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백마고지와 노동당사.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철원에 갔다.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김영구 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철원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철의 삼각지, 백마고지, 아이스크림 고지, 김일성 고지 등의 싸움터다. 한국전쟁 때 치열한 격전지였던 이곳 비무장지대 내 월정역에는 부서진 채 고철이 되어버린 열차 한 량이 남아 있다. 철원평야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진 이곳은 철원군과 김화군·평강군을 잇는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였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는 수도고지 전투, 지형능선 전투, 백마고지 전투가 있다. 그중에서도 철원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산봉우리인 백마고지에서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 동안 벌어진 싸움은 철원군 동송읍이 평리에 세워진 ‘백마고지전투전적비’에 적힌 대로 포탄 가루와 주검이 쌓여서 무릎 높이까지 채울 만큼 치열하였다. 해발 395미터인 이 산봉우리는 열흘 동안 주인이 스물네 차례나 바뀌면서 1만 4000명에 가까운 군인이 죽거나 다쳤고, 쏟아 진 포탄만 해도 30만 발이 넘었다.
백마고지에서 건너다보면 봉우리 세 개가 다정하게 서 있는 삼자매봉이 있고 철원평야 언저리에는 철원평야를 빼앗기고 김일성이 사흘 동안을 울었다는 김일성고지가 있다. 노동당사는 그날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 있고, 월정역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표어가 쓰인 부서진 열차가 휑하니 서 있다.
청춘의 시절,
33개월 15일
군대생활을 했던 철원,
2021년 11월 21일
김영규선생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금세 가고 싶은 철원의 한탄강을
내년엔 한발 한발 다시 걸어야겠다
한탄강변의 철원을 가다.
유월 셋째 주 토요일에 한탄강변에 자리 잡은 철원을 갑니다. 금강산 가는 길에 있는 정자연은 겸재 정선의 그림 속에 남아 있는 명승지입니다.
백마고지와 노동당사, 도피안사를 거쳐 고석정, 그리고 순담으로 이어질 이번 여정에 참여 바랍니다.
“이곳 평강에서 알려진 명소가 정자연亭子淵이다. 김화현 당탄 하류에서 흘러와 한탄강이 되어 철원으로 흐르는데, 푸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그 길이가 5 리나 되며 돌무늬가 그림처럼 뒤섞여 있다. 아래에는 맑은 호수가 있는데, 깊이는 배를 띄울만하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이곳 정자연을 지나다 한 눈에 반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가 바로 겸재 정선鄭敾이다.
“정선은 조선 땅을 발로 탐승하고, 기억에 의존하여 머리로 그름을 그린 진경화가다. 실경을 변형하는 독특한 조형어법으로 보건데, 울림이 큰 가슴과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누구보다 조선 땅을 지독히 사랑한 결과일터다. 정선이 완성한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대지, 나아가 조선의 명승을 통해 더 나은 이상을 꿈꾼 자들의 회화 형식이다.“
라고 평한 미술사학자 이태호 선생의 말이 빈 말이 아님을 이곳을 그린 겸재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병연의 제화시題畵詩에 나오는 정자연亭子淵은 강원도 평강군 남면 정연리에 있다. 겸재 정선은 그의 나이 36세(1711) 되던 해에 정자연에 들렀을 때, 지금의 풍광과 다른 점은 석벽 건너편에 잘 지어진 기와집 몇 채가 있다는 것이다. 소나무 몇 그루가 늘어서 있고 한 쪽 귀퉁이 사리로 서 있는 버드나무 한 그루, 그 나무 사이로 한 사람이 서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몇 백 년 전에 그려진 한 폭의 그림으로 그 옛날의 풍경을 회상해볼 따름이다.
그 쇠둘레의 땅 철원
조선시대에 철원도호부(鐵原都護府)가 있던 철원군이 ?신증동국여지승람? ‘건치연혁(建置沿革)’편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래 고구려의 철원군이다. 모율동비(毛乙冬非)라고도 한다. 신라의 경덕왕이 철성군(鐵城郡)이라고 고쳤다. 뒤에 궁예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옛 땅을 침략해 차지하고 송악군으로부터 와서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궁실을 지어 더할 수 없이 사치하게 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가 즉위하게 되어서는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철원을 고치어 동주(東州)로 하였다. 충선왕 2년에 모든 목을 재정비할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낮추어 부로 하였고, 조선 태종 13년에 통례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다. 세종 16년에는 경기로부터 옮겨다가 본도에 예속시켰다.”
“함경도로 가는 길 수백 리, 안팎의 온 강산이 또렷이 내 눈 안에 들어오네.”이이만李頤晩의 기記에 실린 글이다. 산의 모양이 날아가는 학鶴의 형체인 금학산金鶴山(947)이 동송읍 뒤편에 자리 잡아 진산이 되고, ‘한국의 그랜드캐년 이라고 부르는 한탄강이 흐르며, 철원평야라는 강원도에서는 보기 드문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이 ’쇠 둘레‘의 땅 철원이다.
그런 연유로 경원선 열차가 다닐 때에 철원의 서남쪽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열차의 연기를 평강지방에 이르러 사라지기 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철원의 역사에서 궁예의 태봉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통일한국이 이루어진다면 맨 먼저 할 일이 휴전선 가운데에 있는 궁예도성을 발굴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궁예란 자는 신라의 왕자로서 젊었을 대부터 무뢰한(無賴漢)이었고, 장성하여서는 안성․죽산 사이의 도둑이 되어 고구려와 예맥지역을 차지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성품이 잔인무도하였으므로 부하에게 쫓겨나고 태조 왕건이 드디어 군중에게 추대되었는바, 이것이 고려를 건국하게 된 시초였다”라고 기록하였는데,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이 되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단순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 탓에 궁예는 어느 기록에서는 부정적으로 그려져 있는 게 사실이다.
철원
궁예가 개성․철원지역을 중심으로 후고구려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던 때가 893년이다.
궁예의 한이 서린 궁예도성
궁예는 905년 도읍을 철원으로 옮긴 뒤 경기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충청도까지 세력을 뻗치며 후백제의 견훤과 자웅을 겨루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의 부하였던 왕건이 호족들과 연합하여 궁예를 축출했다. 905년부터 왕건이 고려를 세운 918년까지 열다섯 해 동안 태봉국의 서울로서 한 나라의 중심지였던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의 비무장지대에는 풍천원(楓川原)이라는 들에 터만 남아 있다. 궁예가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御水井)은 그 흔적만 있고 두 겹으로 쌓았던 성은 거의 다 허물어져 일부분만 남아 있다. ?용재총화(傭齋叢話)?는 “철원은 궁예가 차지하여 태봉국을 세웠던 곳인데, 지금도 경성의 옛 터와 궁궐의 층계가 남아 있어 봄이면 화초가 만발한다. 지세가 막혀 강하(江河)는 조운이 어렵다”고 궁예가 도읍을 정했던 철원 땅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빼어난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궁왕 대궐 터에 오작이 지지괴니 천고흥망을 아는다 모르는다”라고 읊었다.
강원도 내에서 가장 넓은 평야를 자랑하는 철원평야는 비무장지대를 지나 평강고원으로 이어진다. 금학산․오성산․대성산․백암산․명성산 등이 있으며, 그 중에 명성산은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들어가 울었다는 데에서 연유한다.
철원평야를 휘감아 도는 강이 한탄강이다. 한탄강은 강원도 평강군 현내면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철원군 갈말면의 북쪽에서 남대천을 합친 뒤 갈말면과 어운면, 동송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남쪽으로 흘러, 경기도 포천군 전곡읍을 지나 임진강으로 흘러가는 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한탄강을 석체천(石切川)이라 기록하였는데, “양쪽 언덕의 석벽이 모두 계석체와 같아 ‘체천’이라 했다”는 기록이다. 또한 한탄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철원이 태봉국의 도읍지였던 어느 날 남쪽으로 내려가 후백제와 전쟁을 치르고 온 궁예가 이곳에 와서 마치 좀먹은 것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것을 보고는 “아하, 내 운명이 다 했구나” 하고 한탄을 하여 그때부터 이 강을 한탄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구멍이 뚫린 화산석을 두고 글을 쓴 사람이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이학규李學逵였다. “철원에서 나는 돌에는 구멍이 많다. 큰 것은 떡시루와 도끼 구멍 같고, 작은 것은 피리 구멍만하다. 가볍고 비어 있는 것은 옹기와 비슷하다. 요컨대 주춧돌이나 무덤의 비속으로도 맞지 않으며, 중국에서 n나는 유명한 태호석太湖石과 요봉석堯峯石 같은 기이한 볼거리도 없다.”
또 하나는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며 싸웠던 한국전쟁 때 수많은 젊은 생명들이 스러져간 곳이라 해서 한탄강이라 불렀다는 슬픈 내력도 있다.
그 강물에 기대어 펼쳐진 철원평야는 분단이 되면서 심한 물 기근을 겪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철원평야에 물을 대주던 봉래호의 물줄기를 황해도 쪽으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그 뒤 철원평야는 물이 모자라서 점차로 황폐해지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60년대에 용화저수지와 하갈저수지 등을 만들었고 70년대에는 둘레가 몇십 리에 이르는 토교저수지를 포함한 저수지 여러 개를 새로 만들어 다시 물이 닿는 땅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물이 모자랐는데, 한탄강의 물을 퍼 올릴 수 있는 기계를 곳곳에 설치한 뒤부터 철원평야의 물 걱정은 줄어들었고 지금은 기름진 땅이 되었다. 물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논 한 평에 500원쯤 했다는데, 지금은 여러 배로 뛰어올랐고 철원평야에서 생산되는 ‘철원 오대쌀’이 그 품질이 뛰어나다.
철원에 관한 ?택리지?의 기록을 보자.
“철원 고을이 비록 강원도에 딸렸으나 들판에 이루어진 고을로서 서쪽은 경기도 장단과 경계가 맞닿았다. 땅은 메마르나 들이 크고 산이 낮아 평탄하고 명랑하며 두 강 안쪽에 위치하였으니 또한 두메 속에 하나의 도회지이다. 들 복판에 물이 깊고 벌레 먹은 듯한 검은 돌이 있는데 매우 이상스럽다.”
한탄강변에서는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현무암, 즉 곰보돌이 있다. 화산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굳어 이루어진 곰보돌은 가볍고 모양새가 좋아 맷돌이나 절구통을 만들거나 담을 쌓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철원에 경원선 철도가 놓인 것은 1914년이었다. 서울과 원산․함흥을 잇는 철도가 생김으로써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콩․명주실을 비롯 동해안에서 나는 싱싱한 어魚 자원들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그 뒤 1936년에는 경원선이 지나는 철원역에서 금강산의 장안사에 이르는 전기철도가 개통되었다.
철의 삼각지
한편 철원 하면 떠오르는 것이 철의 삼각지․백마고지․아이스크림 고지․김일성고지 등의 싸움터이다. 한국전쟁 때에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인 이곳 비무장지대인 월정역에는 가다가 부서진 채 고철로 남아 있는 열차 한 량이 남아 있다. 철원평야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이곳은 철원군과 김화군․평강군을 잇는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였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로 수도고지 전투, 지형능선 전투, 백마고지 전투를 들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철원 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산봉우리인 백마고지에서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 동안에 벌어진 싸움은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에 세워진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에 적힌 대로 포탄가루와 주검이 쌓여서 무릎을 채울 만큼 치열했다. 높이가 395미터인 이 산봉우리는 열흘 동안에 주인이 스물네 차례나 바뀌면서 1만4천 명에 가까운 군인이 죽거나 다쳤고 쏟아진 포탄만 해도 3십만 발이 넘었다고 한다. 백마고지에서 건너다보면 봉우리가 세 개 다정하게 서 있는 삼자매봉이 있고 철원평야 언저리에 철원평야를 빼앗기고 김일성이 사흘 동안을 울었다는 김일성고지가 있다.
철원 노동당사
노동당사는 그날의 상혼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 있고, 월정역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표어가 쓰여 진 채 부서진 열차만 서 있을 뿐이고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도선국사가 세운 도피안사到彼岸寺가 있다. 도피안사는 속세를 넘어 이상 세계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지닌 절집으로 이절에 국보 제 63호로 지정되어 있는 우리나라 철불의 대표적 유물 가운데 하나인 철불이 있다. 신라 경덕왕 5년인 865년에 ‘철원지방의 향도香徒 1500여명이 결연結緣하여 조성했다.“ 라는 기록과 함께 <함통 6년 기유 정월 咸通 六年 己酉 正月>이라는 문구가 철불 뒷면에 남아 있어 그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원래 이 철불은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려 했던 불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운반 도중 없어졌는데 나중에 찾고 보니 현재의 도피안사 자리에 안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선국사는 이곳에 있기를 원한 불상의 뜻에 따라 이 자리에 절을 창건하고 철불을 모셨는데, 그가 세운 이 나라 800여개의 비보사찰중 하나라고 한다. 도피안사가 들어선 화개산은 물위에 떠 있는 연꽃의 연약한 모습이라 철불과 석탑으로 산세의 허약함을 보충하고 외부로부터 오는 침략에 대비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강원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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