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의 절집들과 순천만을 가다.
11월 30일 출발하여 12월 초이틀까지 남도 답사를 실시합니다. 남해와 삼천포를 잇는 다리를 건너 경남 고성군 하이면에 소재한 운흥사에서 호젓한 암자인 낙서암을 천천히 걸어서 답사하고 가산리 돌장승과 사천의 매향비를 돌아본 후 사천의 다솔사로 향합니다.
다솔사에서 보안암 석굴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일요일에는 선암사에서 조계산 자락을 따라가는 길을 걸어서 송광사에 이르고, 마지막으로 순천만의 갈대숲에서 저녁노을을 보고서 귀로에 오를 것입니다.
고즈넉한 십이월 초 아름다운 산천과 아름다운 절집에 취할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와룡산 향로봉 (香爐峯)중턱에 위치한 천년고찰 운흥사(雲興寺)는 1,300여년 전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운흥사를 찾아가는 길은 마치 어린 시절 외갓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설렌다. 멀리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보이고 길가에는 흔한 가게는커녕 민가도 별로 없다. 산자락으로 난 길을 한참 가면 운흥사가 보이고 언제나 가도 한가한 풍경의 운흥사에 닿는다.
운흥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당 유정이 이끄는 승병의 본거지로 6,000여 명의 승병이 머물 만큼 규모가 컸던 절이다. 그 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수륙양면 작전을 논의하기 위해 세 번이나 이곳을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운흥사는 숙종 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2월 초파일에 임진왜란 때 국난극복을 위해 왜적과 싸우다 숨져간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영산제를 지내고 있는데 올해는 3월 초사흘에 지낸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이날 가장 많은 승군이 죽었다고 한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에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효종 2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그 뒤에 다시 지은 것이다. 다섯 간인 운흥사 대웅전은 영조 때에 지은 맞배지붕 집으로 지방유형문화재 제 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흥사는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 불가의 화원 양성소로 큰 역할을 했는데 조선시대의 불화 중 가장 많은 걸작품을 남기고 있는『의겸(義謙)』 등이 이 절에서 불화를 그렸다.
그 당시 절의 규모는 현존하는 산내 암자인 천진암과 낙서암을 비롯하여 아홉군데의 암자가 있었고 곳곳에 남아있는 절터와 대형 멧돌 그리고 전방 1km 떨어진 언덕에 고승들의 사리가 안장되어 있는 부도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임진왜란때 병화로 절이 소실되었던 것을 효종 2년(1651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괘불탱화를 비롯하여 대웅전, 영산전, 명부전, 범종루(梵鍾樓), 산신각,요사채 등이 있고, 목조각상, 목제원패, 경판 등 30여점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이 중 대웅전은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웅전 내에는 보물(?) 제61호인 괘불(掛佛)과 조선 후기에 제작한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84호인 경판(經板) 등이 보관되어 있다. (...)
다소곳하게 숨어 있는 조선 여인네와 같이 아름다운 절 운흥사의 부속암자로 낙서암樂西庵과 천진암天眞庵이 있다. 운흥사의 뒷길로 난 골짜기를 따라 10여분 오르면 나타나는 암자가 천진암이다. 1692년인 숙종18에 응화선사應化先師가 창건한 암자이다.
금세라도 봉우리를 터트릴 것 같은 목련 꽃이 천진암 앞마당에 서 있고 매화꽃 동백꽃이 한창인데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천진암에서 낙서암거쳐 향로봉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른 산길이다. 천천히 천천히 오르는 길 냇물 소리를 들으며 걷는 길 가다가 뒤 돌아보자 금세 보였던 천진암이 겨울 나무 사이로 숨어 보이지 않는다.
낙서암으로 가는 길
앞서 가는 유재훈 선생이 흡사 세상을 버리고 막다른 곳에 있는 암자를 찾아 가는 처사處士처럼 보인다. 조금 오르자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낙서암樂西庵, 바라만 보아도 자리가 좋다. 깎아지른 바위벼랑위에 날렵하게 자리 잡은 낙서암, 작은 문 사이를 들어서자 낮은 돌담을 두른 문 앞에 용이 여의주를 문 치미가 보이고 요사채와 낙서암이 전면에 보인다.
침묵이라고 쓰여진 나무 판자가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낙서암을 돌아가자 졸졸 흐르는 샘물, 이 물이 바로 낙서도인이 수도하면서 마셨다는 샘물이다. 낙서암의 물은 다른 샘물보다 물이 세다고 하는데, 이 물로 술을 빚으면 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대지가 비좁고 건물은 인법당과 칠성각뿐이지만 뒤의 정상부근에서 이 암자를 품에 안 듯 좌우로 흘러내린 암봉들은 바라만 봐도 신비스럽다. 더구나 울창한 산 아래를 굽어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수도처로서의 가장 알맞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사지에 숙종 8년에 중창했다는 것 이외의 자료가 별로 없지만 운흥사와 동시에 수도처로 개창되엇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에서 법력 높기로 소문이 자자한 낙서도인樂西道人이 이절에서 깨달음(成道)을 이룬 것으로 이름이 높다.
이 절에서 50여 년간 수도했다는 비구니 정안淨眼스님의 말에 의하면. 어느 날 낙서스님이 남해 보리암에 있는 수상좌首上佐를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량露粱에서 스스로 물속으로 들어가 가부좌한 후에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밤이 되자 스님의 머리에서 방광放光하는 빛이 무지개와 같이 용문사에 뻗쳐서 놀란 30여명의 사람들이 달려와 그 이튿날 다비를 했다고 한다.
낙서당부도는 보리암이 있는 남해 금산의 정상인 봉수대 근처에 있는데 어떤 이유로 이곳에 그 스님의 부도가 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용문사라는 절이 원래 금산에 있었던 것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진정한 침묵은 무엇인가?
절의 이런 저런 내력을 듣고 싶어“스님 계십니까?” 문 앞에서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조금 있자 나온 스님에게 몇 마디 물었는데, 스님의 말은 간결(?)하기만 하다.
묵언黙言은 무엇이고 침묵沈黙은 또 무엇인가?
“장목지張牧之는 죽계竹溪에 은거하여 세상과 사귀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래서 손님이 찾아오면 대나무 울타리 사이로 어떤 사람인가를 엿보아, 운치 있고 훌륭한 사람인 경우에만 그를 불러 들여서 자기 배에 태우거니 혹 스스로 배를 저으면서 그와 담소하였다. 속된 사람들은 열이면 열 모두 그를 볼 수 없었으므로, 그에 대한 노여움과 비난이 끊일 날이 없었지만 그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 <<하씨어림>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으리라. “가장 뚜렷한 침묵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을 열고 얘기를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신정일의 <암자기행>에서
다솔사와 보안암,
“?신증동국여지승람? ‘형승’조에 “남쪽 끝의 요충이다. 굽어보면 기름진 들녘이 펼쳐져 있으며, 여러 산봉우리가 아름답다. 이구산尼邱山이 우뚝 솟아 있으며, 사수泗水가 가로질러 흐른다. 와룡산이 웅장하게ㅡ 서려 있고, 드넓은 바다가 아득히 펼쳐 있다.”라고 씌어 있는 사천은 와룡산․봉암산․향노봉 등의 산들이 연달아 있고 향노봉 자락에는 운흥사라는 옛 절이 있다. 또한 사천군 곤명면 조장리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 가던 주민 101명이 미군의 오폭과 총격으로 숨지거나 다친 역사적 상처가 남아 있다.
이곳 사천시 곤양면 용산리 와룡산 자락에 이 지역의 큰 절인 다솔사多率寺가 있다. 소나무가 많은 곳이라고 여기기 쉬운 다솔사는 한자 이름대로라면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라는 뜻이다. 소나무 숲과 측백나무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다솔사로 가는 길은 한적하지만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 길처럼 운치가 있는 길이다. 이 절은 신라 지증왕 4년인 503년에 인도의 스님 연기조사가 창건한 뒤 영악사라고 하였는데, 성덕왕 5년에 다솔사라고 고치고, 문무왕 16년인 676년에 의상스님이 영봉사라고 고쳤다가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가 다솔사라고 고쳤다. 그 뒤 1326년에 나옹스님이 중수하였고, 조선 초기에 영일. 효익 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숙종 때 복원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14년에 일어난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재건한 것이다. 현존하는 절 건물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83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양루大陽樓와 대웅전. 나한전. 천왕전. 요사채등 10여채의 건물들이 있다. 대양루는 1749년인 영조 25년에 건립되어 현재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2층 맞배집으로 견평 106평의 큰 건물이다. 또한 1978년 2월 8일에 대웅전 삼존불상에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할 때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나와 적멸보궁으로 증 개축한 뒤에 불사리를 그곳에 모셨다. 적멸보궁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열반에 들기 직전의 부처님 모습인 와불상을 모셨다.
이절 응진전은 일제 때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고 스님인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러 수도를 하였던 곳이고, 소설가 김동리金東里가 머물면서 <등신불等身佛>이라는 소설을 쓴 곳이기도 하며 김법린. 최범술. 김범부등이 은거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곳이다, 다솔사 절 근처에서 재배되는 죽로차竹露茶는 반야로般若露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명차인데 다솔사에 딸린 암자인 보안암은 다룬 곳에서 보기 드문 석굴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시대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굴의 외형은 판상의 사암질 활석을 단층식으로 쌓아올린 분묘형태이며, 평면은 방형이다. 석굴의 입구에는 미륵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목조전실을 지나서 2m정도의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석실이 있다. 중앙에 장대석을 대좌로 하여 결가부좌한 석조여애좌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이 본존의 뒤쪽 좌우에는 각 8구의 석조 나한좌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 석굴은 인공으로 조성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경주 석굴암과 군위 삼존석굴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석굴이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경상도’ 편
“순천이 자랑하는 관광지가 바로 순천만이고 순천만에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순천만 습지가 있다.
순천만이 주목받는 것은 제10차 람사르 총회의 공식 방문지로 지정된 데다 ‘세계 람사르 습지 NGO모임’이 순천에서 열리면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순천만 연안습지는 28㎢ 규모로 국내 최초로 2006년 1월 람사르 협약 습지로 등록됐다.
순천만에는 갯벌과 갈대, 철새가 조화를 이룬 습지가 청정하게 보존되어 있기 때문인데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순천만은 연간 200여종의 철새 6만~7 만마리가 찾고 있는데 이중 검은머리갈매기와 큰고니 등은 멸종위기 종”이라며 “많은 갯벌이 개발에 밀려 훼손됐지만 순천만은 원형을 잘 보전된 상황”이라고 한다.
넓게 펼쳐진 갈대밭사이로 바라 뵈는 순천만의 제방이 우리 시대의 빼어난 소설 중의 하나인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무대가 되었다.
“모든 것이 선입관 때문이었다. 결국 아내의 전보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나는 전보와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이 무진을, 외롭게 마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
“당신은 지금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어디선가 나도 그와 같이 길가에 세워진 팻말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조계산 서쪽 기슭인 송광면 신평리에 자리 잡은 송광사(松廣寺)는 한국 불교 조계종의 본산이며, 조선시대 초기까지 보조국사 지눌과 진각국사 혜심(瞋覺國師 慧諶)을 비롯한 국사 열여섯 명을 배출했던 곳으로 ‘불’의 통도사와 ‘법’의 해인사와 더불어 ‘승’의 절로 꼽혀 이 나라의 세 보배 사찰에 든다. 그런 옛 전통을 이으려는 듯이 이 절에 깊숙이 틀어박혀 수도에만 몰두하는 스님들이 적지 않다.
이 절터는 원래 신라의 혜린(慧璘)스님이 길상사(吉祥寺)라는 조그만 암자를 지었던 곳인데 고려시대인 1204년에 보조국사가 그곳에 절을 크게 일으켜 세우면서 송광사가 되었다. 여러 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특히 한국전쟁 때에 옛 절간은 거의 다 불타 없어졌다. 한때는 크고 작은 절간이 72채나 딸렸을 만큼 컸던 이 절이 근래 들어 많이 복구되었다. 송광사에는 국보 3점, 즉 목조삼존불감(木造三尊佛龕 국보 제42호)․고려 고종의 제서(梯書 국보 제43호)․국사전(國師殿 국보 제56호)을 비롯하여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經疏)?(보물 제90호)와 금동 요령(金銅搖鈴 보물 제176호) 같은 보물 12점을 간직하고 있어 절의 오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한편 조계산의 동남쪽 기슭인 쌍암면 죽학리에는 태고종의 본산이며 보물 400호로 지정된 쌍무지개 다리, 즉 승선교(昇仙橋 보물 제400호)로 유명한 선암사(仙巖寺)가 있다. 백제 성왕 때인 서기 529년에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지었던 그 근처의 한 암자에서 역사가 비롯되었고 고려 때에 대각국사(大覺國師)의 힘으로 크게 중창되었다고 알려진 이 절은 일주문․팔상전․대웅전․원통전․불조전 같은 32채의 건물들도 아름답지만 병풍처럼 둘러쳐진 조계산의 풍광을 보배로 삼고 있다.
전9-1송광사
고려 명종 때의 문신인 김극기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적적한 산골 속 절이요, 쓸쓸한 숲 아래의 중일세.
마음 속 티끌은 온통 씻어 떨어뜨렸고
지혜의 물은 맑고 고용하기도 하네.
그래서 그런지 선암사의 뒷간은 아름답기로 이름이 높은데, 이 뒷간을 각별하고 은밀하게 아끼던 건축가 김수근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측간”이라고 말하였다. 절의 들목에 비껴 있는 삼인당(三印塘)은 통일신라시대 달걀꼴로 쌓은 연못으로 가장자리가 돌로 논두렁같이 되었으며 가운데에 섬이 있는데, 호남지역 전통 연못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가 하면 이 절의 깊숙한 서고에는 대각국사가 그린 선암사 설계도가 있고, 평생에 걸쳐 방석 만드는 일을 기도하는 일로 여기고 손일을 하다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해봉(海峰)스님이 삼과 왕골로 엮었다는 해진 방석도 있다. 이 방석은 조형과 무늬가 우리나라 전통예술에 맞닿아 있으면서도 현대감각을 휘어잡을 만큼 아름답다.
봄이 가장 아름다운 선암사에는 몇백 년 나이를 먹은 매화나무 수십 그루와 영산홍 아홉 그루가 있다. 그래서 해마다 3월 하순에서 4월이면 온 경내가 매화 향기로 그윽하고, 5월이면 동백과 옥잠화․영산홍 꽃의 그 붉으면서도 빨갛지 않은 빛깔이 답사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9월이면 상사화가 절 구석구석에 피어나 마음을 시리도록 아프게 한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전라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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