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의 영암사지와 해인사가 있는 홍류동계곡의 소리길을 가다.
11월 15일(목) 하루기행으로 그 아름답기로 소문난 황매산 자락 모산재 아래의 영암사지와 가야산 자락의 해인사, 그리고 홍류동 계곡을 갑니다.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는 계절, 쓸쓸한 폐사지의 아름다움과 영암사지 석등 석탑의 진수를 보고 해인사가 있는 홍류동 계곡을 찾아갑니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에 있는 영암사지를 이 지역 사람들은 영암사 구질로 부르고 있다. 신라시대의 절터로서 사적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절은 해발 1,108m의 황매산 남쪽 기슭에 있는데 정확한 창건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강원도 양양에 있는 사림사 흥각선사비 조각에 새겨진 글자에 …영암사(靈巖寺) 수정누월… 이라고 기록된 것이 유일한 관련 기록이다.
그러나 고려 때인 1014년에 적연선사가 83세로 입적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이전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94년에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절터의 일부를 발굴 조사하여 사찰의 규모를 부분적으로 밝히게 되었는데, 그때 밝혀진 바로는 불상을 모셨던 금당과 서금당․회랑 등 기타 건물들의 터가 확인되어 당시의 가람 배치를 파악하게 되었다. 특히 금당은 개축 등 세 차례의 변화가 있었음이 밝혀졌고, 절터에는 통일신라 때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과 삼층석탑 그리고 통일신라 말의 작품인 귀부 2개가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영암사지에는 그 당시의 건물의 초석 즉 당시의 건물 축대석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발굴 결과 통일신라 말에서부터 고려시대 초기에 이르는 각종 기와편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그때 출토된 유물 가운데 높이가 11cm인 금동여래입상 1점은 8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어 영암사지의 창건연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케 해준다.
일주문도 없고 변변한 건물도 없이 그저 요사채만 지어진 영암사의 돌계단을 오르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영암사 삼층석탑이다.
영암사지 삼층석탑은 높이가 3.8m이며 보물 제 480호로 지정되었다. 2중기단위에 세워진 전형적인 신라양식의 방형 삼층석탑으로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단일석에는 가공한 4매의 석재로 구성하였다.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 1주씩을 모각하였고 그 위에 갑석을 얹었다. 갑석의 윗면에는 2단의 범을 조각하여 상층기단을 받치게 하였다. 탑신부는 각 층마다 옥신과 옥개를 별석으로 만들었고 1층탑은 약간 높은 편이며 2, 3층은 크게 감축되었다.
옥신석에는 우주를 모각하였고, 옥개석은 비교적 엷어서 지붕의 경사도 완만한 곡선으로 흘러내렸으며 네 귀에서 살짝 반전하였다. 처마는 얇고 수평을 이루었으며, 4단의 받침을 새겼다. 상륜부는 전부 없어졌고, 3층 옥개석의 뒷면에 찰주공이 패어 있다. 이 탑은 상층기단과 1층 탑신이 약간 높은 느낌은 있으나 각 부재가 짜임새 있는 아름다운 탑으로 탑신부가 도괴되었던 것을 1969년에 복원하였다.
영암사지 뒤편으로 기암괴석이 신록과 어우러진 황매산이 보이고 그 바로 앞에 아름다운 석등이 있다.
질서도 정연하게 천년의 세월을 견디어낸 석축에 통 돌을 깎아내서 계단을 만든 그 위에 영암사지 석등이 외롭게 서있다.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은 높이가 2.31m이며 보물 355호로 지정되어 있는 8각의 전형적인 신라석등 양식에서 간주만을 사자로 대치한 형식이다. 높은 8각 하대석의 각 측면에는 사자로 보이는 웅크린 짐승이 한 마리씩 양각되었고, 하대석에는 단판 8엽의 목련이 조각되었다.
상면에는 각형과 호형의 굄이 있고 한 개의 돌로 붙여서 팔각 기둥대신 쌍사자를 세웠는데, 가슴을 대고 마주 서서 뒷발은 복련석 위에 세우고 앞발은 들어서 상대석을 받들었으며 머리를 뒤를 향하였다. 갈기와 꼬리 그리고 몸의 근육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나 아랫부분에 손상이 많아 바라보기가 안쓰럽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비슷하게 꽃잎 속에 화형이 장식된 단판 8엽의 양련석이다. 화사석은 8각 1석이고 4면에 장방형 화창을 내었는데 주위에 소공(小孔)이 있어 창호를 달았던 듯하며 남은 4면에는 사천왕입상이 조각되었다. 옥개석의 처마 밑은 수평이며, 추녀 귀에는 귀꽃이 붙어 있고 상륜부는 전체가 없어졌다. 통일 신라 말기의 미술품을 대표할만한 우수한 작품인 이 석등은 1933년쯤 일본인들이 야간에 해체한 후 삼가에까지 가져가던 것을 마을 사람들(허맹도를 비롯한 청년들)이 탈환하여 가회면 사무소에 보관하였다가 1959년 원위치에 절 건물을 지으면서 다시 이전한 것이다. 그때 사자상의 아랫부분이 손상을 입었다. 속리산 법주사 쌍사자 석등과 겨룰 만큼 아름다운 쌍사자 석등과 금당의 기단에 새겨져 있는 선녀비천상을 바라보며, 나는 옛 사람들이 얼마나 지극한 정성으로 이러한 조형물들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을 금함 길이 없다. 지금은 그을음만 남아있는 이 석등에 한 시절 불이 켜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은은하게 불이 켜진 법당 안에서는 낭낭한 목탁소리, 염불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불심가득한 사람들이 이 절터로 몰려들고 그들의 기도소리가 이 절터를 메아리 쳤을 것이다. 사라진 절터에는 노오란 민들레 꽃 들과 봄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다. 그 꽃들의 아름다움과 향기에 취한 채 발길은 영암사지 귀부가 있는 서금당 쪽으로 향한다.
이곳 서금당 자리에는 2개의 귀부가 남아 있다. 이수와 비신이 없어진 채로 남아있는 동쪽 귀부는 1.22m이고 서쪽 귀부는 1.06m로서 보물 489호로 지정되어 있다. 법당지를 비롯한 건물의 기단들과 석등의 잔해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그 당시 사찰의 웅장함을 알 수 있는데, 이들 귀부는 법당지의 각각 동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 귀부가 서쪽 귀부보다 규모가 약간 큰데 똑바로 뻗은 용과 용두화된 귀두,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것 등이 거의 흡사하다. 동쪽 귀부의 등갑에는 전체에 육각으로 된 복각선문을 조각하였고 등 중앙에 마련한 비좌의 주변에는 아주 정밀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인동인권문을 조각하였다. 서쪽 귀부는 동쪽 귀부보다 평범하며 등갑에는 역시 복선갑문과 인동문을 조각하였다.
서금당 터를 돌아다보고 그 뒤편으로 난 산길을 오른다. 적적한 오솔길을 오르는 듯한 산길에는 철늦은 진달래 꽃이 어쩌다 눈에 띤다. 앞서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고 능선 쪽 바윗길에 사람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신정일의 <나를 찾아가는 하루 산행> 중에서
‘경상도에는 석화성石火星이 없다. 오직 합천의 가야산만 뾰족한 돌이 불꽃같이 늘어서 있으며, 공중에 따로 솟아서 대단히 높고 또한 빼어나다. .’고 기록되어 있지만 돌아다니다 보면 경상도 지역에도 그러한 산이 의외로 많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의 황매산이나 문경의 봉암사가 있는 희양산, 가야산 건너편의 매화산 등은 바위로 된 꽃송이들이 밤하늘에 운석처럼 펼쳐져 있는 산들이다.
골짜기 입구에 홍류동紅流洞과 무릉교武陵橋가 있으며, 바위에 부딪히는 시냇물과 반석이 수십 리에 걸쳐 뻗쳐 있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 최고운이 이곳에 신을 남겨 두고 갔는데, 간 곳을 모른다고 한다. 돌 위에 고운이 쓴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새로 쓴 것처럼 지금도 완연하다. 고운이 쓴 시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는데, 그 시가 가리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겹친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바쁘게 흐르는 물이 겹겹으로 된 산을 울리니,
지척 사이에 있는 사람의 말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항상 사람들의 시비 소리가 귓전에 들릴까 염려스러워,
짐짓 흐르는 물소리로 하여금 산을 다 덮도록 하였다.
『택리지』에 ‘임진왜란 당시에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덕유산은 모두 왜군이 들어오는 화를 면치 못하였으나, 오직 오대산과 소백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부터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곳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가야산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을 중심으로 거창군과 경상북도의 성주군과 고령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주봉인 상왕봉(1,430m), 두리봉(1,133m), 남산(1,113m), 단지봉(1,028m), 남산제1봉(1,010m), 매화산(954m) 등 1,000m 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고, 그 복판에 우리나라 3대사찰 가운데 하나인 해인사와 매화산 자락에 청량사 및 그 부속암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
가야산 일대에서 해인사에 있는 치인리 골짜기에 모이는 물은 급경사의 홍류동 계곡을 이루고, 동남방을 흘러내려와 가야면 황산리에서 낙동강의 작은 지류인 가야천이 된다. 가야산은 예로부터 ‘조선팔경’ 또는 ‘12대명산’의 하나로 꼽혀왔다. 1966년 가야산 해인사 일원이 사적 및 명승 제5호로 지정되고 1972년 10월에 다시 가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가야산의 이름은 가야산 이외에도 우두산․설산․삼왕산․중향산․지달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한다. 『택리지』에 가야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떠나 있으면서도 그 높고 수려함과 삼재가 들지 않는 영험함을 말하여 명산으로 불렸다.
한국의 명산에는 산신(山神)이 있는데, 가야산에 있는 가야산신은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여신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가지에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에를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 아진아시왕, 뇌질청에는 금관국의 시조 수로왕의 별칭이라 했다. 따라서 가야산의 산신 정견모주는 가야지역의 여신이었을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가야산 형승은 천하에 뛰어나고 지덕은 해동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수도할 곳이다.’라고 실려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큰 절이 그렇지만, 특히 해인사는 창건과 그 뒤 여러 차례의 중창이 있었는데 모두 국가의 각별한 지원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신라 애장왕이 그러했고, 고려 태조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발원, 그리고 세종․세조․성종의 중창 지원은 각별한 것이었는데, 그렇게 국가의 재정을 넉넉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해인사가 민족의 고귀한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판을 천여 년 가까이 보전함으로써, 법보종찰의 명성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야산 해인사는 또 국가가 환란에 처했을 때 일어난 불교 호국전통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민족의 보물인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이를 봉안한 장경각만은 한번도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산속에는 해인사海印寺가 있다. 신라 애장왕哀莊王이 죽어서 염을 한 뒤에, 다시 깨어나니 명부의 관원에게 약속한 발원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구입해서 배에 싣고 왔다. 목판에다 새긴 뒤 옻칠을 하고 구리와 주석으로 장식한 다음, 장경각藏經閣을 120칸을 지어서 보관하였다. 지금 일천여 년이 되었지만 판이 새로 새긴 것 같다. 날아가는 새도 이 장경각을 피해서 기와지붕에 앉지 않는다고 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유가儒家의 경전은 비록 내부의 깊은 궐내에 있다고 하여도 날아가는 새가 집 위를 지나가지 않을 리가 만무하다. 불교 경전은 이와 같이 신기하니,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해인사 서북쪽이 가야산 상봉이다. 사면의 돌이 깎아지른 듯 하여 사람이 올라갈 수 없다. 산 위에는 평탄한 곳이 있을 것 같지만 알 수가 없다. 그 위에는 항상 구름기가 자욱하게 서려 있으며, 초동과 목동들은 가끔씩 산봉우리 위에서 풍악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또한 절에 있는 스님들의 말에 의하면 짙은 안개가 덮이면 산 위에서 말 발자국 소리가 날 때가 있다고 한다..”고 말한다.’ 이는 <택리지>의 기록이다.
조선중기의 학자였던 한강 정구(鄭逑)는 『가야산 기행』에서 ‘산꼭대기에 올라가 눈을 식히고 가슴을 펴보는 것’을 강조하였고, 산골짜기에서 푸른 물이 맑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는 소슬한 경치를 보고 ‘가슴을 시원하게 씻겨준다.’고 느낌을 표현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간직하고 있는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삼보사찰’ 중의 하나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대로 통도사에는 석가모니의 사리가 모셔져 있고, 해인사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팔만대장경이 봉인되어 있으며, 송광사에서는 고려 이래로 국사를 지낸 열여섯 명의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우리 산하>에서
데모스 여행사의 일정 부분 후원으로 마련되는 이 행사에 참여하실 분들은 미리 신청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행사와 달리 이십분을 앞당긴 이른 여섯시 40분에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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