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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산 진흥굴, 진흥왕이 왕을 그만두고 와서 수도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지금 고창군(당시 무장현) 아산면 선운사 동남쪽 3킬로미터 지점에 도솔암이란 암자가 있고, 그 암자 뒤에 50여 척 높이의 층암절벽이 솟아 있는데, 그 절벽에 미륵이 하나 새겨져 있다. 이 미륵상은 3천 년 전에 살았던 검당선사(黔堂禪師) 진상이란 것으로 그 미륵의 배꼽에는 신비스런 비결이 한 숨겨져 있는데,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비결과 함께 벼락 살을 동봉해 놨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비결을 꺼내기 위해 손을 대면 벼락에 맞아 죽는 다는 것이다. 그 벼락 살이 같이 봉해져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지금(당시)부터 130년 전에 전라감사로 내려왔던 이서구(李書九)가 그것을 꺼냈을 때 벼락이 쳤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전라감사로 부임한 이서구는 어느 날 선화당에 앉아 조용히 천지의 망기(望氣, 나타나 있는 기운을 보고 무슨 조짐을 알아냄)를 보고 있자니, 서남쪽에서 매우 상서로운 기운 한줄기가 뻗쳐올라가고 있는지라,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말을 몰아 그 쪽으로 달려가 보니, 그것이 선운사 미륵의 배꼽에서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여기에 무엇이 들었기에 이러는가, 그 배꼽을 쪼아보니, 그 속에는 책이 한 권 나왔는데, 그 순산 뇌성벽력이 하늘을 찢는 바람에 바람이 혼비백산, 그 책을 도로 거기 넣어놓고 회로 봉해버렸다는 것이다. 그 때 이서구가 본 것은 “전라감사 이서구 개탁”이란 글자뿐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세상 사람들은 그 비결을 꺼내보고 싶어도 벼락이 무서워 꺼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륵비결이 숨어있는 마애여래불
이 비결을 1892년(임진) 8월 무장 접주 손화중과 동학의 지도자들이 꺼내게 된다. 어느 날 손화중의 집에서는 선운사 석불비결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 비결을 내어보았으면 좋기는 하겠으나, 벽력이 또 일어나면 걱정이라 하였다. 그 좌중에 오하영(吳河泳)이라고 하는 도인이 말하되, “그 비결을 꼭 보아야 할 것 같으면, 벽력이라고 하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중대한 것을 봉해서 둘 때에는 벽력 살이란 것을 넣어 택일하여 봉하면 후대인이 함부로 열어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내 생각에는 지금 열어보아도 아무런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서구가 열어볼 때에 이미 벽력이 일어나 없어졌는지라 어떠한 벽력이 또 다시 일어날 것인가. 또는 때가 되면 열어보게 되나니 여러분은 그것은 염려 말고 다만 열어볼 준비만을 하는 것이 좋다. 여는 책임을 내가 맡아 하겠다.”고 하였다. 좌중에서는 그 말이 가장 이치에 합장하다 하여 청죽(靑竹) 수백 개와 새끼 수십 타래를 구하여 부계(浮械)를 만들어 그 석불의 전면에 안치하고 석불의 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꺼냈다. 그것을 꺼내기 전에 그 절 중 들의 방해를 막기 위하여 미리부터 수십 명의 중들을 결박하여 두었는데, 그 일이 끝나자 중들은 뛰어가서 무장관청에 고발하였다. 전날 밤에 동학군들이 중들을 결박 짓고 석불을 깨뜨려 그 속에 있는 것을 도적질하여 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수백 명이 잡히었는데, 그 중 괴수로 강경중(姜敬重), 오지영, 고영숙(高永叔) 세 사람이 지목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학의 지도자들이 여러 형태로 피해를 받았지만 손화중이 왕이 될 것이라니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줄을 이어 무장 접주 손화중의 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이 결국 동학농민혁명의 주력으로 활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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