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전봉준의 길을 따라 걷다 1

산중산담 2019. 6. 26. 16:29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의 길을 따라 걷다.1,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의 길을 따라 걷다.1,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의 출발점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동학은 수면 아래로 잦아들었고, 그 뒤를 증산교를 비롯한 수많은 민족종교들이 이었지만 동학이라는 말은 입에 담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세월이 오래 지나고 박정희가 그들의 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하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전두환이 황토현에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세웠지만, 그것은 그냥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989<갑오농민의 혼이여, 타올라라, 통일의 불길로>라는 주제로 황토현에서 제가 속한 단체에서 행사를 할 때 안기부 직원들이 같이 텐트를 치고 34일간을 함께 하며 감시했습니다.

우여 곡절 끝에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크게 이긴 51일을 국가 기념일로 정하고 종로 한복판에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상이 세워졌고, 모방송사에서는 <녹두꽃>이라는 대하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올해 지방방송과 <신정일의 천년의 길> 40부작을 찍으며 <전봉준의 길> <김개남의 길> <손화중의 길> 등 방송을 촬영하였습니다.

민족사의 가장 큰 사건인 동학농민혁명을 다시 금 되새기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의 길을 인물을 주제로 답사할 예정입니다.

총 여섯 번으로 진행될 답사에 많은 참여바랍니다.

고창읍 죽림리 당촌 56번지, 전봉준이 태어났다는 마을이다. 마음껏 멋을 부린 듯한 몇 그루의 조선소나무가 모정(茅亭)을 휘영청 휘감은 당촌 마을에 들어서자 집집의 개가 멍멍 짖으며 낯선 일행을 맞는다.

전봉준은 이 당촌에서 철종 61855년 아버지 전창혁과 어머니 광산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영준이라 불렸고, 자는 명숙이었는데, 봉준은 어릴 때의 이름이고, 녹두는 키가 작아 불린 별명이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집은 없어져 버렸고, 그 빈터에는 두 동의 비닐하우스가 전봉준의 어린 시절을 송두리째 삼키고 있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장군의 출생지는 푯말도 없이 그렇게 보호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전창혁이 아이들을 가르쳤다는 서당도 잡초만 무성한 언덕배기가 되어있다.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전봉준은 이 당촌에 오래 살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된다. 꼬마대장을 한 예닐곱 살까지의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전주 구미리, 정읍 감곡 등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녔다고 전한다. 특히 열여덟 살되던 해에는 산의 동곡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사생을 결의한 동지 김개남을 만나게 된다. 그후에도 고부 양교리, 조소리 등으로 집을 자주 옮기게 되는데, 이는 조선 말엽의 사회적 불안을 해소 하기 위한 안식처를 찾아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무렵 조소리에서 지냈던 녹두장군의 생활 모습을 전해 주는 한편의 글이 남아 있다.

 

전봉준은 몸이 작지만 얼굴이 희고 눈빛은 형형하여 사람을 쏘는 듯하다. 평소 집에 머물 때는 동네의 소년들을 모아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어주거나 천자문을 가르쳐 주었다. 동네의 어른들이 찾아오면 고현(古賢)들의 사적을 들어 얘기할 뿐 세간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을 때면 종일토록 묵묵히 앉았다 드러누웠다 하였으며,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서 그 효성이 지극했다. 집안은 가난하였으나 농사를 지을 줄은 몰랐다. 때때로 먼 곳에서 손님이 내방(來訪)하면 며칠씩 묵어 가는 일이 있었으나 동네사람들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다만 동네에 경조사(慶弔事)가 있으면 그는 먼저 찾아가 축하를 드리기도 하고 조문하기도 했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그가 심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고 마음속 깊이 그를 존경했다.(菊池謙讓, 近代朝鮮史)

 

그러나, 매천 황현은 유학자의 입장에서 전봉준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봉준은 집이 가난하고 도움 받을 만한 곳도 없어 약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방술(方術)을 익혔다. 언제가 지관을 조치하여 묏자리를 부탁하면서 만약 크게 왕성할 자리가 아니면, 아주 망하여 후사가 끊어지는 곳을 원한다고 하였다. 그 사람이 이상하게 여기자 봉준은 탄식하면서 오랫동안 남의 밑에서 살면서 구차하게 성씨를 이어가느니 차라리 후사가 끊어지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그는 오래 전부터 동학에 물들어 있었으며 요사한 지식에 미혹되어 늘 울분에 차 있었는데,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사람들에 의해 우두머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미처 그의 간교한 모의가 드러나기도 전에 난민들이 흩어져 버렸으므로 봉준 또한 급히 도망쳐 숨었다. 얼마 후 수색이 심해지자 봉준은 피할 수 없을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리하여 그 일당 김기범(金箕範), 손화중(孫化中), 최경선(崔敬善)등과 화를 복으로 바꾸어준다는 꾀로 백성들을 유혹하고 선동하여 그들을 끼고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는 큰소리로 동학이 하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려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들을 편안케 할 것이다. 우리는 살상과 약탈을 하지 않을 것이나, 오직 탐관오리만은 처벌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이 말에 솔깃하여 우도 일대 10여 읍이 일시에 봉기하여 열흘 정도에 수만 명이 모여들었고 동학이 남민과 함께 어우러진 것이 이때부터였다.

 

전봉준이 황새울 마을에 살고 있을 때 13살 무렵에 썼다는 백구시.

 

스스로 모래밭에 마음껏 노닐 적에

흰 날개 가는 다리로 맑은 가을날 홀로 섰네.

부슬부슬 찬 비는 꿈속 같은데

때때로 고기잡이 돌아가면 언덕에 오르네.

허다한 수석은 낯설지 아니하고

얼마나 많은 풍상을 겪었는지 머리 희었도다.

마시고 쪼는 것이 비록 번거로우나 분수를 아노니

강호의 고기떼들아 너무 근심치 말지어다.

自在少鄕 得意遊

雪榻瘦脚 獨淸秋

寒雨 來時夢

往往漁人 去後

許多水石 非生面

 

사람은 가고 세월은 흘렀어도 그 한 편의 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 고부에 조병갑이 군수로 온다. 그가 고부에 와서 자행 했던 일을 황현은 오하기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계사년에 충청우도 일대가 가뭄이 극심하여 세금을 거둘 수 조차 없었는데, 고부는 산과 바다가 서로 엇갈리는 지형으로 북쪽은 흉년이 들었지만 남족은 그런 대로 추수를 하였다. 병갑은 가뭄에 대한 보고를 받고 각 고을을 순시하면서 북쪽 4개 면의 세금을 탕감해주었다. 그러나 각 고을에는 가뭄의 재해로 세금을 탕감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면서, 북쪽지방의 세금을 남쪽지방에다 옮겨 부과하고 실제보다 배나 되게 독촉하여 받아들였다. 그리고 북쪽에는 세금을 다른 지방에 옮겨 부과한 것을 자랑하고 백성들에게 후한 보상을 요구하여, 논 백 이랑당 거두어들인 것인 백 말이나 되었다. 이것은 실제로 국세의 세 배나 되었다. 또 자기가 관할하는 지역에 집을 짓고 첩을 사서 거기에 살도록 하였다. 그 집을 지을 때 국가의 공사보다 더 심하게 닥달하여 백성들이 견딜 수 없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수천 명이 모여서 이러한 사정을 호소하고자 하였다. 이렇데 되자 병갑은 급히 전주로 달아났다. 이것이 2월 초순의 일이다.

그 사건이 파문을 일으키자 조병갑은 18931130일 익산군수로 전임되었다. 이은용(李垠鎔)이 고부군수로 발령되었으나 이은용은 부임하지 않고 있다가 안악군수로 갔고, 계속 신재묵(申在黙), 이규백(李奎白), 하긍일(河肯一)등이 고부군수로 발령을 받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부임을 기피한 것이다.

이렇게 발령을 받은 고부군수들이 부임을 하지 않은 까닭은 조대비(趙大妃)의 조카이며 이조판서 심상훈(沈相薰)과 사돈 관계에 있는 조병갑이 고부 마을을 떠나지 않으려는 유임 공작을 이면에서 치열하게 벌였기 때문이다. 조병갑 역시 익산 군수로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이 장계를 올려,

<<고부 전 군수 조병갑은 포흠이 많아 점차 청산하고 있으며, 때마침 세를 받아 들이려는 중인데 타읍으로 옮기게 되면 착오가 생길 우려가 있다>>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에 부임하였고, 그 과정을 지켜본 농민군들은 감정이 폭발하였다. 그들은 사발통문을 돌렸고 드디어 말복장터아래 모였다. 1894110일 이었다.

고부봉기가 그렇게 발발하자 정부는 조병갑을 어쩔 수 없이 파면시켰고 다음과 같은 임금의 전교(傳敎)를 내렸다.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난 것은 실로 오랫동안 백성들의 원망이 쌓이고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까닭이지 그 연유가 일조익석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런 사태를 불러온 해당 관리가 직책을 망각하고 일을 그르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그런데 지난 번에 유임을 상신한 관리가 끝내 파직을 당하니, 앞뒤의 일이 어찌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전라감사 김문현은 먼저 봉급 삼등을 감하는 조치를 시행하고, 전 군수 조병갑은 난을 불러 일으키고 뇌물을 받은 죄를 범하였으니 의정부에서 잡아들여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 그리고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를 고부안핵사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하루빨리 부임하여 엄중히 사실조사를 하여 보고토록 하고, 또 용안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에 임명하니 그로 하여금 난민을 수습토록 하라.”

고부군수 조병갑의 흔적이 남아 있던 고부 관아는 1926년에 발간된 조선의 고적보도에 한 장의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일제 때 대다수의 관아 건물이 국민학교나 면 소재지로 변하였던 것 처럼 고부초등학교로 변하고 만 것이다. 아이들은 이 땅의 민중들이 한 서린 눈으로 바라보았을 고부관아터였던 고부초등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바로 그 옆에 있는 고부향교의 은행나무는 그날의 그 역사를 그대로 보았을 것이지만 아무 말 없이 바람결에 그 날의 그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