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늦은 가을에 성주사와 무량사를 거닐다.

산중산담 2012. 11. 14. 23:30

늦은 가을에 성주사와 무량사를 거닐다.

 

11월 25일 일요일 가을이 끝자락이자 겨울의 초입에 철지난 바닷가인 무창포와 폐사지, 성주사지와 무량사 그리고 부여를 찾아갑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나뭇잎이 몇 잎 남아 있어도 좋고, 겨울을 기다리는 빨ㄹ간 홍시 몇 개가 남아서 길손을 반겨줄지도 모를 하루 여정은 쓸쓸함과 포근함이 교차하는 기이한 답사가 될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들이 행복이라고 부르는, 불행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것들조차 우리들이 삶에서 터득한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 편의에 의해서 그렇다고 합의한 것일 뿐이지 1더하기 1이 2가 되는 것처럼 정확한 답은 아닐 것이다.

산을 오르고 절을 둘러보고 폐사지에서 나른한 한 때를 보낸 후 바다에 온 몸을 내맡기고자 했던 애초의 계획은 전화 한통화로 바뀐다. “10시 40분 무창포 바다가 갈라진다는데 일정을 변경시킬 수는 없으십니까?” 그렇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가 갈라진다는데 우리들의 어두운 마음을 추스르고 모처럼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다는데 일정을 바꾸는 것이 그리 대수랴,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다.

이것마저도「세낭쿠르」의 표현을 빌린다면“지도 이외의 그 어떤 안내자도 없는 여행은 그가 지나는 장소들에 대한 추억을 고정 시키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무기도 아닌 의도적인 잘못이다”」일수도 있고 다시 덧붙여서“나는 방향을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할 수 있는 한 길을 잃으려고 한다.”그럴 수도 있다. 자유는 제멋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자유는 방임이며, 자유는 그 때 그 때 선택되어지는 그 무엇일 것이다.

 

○바다가 갈라지는 무창포 해수욕장

보령시 운천면 관당리와 독산리 일원에 걸쳐있는 무창포 해수욕장은 원래 조선시대에 군창지였다. 1928년 서해안에서 최초로 해수욕장이 개장되었으며 백사장의 길이가 1.3km에 이른다. 경사가 완만한 무창포 해수욕장은 인근 해안가에 해당화가 만발하는 조용하기 이를 데 없다는 해수욕장이다. 황사가 걷힌 길을 차는 제 속력으로 달려서 당재를 지난다. 그 옛날 이 고개 길에는 굿을 하던 당집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돌로 만든 장승 한 쌍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들어있고 간드리마을을 지나자 무창포다.

이른 봄날임에도 불구하고 해수욕장엔 발 디딜 틈도 없다. 3월 29일 음력으로 삼월 초이틀 10시 무렵 무창포 바다가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진다는 것이 언론에 알려진 연유이다. 빼곡히 들어 찬 사람들의 숲을 지나 바닷길에 들어선다. 벌써 무창포 백사장에서 솔숲우거진 석대도 까지의 바다는 그 깊은 속살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바닷길을 따라 사람들의 물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사람들은 몸을 구부린 채 조개며 성게며 하는 바닷 고기를 잡느라 여념이 없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라 알려진 진도와 무창포에서 석대도까지의 바닷길이 세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지만 모세의 기적이란 다른 게 아니다. 지형적인 요인과 태양의 위치가 일 년 중 가장 가까워질 때 일어나는 한 현상으로 바다 밑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돌출해 있던 부분이 바다가 갈라지며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길은 성주사(聖住寺) 터로 뻗어 있다. 구산선문(九山禪門)중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사찰이었던 성주사는 보령시 미산면 성주리 성주산(聖住山) 아래에 있다.「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 법왕 때에 창건된 오합사(烏合寺)가 이 사찰이라는 사실이 1960에 출토된 기와조각에서 확인되었으며,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 적마가 나타나 밤낮으로 이 절을 돌아다니면서 백제의 멸망을 예시해 주었다고 한다.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귀국한 무염국사가 김양의 전교에 따라 이 절을 중창하였고 주지가 되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승암산 성주사 사적」에 기록된 바로는 성주사의 규모를 불전 80칸에 행랑채가 800여 칸 수각 7칸 고사 50여 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000여 칸에 이르렀을 것이다. 성주산파의 총 본산으로 크게 발전하였던 이절은 한 때 이천오백 명 쯤의 승려들이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고 하지만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뒤 중건하지 못한 채 폐사지만이 사적 제307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이 성주사가 번창하였을 당시 절에서 쌀 씻은 물이 성주천을 따라 10 리나 흘렀다고 하는데 절터는 간데없이 석조물만이 절터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최치원의 사산비문이 남아있는 성주사 터

이절에는 최치원의 사산비문중의 하나로써 국보 제8호로 지정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은 하동 쌍계사의 진감선사 부도비와 경주 초월산의 대승국사비 그리고 봉암사의 지증대사 부도비를 말하는데 지증대사 부도비문은 신라 선종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글로 알려져 있다. 낭혜화상의 깨달음은 깊고도 깊었다고 한다.

그 당시 당나라의 여반선사는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이와 같은 신라 사람을 만나본적이 없다 뒷날 중국이 선풍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중국 사람들이 신라로 가서 선법을 물어야 할 것이다.”라고 칭찬했던 낭혜화상의 비는 신라 진성왕 4년에 세워졌다. 그때의 것으로는 가장 큰 비로 전체높이 4.5m에 달하는 거대한 외형에 듬직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를 발휘하여 신라시대의 석비를 대표하는 이 비는 귀부의 일부에 손상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특히 귀부의 구름무늬나 이수도 그렇지만 4면에 운룡문은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이 비에는 낭혜화상의 행적이 모두 5천여 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적혀 있다. 글은 최치원이 지었고 글씨는 최치원의 사촌동생이었던 최인연이 썼는데 고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성주사지에는 이 탑비 외에도 신라 말에 건립된 4기의 석탑이 있다. 보물 19호인 성주사지 오층석탑과 보물 20호인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 및 조각수법이 뛰어난 보물 47호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 그리고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40호인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과 석불입상이 있다. 바람한 점 없는 폐사지의 탑 밑에 앉아 백제의 기왓장을 들춰내며 한나절 보내는 것도 운치 있는 일일 것이지만 마음뿐이고 길은 다시 만수산 가는 길로 접어든다. 만수산 입구에 서 있는 나무장승은 여전히 변함없다.

 

여정은 만수산 무량사에 이른다.

하나 둘씩 자연으로 돌아가고 또 세워지는 장승들의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김시습(金時習)을 만나러 가고 그 김시습은 오백여년의 세월 저편에서 부도로 남아 우리를 맞는다.

조선초기의 학자이며 문장가로 당대를 풍미했던 김시습은 자는 열경이고 호는 매월당 법호는 설잠으로 1435년에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세상에 소문이 자자했던 김시습은 ‘한번 배우면 곧 익힌다’하여 이름도 시습으로 지어졌으며 당시의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에게 “장래에 크게 쓰겠다”라는 전지까지 받았다. 그는 13세까지 수찬 이재전과 성균관 대사성, 김반별 그리고 윤상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비롯 예기와 제자백가 등을 배우다가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머리를 깎고 방랑길에 접어들었다.

관동지방과 서북지방뿐만 아니라 만주벌판과 전주, 경주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전주에서도 그가 한겨울을 보냈다는 연유 탓인지 전주객사 동익헌쪽에 매월당이라는 누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헐린 채 흔적도 없다.

 

매월당 김시습이 입적한 절

김시습은 31세에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 용장사에 금오산실을 짓고, 그 집의 당호를 매월당이라 붙인 후 그곳에서 37세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와 여러 책들을 지었다.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여러 절들을 전전하던 김시습은 47세 되던 해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아내를 맞기도 했으나 폐비윤씨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으로 방랑의 길에 나선다.

훗날 김시습전을 지은 율곡 이이는 김시습을 일컬어 “한번 기억하면 일생동안 잊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읽거나 책을 가지고 다니는 일이 없었으며, 남의 물음을 받는 일에는 응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재주가 그릇 밖으로 흘러넘쳐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을 만큼 되었으니 그가 받은 기운경청은 모자라게 마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윤기를 붙들어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풍성을 듣는 사람들은 겁쟁이도 융통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이 되기에 남음이 있다.“라고 하였다. 다시 이이는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그 업적은 한이 없었을 것이다”라면서 불우했던 그의 한평생을 애석해 했다.

김시습은 오십대에 이르러서야 인생에 대하여 초연해질 수 있었다. 그는 이 나라 구석구석을 정처 없이 떠 돌아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이 곳 무량사였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는 “네 모습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속에 버릴 지어다”라고 자신을 평가하였다. 무량사에는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불만이 가득한 김시습의 초상화가 지나는 길손들을 맞고 있다. 김시습은 59세에 이 절 무량사에서 쓸쓸히 병들어 죽었다.

그는 죽을 때에 화장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으므로 그의 시신은 절 옆에 안치해 두었다. 삼년 후에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었다. 김시습의 안색은 생시와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어 그의 유해를 불교식으로 다비를 하였다. 이 때 사리 1과가 나와 부도를 세웠다. 그 뒤 읍의 선비들은 김시습의 풍모와 절개를 사모하여 학긍 결에 사당을 지은 뒤 청일사라 이름을 짓고 그의 초상을 옮겨 봉안하였다.

만수산으로 오르는 산길은 부도 밭에서부터 시작된다. 봄물이 드는 헐벗은 나무사이로 진달래꽃이 듬성듬성 피어있다. 그래 내 어린 시절에 진달래꽃 만개한 꽃그늘에는 나병환자가 숨어 있다가 어린애 간을 빼먹는다는 소문이 떠돌았었지. 나는 진달래 꽃 잎 따서 먹으며 옛 기억에 젖어든다. 상큼한 그 향기에 취해 오르는 산길은 순조롭다. 저만치 아래로 무량사의 절집들이 보이는 등성이 소나무숲 그늘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봄바람은 따사롭게 불어온다. 더러는 나무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고 나는 소나무를 쓸어안는다. 까칠까칠한 소나무의 등껍질이 내 가슴을 열고서 들어오고, 봄이 움트는 소리 들린다.

올라갈수록 더 넓게 드러나는 산들은 봄을 재촉하고 이십여 분을 더 올랐을까, 드디어 만수산정상이다. 옅은 구름과 햇빛에 가려 흐릿하게 앞산이 보이지만 서해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어슴프레 성주산(680m),성대산(631m), 조공산(308m), 월하산이 지척이다. 그러나 이경자씨에게 만수산 정상에 서면 보일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바다는 보이지 않으니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나는 나뭇가지에 몸을 누인다. 마른나무가 부스럭거리며 내게 말한다. “들리는가, 울부짖는 저 갈매기 소리, 보이는가, 출렁거리며 부서지는 저 파도소리” 박연숙씨가 가져온 방울토마토를 나누어 먹을 때 니체의 고독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리는 듯 했다.“나는 여행자 산을 타는 사람이다 보다 높이 오르기 위하여 나는 더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그렇다 니체의 그 말처럼 우리들 역시 더 높게 오르기 위하여 다시 내려가야 할 것이다. 올라온 길로 내려가지 않고 다른 것을 택한다. 단숨에 내려갈 듯싶던 길이었는데 아차 하는 순간에 끊어질 듯 이어지던 길이 사라지고 말았다.

<열하일기>의 ‘금료소초’에는 저자가 미상인 <물류상감지物類相感志>라는 책에 실린 글이 들어 있다. “산길을 가다가 길을 잃을 염려가 있을 때는 향충向蟲(북쪽을 향하고 있는 곤충) 한 마리를 잡아서 손에 쥐고 가면 길이 막히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지만 곤충을 잡아서 시험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올라갈 수도 없고, 그냥 내려가는 수밖에 없는 길 없는 계곡 길, 그것도 나뭇잎이 수북하게 쌓인 미끄러운 길이다. 그 길을 내려가며 스페인의 시인 ‘안토니오 마차도‘의 시 구절을 떠 올리며 애써 자위한다. “여행자여 길은 없나니, 길은 걸어서 만들어 가나니,” 을 힘들여 내려가니 절 뒤안이다. 노란 꽃망울이 맺힌 무우 장다리를 꺾어 먹으며 무량사에 들어섰다.

 

○높이 오르기 위해선 더 아래로 내려가야 하고

무량사! 무량이란 셀 수 없다는 말의 한 표현으로서 목숨을 셀 수 없고 지혜를 셀 수 없는 것이 바로 극락이니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곳이 무량사라고 할 때 내가 잠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그 순간마저도 셀 수 없는 지극히 오래인 그 인연에 연유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수산(575m)기슭에 자리 잡은 무량사는 사지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하였고 신라 말 고승인 무염국사가 머물렀다고 하지만 범일국사(810-889)는 문무왕 때(661-680)와 훨씬 동떨어진 후대의 인물로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명주굴산사에서 주석하다가 입적하였기 때문에 그가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 때 크게 중창한 것으로 보여 진다.

조선시대엔 선승으로 이름 높은 김제출신의 진묵대사가 이절 무량수불에 점안을 하였고, 이 만수산 기슭에서 나는 나무열매로 술을 빚어 마시며 몇 수의 시를 남겼다. “하늘을 이불 땅을 요 삼아 / 산을 베개 하여 누웠으니 / 달은 촛불 구름은 병풍 / 서쪽바다는 술항아리가 되도다. / 크게 취하여 문득 춤을 추다가 / 내 장삼을 천하곤륜산에 걸어두도다.” 그러나 진묵대사는 당시 조선에 휘몰아 쳤던 기축옥사 당시 그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살았던 정여립과의 관계가 있을법한데 아무런 흔적 하나 남아있지 않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서산대사 휴정이나 사명당 유정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온몸을 다 바쳐 나라를 위해 일어났을 때에도 진묵대사는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정성을 다 하였던 것을 우리들은 무엇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진묵대사는 이절과 완주 서방산의 봉서사 그리고 모악산의 수왕사를 비롯 전라도 일대의 절들에 기행과 술에 얽힌 일화들을 많이 남겼다.

 

이 무량사는 임진왜란 당시 크게 불탔으며 17세기 초에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있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10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고 석등의 선이나 비례가 매우 아름다운 무량사 석등(보물 233호)이 먼저 들어오고 그 뒤에 오층석탑이 있다. 오층석탑(185호)은 창건당시부터 이 절을 지켜온 것으로 추측되는 데 완만한 지붕돌과 목조건물처럼 살짝 반전을 이룬 채 경박하지 않은 경쾌함을 보여주는 모습의 처마선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장하리 삼층석탑, 은선리 3층석탑들과 같이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백제계의 석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탑의 제1층 몸돌에서는 금동 아미타 삼존불좌상이 발견되었고 5층 몸돌에서는 청동합속에 들어있는 다라니경과 자단목등 여러 점의 사리장치가 나왔다.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에 중건한 무량사의 대웅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금산사의 미륵전, 화엄사의 각황전, 그리고 마곡사의 대웅보전처럼 특이하게 지어져 있다. 조선 중기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낸 불교 건축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인 2층 목조건물은 밖에서 보면 이층 건물이지만 내부는 위아래층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고, 하나로 통하여 있다. 아래층 평면은 정면 5칸에 측면이 4칸이며 기둥의 높이는 14.7m나 된다. 중앙부의 뒤쪽에 불당이 마련되어 있고 그 위에 “소조아미타삼존불(5.4m)”이 모셔져 있고 좌우에는 관세음보살(4.8m)과 대세지보살이 배좌하고 있는데, 아미타삼존불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불로는 동양제일을 자랑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 불사의 복장 유물에서 발원이 나와 1633년에 흙으로 빗은 아미타불임을 분명히 밝혀진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이 절에는 1627년에 그린 괘불과 무량사 미륵보살도와 동종이 있다. 절을 둘러보는 사이 햇살이 뉘엿뉘엿해진다. 돌아가야지 그리고 갔다가 다시 오리라 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옮겨「만수산 무량사」라고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나설 때 매월당의 시 한수가 필름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림자는 돌아다 봤자 외로울 따름이고

갈림길에서 눈물을 흘렸던 것은 길이 막혔던 탓이고

삶이란 그 날 그 날 주어지는 것이었고

살아생전의 희비애락은 물결 같은 것이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