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울진 십이령길과 불영사, 그리고 울진 바닷가를 걷는다.

산중산담 2019. 6. 26. 16:33


울진 십이령길과 불영사, 그리고 울진 바닷가를 걷는다.

2019년 여름걷기 학교를 울진 십이령길과 불영사, 그리고 울진 바닷가를 걷는다.

 

2019<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에서 여는 여름걷기학교를 88일에서 11일까지 울진 십이령 4코스와 불영계곡, 그리고 울진 바닷가를 걷습니다.

울진 십이령은 우리 땅 걷기에서 걷지 않은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아름다운 숲길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 속에서 여름 한 철을 보내고자 마련한 이 행사에 참여를 바랍니다.

 

울진 바닷가에서 생산된 생선과 소금을 짊어지고 봉화군 현동까지 열두 고개를 넘어갔던 보부상들의 애환이 서려 있고, 아름다운 금강송이 우뚝우뚝 서있는 소광리 소나무 길을 걸어 갈 예정입니다.

열두고개 즉 십이령을 넘기 위해 울진군 북면으로 향한다. 울진이라는 이름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뒤에 김유신이 영덕과 평해를 거쳐 이 땅에 이르러보니 산림이 울창하고 여러 가지 진귀한 물산들이 많다.’고 감탄한데서 연유했다고 하는데, 십이령의 길목인 북면 두천 1리는 울진중에서도 가장 궁벽 진 산골이다.

민가 몇 채가 드문드문 들어서 있는 이곳 두천 1리는 열두재를 지나 소천 거쳐 서울로 가던 중요한 길목이라서 서울 나들이길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 선질꾼들은 이곳 십이령을 대개 사흘 만에 넘어 소천에 도착했는데, 그들의 출발이 울진이나 흥부에서 출발할지라도 이곳 두천리를 경과하지 않고는 바릿재를 지나서 가는 십이령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런 연유로 선질꾼들이 한창 많았을 때는 50여명의 행상들이 몰려들어 주막과 마방으로 흥청거렸다.

마을 동쪽을 흐르는 외두천 건너에 <울진내성행상불망비蔚珍乃城行商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문화재 자료 제 310호인 이 비는 1890 년 경에 울진과 봉화를 왕래하면서 어염해조류를 물물교환하며 상행위를 하던 선질꾼들이 세운 비다. 당시 봉화 내성에 살고 있던 그들의 최고 지위격인 접장인 봉화사람인 정한조鄭韓祚와 반수班首인 안동출신 권재만權在萬이 그들의을 도와준데 대해 그 은공을 기리고자 세운 영세불망비라서 이 비를 이 지역 사람들은 선질꾼비라고도 부른다.

조선 후기에 세워진 이 비는 그렇게 흔하지 않은 철비鐵碑로 만들었는데 일제의 철재동원령 때에는 땅 속에 묻어두었다가 해방 이후 골기와로 비각을 세웠다. 그 뒤 1965년 경에 대구에 살고 있다는 후손이 찾아와 양기와로 비각을 보수하였다.

무쇠로 주조된 이 비는 2기로, 1기는 부러진 것을 이어 세웠다. 선질꾼들은 2.7장인 울진장과 3.8장인 흥부장에서 주로 해산물인 소금, 건어물, 미역 등을 구매하여 쪽지게에 지고 열두재라고도 부르는 12 을 넘었는데 울진에서 봉화까지 대략 그 길이가 13십리 길이었다. 선질꾼들은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면 외딴 주막이나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있는 인가에서 머물면서 지게에 지고 가던 솥단지로 밥을 지어먹고 가기도 했다.

(...)

고개에서 내려가는 길은 누워 떡 먹기 보다 더 쉽고 10여분 내려가니 발현동이고 십이령 골이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우리가 가는 길을 인도해준다. 둘이서 혹은 셋이서, 내려가며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시냇물 소리에 묻히기도 하고 실려 가기도 하는 십이령 길, 문득 <파우스트> 중 한 편의 글이 떠오른다.

 

다시금 이성은 말을 하기 시작하고

희망은 또 다시 꽃 피기 시작한다.

사람은 삶의 시냇물을 그리워하고,

아아! 삶의 원천을 그리워한다.“ ”

신정일의 <가슴 설레는 걷기 이행>

 

산더미 같은 지게 짐을 짊어지고 열두 고개를 매일 넘어 다니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지게꾼으로 불리는 그들은 경북 울진에서 해산물을 잔뜩 지고 130리 산길을 걸었다. 그리고 봉화에서 농산물로 바꿔 다시 울진으로 돌아오는 고된 여로를 숙명처럼 짊어지고 살았다. 1980년대 초 불영계곡을 관통하는 36번 국도가 개통되면서 바지게꾼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의 땀방울을 먹고 자란 금강송 숲은 더욱 울창해져 명품 트레킹 코스로 거듭났다.

 

십이령 바지게길로 불리는 울진 금강소나무숲길은 모두 5개 구간으로 현재는 1구간(13.5)3구간(18.7)만 개방되고 있다. 그 중 3구간은 올해 한국관광의 별을 수상한 소광리 금강송 숲을 둘러볼 수 있는 코스로 인터넷 예약(www.uljintrail.or.kr)을 통해 하루 100명만 방문할 수 있다. 매주 화요일은 휴무. 울진 북면 두천1리와 서면 소광2리를 잇는 1구간은 하루 80명만 예약이 가능하다.

 

소광2리에서 숲길로 들어서면 길섶을 수놓은 야생화들이 매혹적인 자태로 나그네들을 맞는다. 꽃잎이 하얀 꿩의다리와 어수리를 비롯해 노란색 마타리와 붉은색 물봉선화가 지천인 산길은 이따금 산새와 풀벌레가 인기척에 놀라 날갯짓을 할 뿐 호젓하다 못해 적막감이 감돈다.

 

저진터재로 불리는 첫 번째 고개를 넘으면 화전민들이 모여 살았던 저진터. 화전민과 바지게꾼들이 사용하던 디딜방아와 신발, 옛날 소주병 등이 남아 옛 추억을 반추하고 있다. 너삼밭재로 불리는 또 하나의 고개를 넘으면 길은 소광천과 어깨를 나란히 한 임도를 만난다. 고삼으로도 불리는 너삼은 성분이 인삼과 비슷해 한약재로 쓰였으나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약초. 금강송펜션에서 너삼밭까지 2.8, 너삼밭에서 소광리 금강송 숲까지 4.5.로 결코 지루하지 않다.

 

목질이 금강석처럼 단단한 금강송의 본래 이름은 황장목(黃腸木). 속이 노란 황장목은 표피가 붉어서 적송, 줄기가 매끈하게 뻗었다고 해서 미인송으로도 불린다. 목재의 집산지가 봉화 춘양이어서 춘양목으로도 불리는 금강송은 예로부터 궁궐의 기둥이나 왕실의 관으로 쓰인 귀한 소나무다.

 

하지만 일제의 대대적 벌목과 개발로 백두대간 주변의 금강송은 멸종되다시피 했다. 소광리 금강송 숲이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까닭은 오지 중 오지였기 때문. 조선 숙종 6년에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입산이 금지됐던 소광리 금강송 숲은 1959년 육종림으로 지정된 후 민간인 출입이 오랫동안 금지됐었다.

 

금강소나무숲길은 1-3구간, 3-1구간(3시간), 4구간(네 시간), 5구간(7시간) 6개 구간으로 돼 있는데, 3-1구간, 4구간, 5구간을 걸을 예정이다. 3구간(왕복 16.3)은 우리나라 최대 금강송 군락지가 있는 코스다. 4구간(왕복 10.48)은 수령 600년 추정의 '대왕소나무'를 볼 수 있고 5구간(편도 15)은 최고 난도 코스다.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울진에서 봉화로 이어지는 십이령 길과 불영사, 그리고 동해의 비경 울진바다사가 길을 걷는 여정에 참여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