여객선에서 울려퍼지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도착지점이 멀지 않다. 충주댐에 도착하면 우린 배에서 내리고 이 배는 다시 장회나루로 돌아가리라. 나는 바람 부는 뱃전에 기대어 흘러오고 흘러가는 이 강물에 기대고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강은 한천리, 성암리 사이를 지나 화암리에 접어든다. 충주시 살미면 목벌리로 건너던 꽃바우나루터(화암)의 서북쪽에는 사무장산(407m)이 있고 꽃바우 서쪽에는 서울로 가던 과객들이 이곳 무인지경에 막을 치고 놀다갔다고 한다. 멀리 뒤편에 월악산이 보이고 드디어 희미한 안개 속에 충주나루 선착장이 보인다. 많이도 달려 왔다. (...) 충주시 종민동과 중원군 동량면 조동리 사이의 남한강에 '중부지방의 지도를 바꾼' 충주다목적댐의 착공식을 가졌던 것은 1980년 1월 10일이었다. 높이가 97.5m 길이가 464m로 국내 최대규모의 콘크리트 중력댐인 충주다목적댐은 총저수량이 27억 5,000만 톤이며 댐의 연평균 유입량은 44억 8200만 톤이며 만수위 때의 수면 면적은 97km2로 우리나라 최대의 담수호라고 할 수 있다. (...) 지금은 산 위에까지 포장도로가 나 있고 충주문화관과 더불어 야외 음악당, 탄금정, 충혼탑, 우륵 기념비, 대흥사 등이 즐비하게 있어 이곳에서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리기도 하며, 또 호암지와 함께 시민들이 잘 '놀러 가는' 대표적인 유원지 구실을 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고적 ‘조에 “탄금대는 견문산에 있다. 푸른 벽이 낭떠러지가 져서 높이가 20여 길이요, 그 위에 소나무. 참나무가 울창하여 양진명소楊津溟所에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于勒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고 실려 있는 탄금대는 임진왜란 때에 신립 장군이 휘하에 8,000여 병사를 거느리고 배수진을 치고서 문경새재를 넘어 밀고 올라오던 왜장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참패하자 천추의 한을 품고 투신 자결한 유적지이기도 하다.(...) 탑평리에 이르러 칠층석탑을 마주한다. 중앙탑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 칠층석탑은 높이가 14.5m나 된다. 중앙탑은 신라의 문성왕 때에 나라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신라 땅의 남쪽과 북쪽 끝에서 같은 시각에 출발한 두 사람이 어김없이 똑같은 시간에 이 탑에 당도했다고 한다. 신라 석탑 중에서 가장 높은 탑인 이 중앙탑은 이 고장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는 곳이 우리나라의 중심지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데에 큰 몫을 하고 있으며 그런 연유로 충주, 영주, 풍기, 단양, 제천 일대의 문화권을 중원문화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탑이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고구려 탑이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 중앙탑에는 현장학습을 나온 아이들이 열을 지어 서 있다. 그 옆 중요민속자료전시관 앞에는 엄정면 율능리에서 옮겨온 석불 입상이 세월 속에 마모된 채로 서 있다. 중앙탑을 뒤로 남겨두고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