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다시 넘은 팔조령, 오랜만에 다시 팔조령을 넘었다. 대구시 달성군 가창동에서 청도군 이서면 팔조리로 넘어가는 고개 팔조령, 옛 시절 도둑이 많아서 여덟 명이 조를 짜서 넘었다는 고개, 이 고개를 영남대로 상의 명승으로 지정하고자 넘었는데, 15년 전보다 더 숲이 우거져 비지땀을 흘리고 넘었다. “ “청도읍에서 화양읍으로 들어가는 갈목에 있는 송북리는 소나무숲이 많으므로 송북이라고 하였는데, 주막이 있었던 이곳 삼거리에서 조선시대에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은 청도읍성으로 들어가 쉬었다가 청도읍성 동문을 지나 갈 것인지, 아니면 길을 서둘러서 화양읍 북쪽에 있는 유등리를 지나 팔조령(八助嶺398미터)을 넘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청도군지』에는 “이 두 길 모두가 조선시대의 관도였다”고 실려 있다. 청도읍성을 우회하여 대구로 바로 향하는 길은 삼거리에서 우측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해발 360m의 팔조령은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 성산동과 청도군 이서면 팔조동, 신촌동에 걸쳐 있는 해발 589m의 봉화산 우측에 자리 잡은 고개로 봉화산에는 조선시대에 봉수대가 있었다. 남쪽으로 청도군의 남산, 북쪽으로 대구 쪽의 법이산 봉수에 응하였다. 조선시대에 청도에서 대구로 넘어가는 두개의 고개가 있었는데, 그 하나가 남성고개를 넘어 남천-경산-대구로 가는 길이었고, 또 하나가 관로인 팔조령이었다. 팔조령은 고개가 하도 높고 험해서 도둑들이 들끓어 같이 넘어갈 사람들이 여덟 명이 모여야 넘었기 때문에 팔조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에 반해 남성고개를 넘어 가는 길은 팔조령을 넘는 것보다 덜 험할 뿐만 아니라 당시 유명했던 경산장을 거쳐 대구로 가는 길이라 일반 평민들이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최영준 교수는 『영남대로』에서, “팔조령 고갯길은 넓은 돌로 깔아 틈새를 흙으로 메운, 당시로는 보기 드문 박석(薄石) 포장길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지금은 그 박석의 흔적은커녕 옛 길조차 찾기가 힘들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에 접어들며 “충효의 고장 달성”이라는 현수막이 먼저 눈에 띄고 옛날 신작로였던 국도를 내려가다가 샛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내려가자 불경소리가 들린다. 누구나 걸어 다녔던 길 깊은 산이나 낯선 길을 걷다가 만나는 절은 꼭 어린 시절의 자취가 듬뿍 서린 고향집에 온 것처럼 가슴부터 설렌다. 봉화산 석주사. 조용하다. 요사채 쪽을 살펴보니 나이 드신 종무스님과 총무스님이 놋그릇을 닦고 있다. 어린 시절 연례행사로 봄날이면 학교에 가는 나에게 할머니는 원촌의 기와공장에 가서 기와 깨진 것을 주워 오라는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처음엔 왜 그런가 하고 의아심을 가졌지만 날씨 좋은 봄날에 내가 가져온 기와조각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날이면 집안에 있는 모든 놋그릇을 내다놓고 기왓장을 곱게 부순 다음 그것을 짚수세미에 발라 그릇들을 닦는 것이었다. 처음엔 흔적이 없다가 조금만 닦으면 그렇게 금빛 찬란한 윤이 나는 놋그릇은 기와조각이 온몸을 희생하여 얻는 산물이었다. 스님들은 화학물질과 기와가루 중 어느 것이 잘 닦이는지를 시험해 보는 중이라고 하는데, 기와가루가 한수 위라는 것이었다. 월광스님에게 언제부터 신작로가 생겼느냐고 묻는다. “저 길은 해방되고 생겼지, 옛날에는 다 걸어 다녔어, 진 골목으로 해서 약령시장을 거친 다음 문경새재를 넘으면 서울로 가는 거여,” 말은 쉽다. 이렇게 말 몇 마디면 서울을 가는데, 왜 이리도 가는 길이 막막하게 멀기만 느껴지는지 ….“ 2004년에 걸어서 쓴 책 <영남대로>에 실린 글이다. 1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야 새로움을 모색하는 것, 그것도 빠른 것일까? 팔조령이라는 고개, 높지도 그렇다고 그 길이 멀지도 않은 고개, 그 서이를 두고 십리 간에 말이 다르고 백리 간에 풍속이 다르다고 했는데, 지금은 길이 뚫리고, 더구나 팔조령 터널이 뚫려서 한 순간에 지나는 길. 그 길이 생기며 사라진 것들은 얼마나 많은지, 낡은 성황당도, 푸른 저수지도 변함없는데, 지나는 길손만 변했구나. 쓸쓸함과 허전함으로 넘고 돌아온 팔조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