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5백 삼십 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는다.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에서 가을이 절정인 10월 7일(일요일) 섬진강을 찾아갑니다. 2012년 전북 방문의 해에 임실군의 후원을 일부 받아 진행하는 이 행사는 <김용택 시인과 함께 하는 낭만의 길>이라는 주제로 실시됩니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 선생님의 강연에 이어 섬진강 오백삼십리 길을 샅샅이 누비고 다닌 신정일 대표와 함께 섬진강을 걷고 치즈축제에 참가하여 게 될 이번 행사에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강 건너 두무골은 옆에 바랑산이 있는데,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중이 바랑을 벗어놓고 말(斗)을 가지고 춤을 추는 형국이라고 하는데, 그 마을에 덕치초등학교가 있다. 그 학교 졸업생인 김용택 시인이 오랫동안 선생님으로 근무하며 시를 썼던 곳이다.
마을 앞에 서있는 소나무들은 일제 공출을 하느라 송진을 빼냈던 흔적이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로 남아있고 모정 앞의 느티나무는 온갖 풍진 세상을 견디어낸 듯 속살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빈집이 여기저기 보이는 물우리 마을에서 닭 우는 소리 들린다. 새벽마다 꼬끼오하고 울어서 새벽 시간을 알려주었던 닭들이 시계의 기능이 소용없어서인지 대낮에도 울고 있다. 박준열씨는 이 물우리에 집 한 채 사두고 한가할 때마다 쉬었다 갔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그 말을 듣는 나도 역시 그랬으면 좋으련만 그러한 날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마을 입구에서 일중천이 섬진강에 합류된다. 월파정으로 가는 길목에는 월파가든이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고 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월파정에 도착한다. 옛날에 여러 번 와서 보았으나 눈 덮힌 월파정은 너무 새롭다. 이곳 월파정 아래에 가마쏘가 있고 그 아래를 큰 여울이 흐른다. 하늘 못 본 바위 서쪽에는 맘마바우가 있고 강 건너 성미산과 회문산이 안정리에 들어가는 골짜기가 보인다. 금강을 걸어갈 때 김재승 회장이 “아무리 산길이라도 대대병력이 걸어가면 길이 만들어집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봄눈길이라선지 우리 몇 사람이 걸어간 길을 뒤돌아보니 길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서산대사 휴정은 “눈 쌓인 길을 어지럽게 걷지 말라 뒤따라올 사람들의 표상이 되느니라.”라고 말했을 것이다.(...)
오선위기의 명당자리가 있는 회문산
산중에 바위로 된 천연의 문이 있어 회문(回門)이라고도 부르는 회문산(回門山)은 반석 같은 웅장한 바위들이 4km에 걸쳐 뻗어있고 높고 우뚝 솟은 봉우리는 항상 구름에 잠겨있다. 순창, 임실, 정읍 등 삼개 군에 걸쳐있는 이 산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다섯 선인이 바둑을 두는 모양의 오선 위기에 명혈이라는 명당을 비롯한 명당자리가 많기로 소문이나 풍수 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오선위기의 명당자리는 발견되지 않고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강증산 선생의 말을 해석하여 사대 강국이 우리나라를 에워싸고 있다가 다 물러가는 형국이라고도 한다.
또한 옛날 이곳에는 백룡이라는 산적두목이 무리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웅거했다고 전해지는데 산봉우리에 그들이 살았다는 것이 남아있고 장군봉 일대에는 크고 작은 묘소들이 여기저기 쓰여 져 있다. 회문산(837m)은 북쪽으로 투구봉이 있고 남쪽 능선에는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 만일 기도를 올렸다는 만일사가 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옛말에 “논두렁 정기라도 받고 태어나야 면장이라도 한다.”고 했으니, 이산은 그 후로도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동학교도들이 은신처로 삼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남부군 전북도당 사령부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 회문산이기도 하다.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낙강간 전선까지 승승장구하던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서 갈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다.
인민군과 좌익에 동조했던 사람들은 지리산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회문산 쪽으로 모여들었다. 용문산 가마골에 자리 잡고 있던 전북도당사령부가 회문산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까치병단, 보령병단, 벼락병단, 번개병단, 카투사병단, 독수리병단, 가도병단, 보위병단 등 10개의 병단과 군 단위 유격대대들이 회문산을 거점으로 치열한 빨치산 활동을 전재하게 된다. 하지만 남원 지역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호남지구 빨치산 토벌을 시작한 국군 제 11사단(사단장 김종운)이 50년 10월에서 51년 3월까지 벌린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의해 영화 속에서 안성기(이태)부대는 덕유산 쪽을 향해 동쪽으로 최진실(박민자)부대는 변산반도로 나뉘어 출발하였다. 그 결과 변산 쪽으로 향했던 빨치산들은 모조리 역사 속으로 숨어들었고 장안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향했던 빨치산들은 몇 년 간에 걸친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회문산에는 ‘사령트’라고 불렀던 유격대 전북도당사령부 자리와 빨치산들의 교육 장소였던 노령학원 자리가 남아있어 그 당시를 증언해 주고 있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 역시 한국전쟁 당시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내가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가 86년 이 때쯤이었을 것이다. 황토현문화연구소가 제 이름을 달기 전 시인과의 만남을 준비했는데 첫 번째 초대 손님이 김용택시인이었다.
순창 가는 버스를 타고 와서 덕치국민학교에서 만난 김용택 시인은 순수 그 자체였다. 그런 인연으로 우리들은 형님 동생하는 사이가 되었고 92년이던가 섬진강을 따라가는 답사 길에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었다. 용택이 형님네 작은 집에서 지금은 전남대학교에 자리를 잡은 소리꾼 전인삼 명창을 초대 흥보가 박타는 장면을 들으며 배꼽이 빠지게 웃다보니 나중에는 웃을 힘이 없었던 그 때가 아물아물 떠오른다.
뒤에도 얼마나 여러 번 이곳을 찾아왔던가. 가을이면 용택이 형님이 감을 따러 오라고 해서 식구들은 다 데리고 감을 몇 포대씩 따가기도 했고 좀 늦으면 이른 저녁까지 먹고 갔던 그 기억들이 내 발길을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십 육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 마을도 다른 마을과 별로 다를 게 없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낯선 사람들이라 선지 집집마다 개장에 갇힌 개들이 열을 내며 짓고 있으니...
용택이 형님은 학교에 계실 것이라 짐작했지만 어머님마저도 마실을 가셨는지 보이지 않고 지붕 위에 내린 눈이 녹아 흐르는 낙수 물소리만 요란했다
다시 용택이 형님네 집에 갔을 때는 두 주일이 지난 3월 24일 섬진강의 마무리 답사 길이었다. 안 계시리라 믿었었는데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열고 용택이 형님이 나오는 게 아닌가.
토요일이라 전주에 갈 일이 있었지만 신문에서 우리 답사가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우리를 보기 위해 집에 왔다고 하는 게 아닌가.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강 건너 앞산에 용택이 형님네 감나무는 아직 을씨년스럽게 헐벗었지만 돌로 만든 징검다리는 옛날이나 다름없다. 그래 원래 저 다리는 저 모습이 아니었다. 수십 년 수백 년을 두고 아무리 큰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돌다리가 사라진 것은 용택이 형님이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있던 시절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시멘트 다리를 만들며 그 돌다리를 없애버린 것이다. 병원에서 나온 용택이 형님의 아쉬움을 무어라고 표현하랴. 그 뒤 마을사람들이 다시 만든 징검다리는 옛 모습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옛 정취를 일깨워 준다고 할까 군산대 김덕수 선생의 말대로 저 징검다리 밑에다 나무다리 즉 섭다리를 만들어 놓고 용택이 다리라고 부르는 것도 괜찮을 성싶다고 생각하며 용택이 형님이 30여 년 전에 심었다는 느티나무에 앉아서 강의에 귀를 기울인다.
“여그가 동네 사람들이 삼을 삶던 곳이 예요. 삼을 째서 벗기던 이곳을 다른 동네 사람들이 지나갈 때는 담배도 안 피워야 하고 술 먹고 가다가는 얻어맞기가 일쑤였어요 나그네가 지나갈 때는 느티나무를 돌아가야 했어요...
저 강가가 얼마나 고기가 많던지 고기 반 물 반 했어요 우리 어머니가 “용택아 다슬기 잡아 가지고 올텡개, 불 때고 있어라”하고 나간 뒤 불 때고 있으면 금방 가서 한바가지 잡아가지고 오는디, 바가지만 가지고 가서 손으로 이렇게 더듬으면 한 주먹 되고 이렇게 하면 또 한 주먹 되고 그래서 금방 한바가지를 잡아 가지고 왔어요....
도시의 나무들은 전봇대 때문에 나무들이 잘 크지를 못하잖아요 고기들도 잠을 자고 나무들도 잡을 자거든요 풀도 밤에는 잠을 자는데 도시의 배미들은 새벽에도 잠을 자지 않고 우는디 그게 정상이 아니에요. 그래서 예전엔 밤고기를 많이 잡았어요.
멍쳉이라고 부르는 고기가 있는디 얼마나 멍창한가. 손바닥보다 큰 고기가 두손으로 잡을 때까지는 가만히 있다가 밖으로 나온 담에야 부르르 몸을 떨었거든요.
“고기 잡는 방법이 많이도 있어,요 그중 재미있는 것이 큰 메로 바위를 때리면 고기들이 기절해서 쑥쑥 나오거든요 그래서 진메마을 앞에 상처 없는 바위가 없다라는 말이 생겨난거예요” 말씀이 끝이 없지만 어쩌겠는가, 갈 길이 멀다.
우리가 진메마을을 떠날 때 느티나무는 섬진강 깊은 곳으로 숨고 길 옆의 가파른 바위 끝에는 하이얀 고드름이 하얗게 매달려 있었다. 그때 용택이 형님의 절창인 섬진강 2편이 강 위에 내려깔리고 있었다.
섬진강1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면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걸 웃으며
무등산을 보면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천담리에 천담초등학교가 있고 내가 속한 황토현문화연구소에서 91년 제 6회 여름문화마당을 열었었다.
90년 “지리산 해방에 눈뜬 이 땅의 봉수대여”라는 민족통일과 화합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지리산 달궁에서 열었던 제 5회 여름문화마당의 여세를 몰아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이라는 주제로 회문산의 인근에 위치한 이곳에서 행사를 열었다는 것 자체부터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물론 장소 섭외나 여러 가지 행사일정은 순조로웠다.
그때 용택이 형님은 이곳 천담 초등학교에 근무하고 계셨고 교실까지도 아담할뿐더러 물 맑기로 소문난 천담 초등학교에서의 여름문화마당은 가히 환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민중가수 안치환,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 소설가 박태순 선생의 문학 강연 녹색연합을 이끌고 있던 배재대의 장원 교수, 완전한 만남이란 소설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김하기씨 등의 강사진과 유등면 들노래 그리고 전통문화재현 등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으로 행사는 진행되었다.(...)
아름다운 마을 구담리
옛날 옛 시절 사람들은 이 깊은 골짝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구담리 마을에 국기봉은 녹슬어있고 새마을회관에 새마을 기는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동네 우물터는 매워져 버렸고 “아이고 저 집은 금방 허물어져 버리겠네”하고 탄식하는 최병선 선생의 목소리 속에 집은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버릴 듯 싶다. 정든 마을, 정든 사람들, 정든 집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여 김용택 시인은 연작시 섬진강에서 ‘이사’를 이렇게 그리고 있다.
“우리들은 저녁밥을 일찍 먹고 너나없이 모여들어 이삿집을 꾸렸다. 거울 깨진 농짝 하나 테맨 장독 몇 개, 헌옷 보따리, 때 낀 카시미롱 이불, 그 흔한 흑백 텔레비전 하나 없는 이런 촌 세간들이 서울에 가서 산다는 게 우습고 기막히는 일이지만 우리들은 말없이 이삿짐을 꾸려 회관마당 삼륜차에 실었다. 아주머니는 연신 눈물콧물을 훌쩍이며 코를 풀어 치맛자락에 닦았다.....
그의 텅 빈 집 앞을 애써 외면하고 지나며 이제 아무도 이사 들지 않을 꺼멓게 그을린 불빛 없는 그 이웃을 생각하며 우리들은 달 소쩍새 울음소리나 부엉새 울음소리에 강물소리에 돌아눕고 돌아누우며 며칠 밤잠을 설칠 것이다. 누가 또 떠나겠지. 누군가 또 떠나겠지.
섬진강 물소리가 한번 큰 소리로 뚝 그쳤다가 힘겹게 이어졌다.(...)
가고 온다. 나는 우주순환의 섭리를 이곳 구담마을의 빈집에서 느낀다. 느티나무 숲 우거진 동산에서는 흐르는 섬진강의 아름다운 모습만 보이고 흐르는 저 강물을 따라 나도 역시 흐르듯 내려갈 것이다. 내린 눈 때문에 물이 불어 회룡마을로 건넌다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을 듯 싶다. 강선생님이 운전하는 봉고차에 실려 회룡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날이 저물어 가는 시간이었다
용골산자락 늘어진 곳에 마을이 들어섰기 때문에 느재, 또는 어치, 어현이었다고 하며 지금은 회룡마을로 불리고 있다. 용골산 상봉에 있는 바위에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는 우리가 이곳을 찾았던 때는 몇 년 전 가을이었다. 장군목에 있는 요강바위를 바라보고 이 마을을 지날 때 집집마다 밤을 따고 있었다. 밤 한 말에 만 원 쯤 인가를 주고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맛있게 삶아먹었었는데 그 집이 지금은 빈집이 되어 마당까지 물에 흠뻑 젖어 있다니 나는 지나가는 마을 사람에게 묻는다. 예전에는 이 마을에 몇 가구쯤이 살았었느냐고 “스물댓집 되었는데 지금은 일곱 집이 남았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음성에는 자조와 체념의 빛깔이 뒤섞여있고 집집마다 콜택시 스티카가 붙어있다. 이유는 버스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란다. 옛날 만해도 밥술이나 먹고 살았음직한 집도 텅텅 비어있고 쓸만 한 땅들조차도 묵정밭이 되고 있으니 이 농촌을 어찌할 것인가. 저들마저 떠나고 나면 누가 있어 이 빈집만 늘어서 버린 마을을 지켜줄 것인가. 바라보는 내 시선 속으로 푸르디푸른 대나무 잎만 사각거렸다.“
민음사 출판부 판미동 간, 신정일의 <섬진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중에서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이라고 소문난 섬진강의 중류, 그것도 임실군 덕치면 물우리 월파정에서 덕치면 천담리 구담마을까지 걸으실 분은 미리 신청하십시오.
신청시 주의 사항, 서울 경기도와 천안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 전주광주 대전은 전주로 표시해서 신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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